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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8화: 불꽃 (79/80)


외전 8화: 불꽃
2023.07.29.


찬정이 바람을 피워서 설희와 헤어진 거 때문에 인경은 여전히 그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좋을 수가 없다. 거기다가 오늘은 골치 아픈 야근까지 했다.

온몸이 피곤하기도 하고, 찬정과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니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찾아와서 고맙다. 근데 나중에 전화로 이야기하자.” 그리고 전화 안 받겠지.


“하아…….”

인경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하는 게 자신의 성격에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시하기엔 찬정의 표정이 너무나도 절박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은 인경이 째려보자, 그녀의 핸드백에 살포시 걸려 있었다. 거기다가 무엇보다.

회사를 잘렸다 하니 더 인경의 발걸음이 떼지지 않았다.

인경도 2년 전, 갑자기 회사를 그만둬야 했던 적이 있었다. 갑자기 월급이 밀리더니, 무기한 무급 휴가 처리가 되었다. 회사 재정이 어렵다고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던 그때 얼마나 막막하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알았어.”

“정말?”

“응. 근데 커피로 하자. 오늘 빨리 들어가 봐야 해.”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짚었다. 아이고, 내 머리야. 카페인이라도 들이부어서 정신을 차려야겠다. 대충 회사 앞의 카페로 그를 데리고 갔다.

***


 


“마시고 싶은 걸로 시켜.”

카페를 도착한 후, 찬정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 말에 서둘러 인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너…….”

회사도 그만뒀는데, 무슨 돈도 없는 네가 사니. 내가 살게. 지금 돈 있어도 금방 돈 사라진다.

그렇게 말하려던 인경은 그 말이 너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일 것 같아 서둘러 입술을 다물고 도리도리했다.


“아냐. 더치페이하자. 괜찮아. 회사 앞이고.”

“아냐, 내가 억지로 너 끌고 온 건데. 마음대로 시켜, 응? 뭐든 괜찮아. 꼭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래. 비싼 것도 먹어도 돼. 저기 케이크도 먹을래? 저기 쿠키도 맛있어 보인다. 집에 가져 가게 세트도 사. 부모님 드셔야 하지 않아?”

“나 혼자 살아.”

“아, 그래? 그래도 사. 두고두고 놓고 먹어.”

얘 왜 저래.

인경은 빤히 너무 오버액션을 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실업급여라도 받고 있나? 아니면 허세가 장난이 아닌가. 갑자기 왜 이런가.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인경이 웃었다. 그냥 직장이 어려운가.


“아냐, 밤에 먹으면 살쪄. 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로 마실게.”

“응, 그래. 살찌면 안 되지. 너 좀 살 붙은 것 같다. 나중에 사줄게.”

그의 말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인경이 눈을 껌벅거리며 그를 바라보자, 찬정이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자신을 바라본다.


“응? 왜?”

아니…… 아니, 너 말이야.

말을 하려다 말고, 인경은 참을 인 자를 몇 번이고 쓰고는 겨우 웃어 보였다.

상대는 실업자다. 갑자기 회사 그만둔 사람. 그러니까 참자. 미쳤는지도 몰라.

그렇게 제 마음을 다스리며 커피를 받아가지고 인경은 자리에 앉았다.

***



“그런데, 갑자기 왜 회사는 그만뒀어?”

“아, 그게.”

자리에 앉자마자, 다른 이야기는 하기 싫어서 얼른 회사 이야기를 인경이 꺼냈다. 그러자 찬정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너 그, 팀장님이랑 사이 좋은 거 아니었니?”

정확히 말하면, 찬정이 설희와 사귀고 있는 사이 여자 팀장과 찬정이 바람을 피워서 헤어지고 그 뒤로도 찬정과 여자 팀장이 계속 만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 팀장은 능력이 좋다고 소문났다고 설희는 그랬었는데, 나중에 찬정이 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회사의 어떤 임원 딸이란다.

그런 금수저 낙하산을 딱 손에 쥐고 있는데, 어떻게 회사를 잘렸을까? 찬정이 아무리 실수를 저질러도, 임원 딸 남자친구인데. 궁금해서 문득 물어보았다.


“그게 누나랑…….”

이라고 말하려다가 찬정이 말을 멈췄다. 아, 누나였구나. 연상의 여자.


“아니, 팀장님이랑 이제 안 만나.”

“왜?”

그렇게 오래 사귄 설희까지 배신하고 바람피워놓고는. 인경이 되묻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그렇게 됐어.”

“아니, 꽉 잡고 있어야지. 헤어지면 회사생활 어려워지잖아.”

“…….”

“누나가 싫어도 그냥 참고. 아니, 너 요즘 얼마나 취업하기 힘든지 알아?”

인경이 무심코 한 잔소리에 찬정은 고개만 숙이고 듣고 있었다.


“결혼까지 딱 해서, 정년까지 다닐 생각은 안 하고…….”

“내가 헤어지자고 한 거 아냐.”

찬정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내가 헤어지자고 한 거 아니라고. 누나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거야. 몇 번 사귀었다가 헤어졌다가 하긴 했는데, 이제는 정말 끝났어. 완전히 끝이야.”

“왜?”

설희에게 듣기로는 팀장 역시 찬정에게 푹 빠져 있었다고 들었다. 설희가 아직 회사에 있을 때 그런 이유로 쥐잡듯이 설희를 잡았고, 결국 회사를 빠져나가게 됐다고. 그 이후에 헤어졌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또 만난다고 동기들이 그랬는데. 찬정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남자가 생겨서…….”

웅얼웅얼, 그가 작게 말하는 소리에 ‘같은 팀에 들어온 신입이 잘생겼다나, 뭐라나.’라는 게 들렸다.

아이고. 잘나가는 임원 딸이 바람을 피웠구나.

인경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입꼬리가 씰룩였다. 조심하자. 잘못하다가는 그만 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겨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최대치였다.


“아아.”

“나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아니, 헤어지고 싶을 때도 많았어. 얼마나 그 여자가 이기적인지 몰라. 근데 참았지. 헤어지면 회사 다니기 어려워질 거고. 근데…… 그 여자가.”

찬정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인경의 입술이 실룩였다. 아이고, 설희한테 알려주고 싶다.

물론, 지금 설희는 동물병원에서 만난 옥 선생과 깨 볶는 시간 중이었다. 그러니 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남자가 있었다고 기억이나 할지 몰라. 나 같애도 옥 선생 같은 남자랑 사귀면 찬정 따위 잔잔바리는 다 잊을 터였다.

그래도 언제나 악역의 새드엔딩은 재밌으니까. 아는 게 재밌지.

인경은 얼른 이 약속이 끝났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야 집에 가면서 설희에게 “들어봐, 설희야. 내가 오늘 뭘 들었냐면…….” 하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찬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여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고, 또…… 휴, 같은 팀에 내가 있으면 불편하다고 엄청 괴롭혔어. 내가 잘못했지. 당해보니까 알겠더라고. 그 여자가 얼마나 지독하고 나쁜 여자인지.”

설희가 그녀에게 괴롭힘당했을 때를 떠올리며 찬정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랬어?”

“회의에서 나한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고, 내가 준비해간 보고서를 일부러 버리고, 그리고 들어봐.”

“그래서 그만뒀어?”

인경은 자세한 내용까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얼른 본론부터 듣고 싶다.


“응.”

“네가 그냥? 그럼 실업급여도 안 나올 텐데.”

“몰라, 홧김에 그만둬 버렸어.”

“와오…… 대박인걸.”

찬정의 말에 결국 인경은 긴 감탄사와 함께 웃고 말았다. 그러자 찬정의 얼굴이 구겨졌다. 기분이 상했을까 봐 인경은 얼른 말을 이었다.


“아니, 그, 정말 대박 나쁜 여자라고.”

“그렇지? 그렇지?”

“그러게.”

그리고 너는 학습능력이 없는 머리 나쁜 남자고.

설희를 회사에서 쫓아냈을 때, 자신도 뭔가 사이가 나빠지면 쫓아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못 깨닫다니 정말 바보였다.

뭐, 내 알 바 아니고.

인경은 슬슬 이야기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흘깃 확인하고 그에게 물었다.


“근데, 찬정아. 나한테 무역회사 관련해서 묻고 싶은 게 뭐야?”

“어…… 너희 회사 사람 안 뽑아?”

“어? 어…… 응, 안 뽑아.”

갑자기 나타나서 묻는 게, 우리 회사 사람 뽑냐인가? 그냥 인터넷에서만 봐도 알 텐데.

거기다가.

인경이 다니는 무역회사는 주로 ‘수입’을 담당하는 회사였다. 요즘은 달러 값이 올라서 환율이 엄청 비싸졌다.

이 상황에서 수입하는 업체는 어려워지는 게 당연했고, 아직 인경의 회사는 잘 버티고 있었지만 더 혹독한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람을 뽑을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찬정은 없다는 말에도 실망하는 기색 없이 담담했다.


“그랬구나. 안 뽑는구나.”

이 난리를 친 거 치고 반응은 너무 담담했다.


“그게 다야?”

“응.”

“뭐야, 그럼 아까 말하지.”

그냥 로비에서 물어봤어도 되는 일이었잖아. 인경이 혀를 찼다. 그러자 그가 미안한 듯 웃었다.


“미안, 너무 절박해서.”

“……아, 그래. 묻고 싶은 게 이게 다였어?”

“어어.”

그럼 일어서야겠다. 하소연이라도 하러 온 건가 싶어 인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저기…… 근데.”

찬정이 그녀를 불렀다.


“응.”

“요즘 설희는 뭐 해?”

그 말에 인경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이코야, 결국 또 이거였다.


“이게 목적이었구나?”

결국 그가 궁금해한 것은 이거였다. 티끌만큼도 관심 없는 인경의 무역회사 따위가 아니라.

인경의 날카로운 질문에 찬정이 답했다.


“아니, 겸사겸사. 저기…… 설희가 요즘 연락이 안 돼서. 동물병원에 찾아가 봤는데 당분간 휴가라고 하더라. 한 한 달 정도.”

“또 찾아갔어? 너 걔가 얼마나 싫어했는데. 전에도 그랬었다가 경을 치고는.”

“연락이 안 되니까 찾아갔지.”

찬정이 손을 뻗어 인경의 손을 잡았다.


“인경아.”

“아, 왜 이래.”

손끝에서 스멀스멀 안 좋은 기운이 올라온다. 그가 한 짓에 몸서리를 치며 인경이 인상을 구겼다. 얘는 아까부터 왜 자꾸만 날 건드리나. 인상을 팍 구기자, 찬정이 “미안.” 하고 말하고는 말을 이었다.


“나, 진짜 설희 없음 못 살아. 팀장이랑은 헤어진 지 몇 개월 됐구, 이제 정말 정신 차리고 살 거야. 나 정말 반성하고 있어. 설희랑 나랑 사귄 게 몇 년인데 고작 일 년 떨어진 걸로. 회사는 그만뒀지만, 너 WS그룹 알지? 나 거기 중도 채용 최종 면접까지 갔어. 경쟁률이 1.5대 1이래. 그 정도면 아마 되지 않을까? 그래서 말인데 설희한테 네가 잘 전해주라. 응?”

“야, 이찬정.”

머리가 지끈거렸다. 멍멍이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정신이 어지러웠다.

오늘 아침에 신문에 난 별자리 운세를 봤다. 염소자리, 북쪽에서 오는 사람을 조심하라. 찬정이 어디 살더라. 아, 종로구. 여기보다 한참 위였다.

화를 다스리고, 이를 악물고 인경이 입을 열었다. 휴, 이 인간 얼굴 구겨지는 꼴만 보고 가야지. 안 그러면 화가 나서 오늘 밤 제대로 자지도 못할 것 같았다.


“꿈 깨. 너 설희가 휴가 낸 이유가 뭔지 알아?”

“뭔데?”

“신혼여행.”

그 말에 찬정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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