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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화: 달콤한 고백 (76/80)


외전 5화: 달콤한 고백
2023.07.18.


은우가 까만 상자를 손에 든 채 속삭였다.


“WS에 돌아가는 건 나에게도 대단히 큰 도전이지만, 그래도 너에게 당당해지고 싶어서. 지금까지 미뤄왔던 일을 하려고 해.”

그가 조용히 읊조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설희는 은우가 내민 상자를 가만히 보았다. 언젠가의 기억이 떠오른다.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목걸이를 내밀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와 꼭 같았다.
 


“나,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


“하지만 내 결심을 알려주고는 싶어서. 설희 씨가 준비가 되면, 그때 결혼하고 싶어. 아까처럼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 있으면 평생 함께 나누고 싶고. 그런 날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힘든 순간이 있으면 그 순간도 함께 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오늘과 같은 까만 상자에 든 목걸이를 선물했었지.
 


“어디서 줄까 고민을 많이 했어. 좋은 레스토랑, 아름다운 여행지. 하지만 이 작은 2평짜리 공간이 우리의 시작이었으니까, 앞으로의 시작도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그의 말에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 이미 서로의 미래를 약속했었다.

모든 것이 같았지만, 오늘 은우가 자신에게 내민 것은 그때 받았던 것 보다 훨씬 작은 상자였다.


“그때 기다릴 수 있다고 했었지. 당신이 원하는 만큼 시간을 들여도 좋으니까,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하지만…….”

은우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이제는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아.”

돌마래를 떠나면,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도 줄어들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사랑을 속삭이고, 그런 생활은 불가능하게 된다. 격동의 시기가 된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어, 너와 하루를 같이 열고, 같이 닫고 싶어. 단순히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게 아니라 그것을 서로에게 약속하고 싶어…….”

그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은우는 상자를 열었다. 박스가 달칵 열리고, 안에서는 영롱하고 투명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나왔다.

예쁘다.

긴장되는 이 상황에서도 무심코 그렇게 말이 나올 정도로 반지는 아름다웠다. 눈길을 확 잡아끈다. 설희는 멍하니 반지를 바라본다.


“이거 뭐야? 어떠한 의미로 주는 거야?”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었다. 설희의 생일도 멀었고, 둘이 사귄 지 1년이 되는 날도 아니었고, 200일, 300일, 그런 걸 다 따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니다. 놀라 그저 숨이 멎은 상태로 그저 반지만 바라보는 설희에게 은우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청혼 반지야.”

“…….”

“보통 이런 거 안 하나?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너에게는 모든 단계를 다 밟고 하고 싶어서.”

설희 주변에도 지금 슬슬 결혼을 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러나 보통, 프러포즈라고 한다면, 청혼 반지를 준다고 한다면 결혼이 다 정해지고 결혼식을 앞두고 청혼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보통의 남자가 아니니까.


“내 이기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일을 끝내고 돌아와서 혼자 있는 게 싫어. 너와 함께 있는 게 당연해졌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

“너무 급박한 말이라…….”

그가 말을 길게 내뱉는 순간,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좋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런 사랑 고백에 마음이 떨리지 않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난 좋아요, 은우 씨. 좋아.”

지난번, 그의 고백을 그저 알겠다고, 마음이 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 이미, 나는 바로 하고 싶었어.”

“바로?”

“응.”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우의 얼굴에 미소가 퍼져나갔다.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서 유려한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일 바로 결혼하자고 할지 몰라.”

“…….”

“구청에 가서 당장이라도 신고하자고. 그래도 괜찮아?”

그의 질문에 설희의 입에서 웃음이 샜다. 내일 당장 구청에 가서 신고를 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특색 있고 좋을 것 같아.


“나는 좋아.”

설희가 간명하게 답하자, 은우가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좋다고 해도 돼? 부모님이 아시면 놀랄 텐데.”

“놀라시겠지, 하지만…….”

엄마가 아신다면 까무러치실 거다. 좋아서 까무러치시겠지.

설희의 어머니는 은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다. 잘생기고, 예의 바른 청년이라며. 그와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닐 적에 부동산에서 그와 만났었는데 그때부터 설희의 어머니가 사윗감으로 찜해놨었다.

그와 사귄 지 좀 된 지금은 어머니도 은우와 설희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잔소리가 많은 설희의 어머니는 “그렇게 괜찮은 남자를 왜 얼른 집으로 데려오지 않느냐”며 달달 볶았다.

그런데 “결혼하기로 했어요. 아니 이미 했습니다.”라고 하면 아마 만만세를 하실지도 모를 터였다.


“자기랑 함께라면, 좋아하실 거야. 어떻게 해도.”

설희의 말에 은우가 웃었다. 테이블 위를 탁탁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던 은우가 말을 뱉었다.


“싫어할 줄 알았어.”

“뭘?”

“내가 WS에 돌아가는 것.”

설희가 은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기 믿어. 언제나 최고의 선택을 할 거라고. 그래서…… 좋아. 그게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게 맞다고 생각해.”

자신이 아는 옥은우는 누구보다도 현명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힘들어질 일도 있을 것이다. WS에서 일을 하게 되면, 그것도 그가 말한 대로 원더풀랜드를 개혁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지겠지. 바쁘기도 할 거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중간 과정일 것이다. 그는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고, 또 그 과정에서 설희는 그와 함께 할 수 있을 거고.

어쨌든 우리의 결론은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그 말에 은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반지 상자를 집어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


“아.”

“그럼 유설희 씨. 나랑 결혼해줄래요?”

정식 프러포즈.

그 말에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옥은우 씨.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은우는 조심스레 설희의 손을 들어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두 팔이 자신을 꽉 끌어안았다. 인생을 영화라고 따지면, 지금이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설희는 행복했다.

***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은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설희에게 병원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고, 청혼을 하자마자 은우는 그 결심을 돌마래 동물병원의 원장에게도 밝혔다. 원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옥 선생이 WS그룹의 회장 아들이었다고?”

병원을 그만두겠다고 하는데, 원장은 그것을 더 신기해했다.


“외삼…… 원장 선생님.”

그 자리에 동석했던 설희는 자신의 가족이기도 한, 원장이 너무 놀라 펄쩍 뛰는 것을 보고 창피한 나머지 병원인데도 그만 외삼촌이라는 이름을 부르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런 설희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원장이 다시 물었다. 입술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옥 선생이, 그러니까 옥 은우 선생이 그 WS그룹의 회장의 아들이었다고?”

이런 반응이 낯설지는 않은지, 외삼촌이 이상한 말을 할까 봐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설희와 달리 은우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답했다.


“네.”

“아. 아아. 아아아.”

놀라운지, 원장은 계속 이상한 소리를 냈다.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설희는 한 손을 들어 어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큰일이었다. 은우가 WS그룹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했다.

전에 그, 이현의 여자친구였던 이상한 여자가 어떻게 은우의 뒤를 밟아 알아낸 이후로 이현과 공유한 게 다다. 그 외에는 은우의 친구들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선후배나 병원 사람들 역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알게 되면 다들 이렇게 놀라워하겠지.

그럴 만도 한 게 은우에게서는 재벌가의 아들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랬으니 설희도 이현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가 원더풀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보여준 기사가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구나.”

“저, 원장님.”

아무리 놀랄 만하다고는 해도, 원장의 놀람이 너무나 길어지고 있었다. 이랬다가는 은우가 병원을 그만둔다고 하는 소정의 목적도 이루기 전에 오늘 밤이 깊을 것 같았다.


“병원 관련 이야기를 마저 하시는 게 어떨까요.”

설희의 말에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랬지.”

탁탁 테이블을 치며 원장이 말을 이었다.


“원래 부친이 운영했던 회사로 들어간다고? 그래서 병원을 그만두겠다고?”

“네.”

“언제 그만둘 생각인가?”

“사람을 구하고 나서 그만둬야겠죠.”

병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사람…… 그래, 내가 주변 사람들 통해서 한번 구해볼게.”

“죄송합니다, 원장님.”

은우의 깍듯한 사과에 원장이 너털웃음을 치며 두 손을 저었다.


“아니야, 사실 옥 선생 같은 사람이 우리 병원에 이렇게 오래 남아준 게 거의 기적이지.”

은우가 돌마래 동물병원에 취직한 것은 최소 5, 6년은 되었다고 들었다. 보통 수의사들은 동물병원에 취직한 후 아주 오랜 시간 남는 것은 흔치 않다고 했다.

3년에서 4년 정도만에 독립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심지어, 은우같이 능력 좋고 환자들을 몰고 다니는 사람은 더더욱. 그러니 5년 넘게 있었던 것은 정말 예상 밖이긴 했을 터였다.


“그만두는 시기가 되도록 빠르면 좋은 거지?”

원장의 말에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드립니다.”

“그래, 걱정 마. 찾아볼게.”

그러면서도 원장은 다시 “아, 근데 우리 옥 선생이 WS의……” 하고 꿍얼거렸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며 “그렇다면 우리 설희가 WS에 들어가서 재벌집 며느리……”라고 뒤에 붙은 소리까지 들렸다.

미치겠다. 은우가 이 소리를 듣지 못하기를 바라고는 그를 바라봤지만, 웃음을 참고 있는 듯 실룩이는 입술을 보니 아무래도 곧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앞길이 태산이다. 외삼촌도 이런 반응인데 엄마가 은우의 집안을 알게 되면 뭐라 할지.


“삼촌…….”

살려주세요, 제발요. 그런 표정으로 설희가 그를 부르자, 원장이 눈을 설희에게로 향했다.


“으응, 왜, 우리 재…….”

벌 며느리. 그렇게 말하려는 것 같아 서둘러 설희가 말을 끊었다.


“엄마에게는 비밀이에요. 말할 때까지만.”

그러자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았다는 듯, 손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렇지만 설희는 하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될는지.

설희는 왼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걸 보고 또 원장 선생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

한번 은우가 병원을 그만두는 것이 결정되자 모든 것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눈이 팽글팽글 돌아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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