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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화: 설렘과 두근거림 (75/80)


외전 4화: 설렘과 두근거림
2023.07.15.


옥은우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늘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약속 시간 5분 전. 설희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익은 차가 미끄러지듯 설희의 앞에 섰다. 은우의 차였다. 차 문이 열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서 은우가 뛰어내렸다. 설희의 앞에 섰다.


“기다렸지?”

“아냐. 수업은 잘 끝났어?”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은우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가끔 진료를 쉬고 학교에 다녀오곤 했다. 오늘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냥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기엔 그는 너무나 찬란했다. 티셔츠에 가벼운 재킷 하나를 걸치고 있을 뿐인데도 태가 났다. 바람이 불어 그의 단정한 이마를 드러낸다.

설희를 보면서 빛나는 눈빛. 별도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인데도 그의 눈빛에 어린 것이 마치 별을 띄워놓은 것 같다.


“고생했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수업인데. 타.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 그는 그가 안전벨트를 매주고, 곧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온 곳은 가을밤에 잘 어울리는 야외 레스토랑이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너무 멋지다.”

강남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도 나무가 담장 쪽에 심어져서인지 마치 한적한 교외라도 나온 기분이 들었다. 어두운 정원을 밝히기 위해 위에는 알전구들이 드리워져 있어서 더 로맨틱했다.


“여긴 또 어떻게 알았어?”

“알고 싶어?”

“응.”

워낙 바쁜 두 사람이다 보니 자주 밖에서 데이트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데이트를 할 때면 은우는 특별한 곳에 자신을 데리고 와줬다.


“재미없을 텐데.”

“알고 싶어.”

하얀 테이블보가 펼쳐진 네모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냥 별거 아닌 거라도 알고 싶어.”

설희의 말에 은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렇게 고상한 과정이 아니었어. 친구의 아는 사람이 이 레스토랑을 하는데, 하루 통째로 빌리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지. 꽤 인기가 많은 곳인지 열심히 부탁했고.”

“하루 빌린 거야?”

“응. 과정을 몰랐으면 더 좋았겠지?”

그리고 은우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제야, 설희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아까 들어올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조금 한산하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은우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로, 아까 안내를 해준 직원 외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기를 빌린 거야?”

“응.”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랬지, 하지만 이렇게 둘이서만 해야 할 말이 있었어?”

설희의 질문에 은우가 미간을 비틀었다.


“싫어?”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무슨 말인지 긴장돼서 그래.”

“나도 그래. 긴장돼. 내가 한 말에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도대체 무슨 말일까. 긴장에 입술이 바싹 말랐다. 그때, 직원이 하얀 플레이트 위에 장식된 전복을 설희의 앞에 두었다.


“먹고 이야기할까?”

평소였다면, 그래요. 라고 했을 설희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침에 그가 ‘할 말이 있으니 오후에 만나자’고 했을 때부터 긴장했다. 얼른 그가 할 말을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먼저 이야기해줘요. 무슨 이야기인지. 너무 긴장돼서 하루 종일 걱정됐어.”

“미안. 그렇게 긴장시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은우는 길고 하얀 손을 뻗어 물잔을 들어 입술을 적신 뒤, 입을 열었다.


 


“동물병원을 그만두려 해.”

“음?”

“동물병원을 그만두려고 한다고.”

“…….”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라 설희의 입술이 반쯤 벌어졌다.

놀란 이유는 명백했다. 우선, 그가 오늘 설희에게 할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연애 관련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결혼을 얼른 하고 싶다, 같은 긍정적인 이야기건. 아니면 조금 시간을 가지자 하는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건, 서로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병원을 관두는 그런 이야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 놀란 이유는.

그가 동물병원을 그만두려고 한다는 것.

현재 돌마래 동물병원은 세 명의 수의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설희의 외삼촌이자 원장, 새로 들어온 선진, 그리고 은우. 셋으로도 간신히 돌아갈 정도로 환자가 많았고 정신없었다. 그런 돌마래에서 은우의 존재는 압도적이었다. 대부분의 보호자들이 은우에게 진료를 보고 싶어 했다.


“돌마래말고 다른 병원으로 가는 거야?”

“아니.”

“그럼?”

은우가 잠시 망설였다.


“수의사를 그만두려고 해. 정확하게 말하면, 동물병원 수의사를.”

“……수의사를?”

그거야말로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은우는 애초에 머리도 좋았지만, 노력파였다. 누구보다 동물에 대해 고민했고, 부족한 부분이나 모르는 점이 있으면 공부했다.

그가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누구보다 옆에서 그를 보는 설희가 잘 알았다.

그런 그가 수의사를 그만둔다고? 상상이 되지 않았다.

놀란 설희의 얼굴을 보고, 그럴 법하다는 듯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지.”

“……조금.”

“미안해. 일이 너무 급작스럽게 돌아가서 나도 마음을 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어떻게 되는 거야? 병원을 그만두면.”

은우는 자신의 손 위에 올려져 있던 설희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꽉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WS로 돌아가려 해.”

“WS로?”

은우의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WS그룹의 전신 원성그룹의 창업자였다. 그리고 현재 은우의 아버지, 옥경일은 WS그룹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은우 역시 WS호텔의 산하 원더풀랜드에서 1년 정도 일을 했으나, 현재는 퇴사하고 동물병원에서 수의사를 했다.

그는 경영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동물이 가깝다고. 그래서 경영에는 맞지 않아서 나온 거라고 했기에 앞으로도 돌아갈 일은 없다고 했는데.


“응. WS호텔로 돌아가려고 해.”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걸까. 혼란스러운 설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은우가 차분히 설명했다.


“설희 네가 혼란스러워할 것 알아. 원더풀랜드를 개혁하고 싶어서. 개혁하려면 그 적임자는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은우는 조곤조곤,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원더풀랜드에는 커다란 동물원이 있다. 우리나라 사기업에서 운영하는 것 중에서는 가장 큰 크기의 동물원이었다.

아시아 안에서도 3번째로 드는 큰 곳이었다. 원더풀랜드의 놀이기구도 매력적이었지만, 동물원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수의대를 졸업할 당시, 그가 원더풀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
 


“은우가 수의사니, 원더풀랜드를 맡으면 되겠구나.”

 
동물원에는 수의사 출신 직원들이 많았다. 단순히 수의사 업무를 보는 것을 넘어서 나중에 경영에도 참여하는 사람이 많았다. 은우 역시 그런 루트를 밟다가, 원더풀, 넘어서는 WS호텔까지 은우가 맡게 되기를 가족들은 당연히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 동물원에서 일하는 것은 상상과는 달랐다.

수의대를 다니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견학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현실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더 혹독했다.

원더풀랜드는 동물원치고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사육 시설도 넓은 편이었고 사료들도 자연에 흡사한 것을 많이 주었다. 사람들이 내는 소음에 놀라지 않도록 장치도 여럿 해두었고.

그러나 대부분의 동물들이 정신병을 가지고 있었다.

백곰은 한 자리에서 내내 빙글빙글 돌며 있었고, 기린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긴 목을 흔들어댔다. 갇힌 공간에서 너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생긴 병이었다.

바꾸고 싶었지만, 제아무리 오너 가족이라고는 해도 신입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점점 더 고통만 더해져 갔고 그래서.


“비겁하게 도망쳤어.”

“비겁하다니.”

설희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비겁해.”

조직을 바꾸려면 조직에 남아 있어야 했다. 힘들고 지치더라도 남아 있어야.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은우의 얼굴이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런데 이제는 각오가 된 것 같아.”

오랫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대학원에 다니는 것도 그러한 차원의 것이었다.

그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야생동물학. 동물원의 동물들이 어떻게 하면 가장 자연 그대로의 삶을 지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래서 WS로 돌아가게.”

“그렇구나.”

“놀랐어?”

“조금.”

“실망했어?”

“실망?”

설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실망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은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쓰게 웃었다.


“내가 원더풀을 그만둔 이유를 궁금해했잖아.”

그건 그랬다. 설희는 그와 사귀고 나서 그 점에 대해 계속 궁금해했었다.

원더풀은 그의 가족의 회사였고, 그가 일반 병원에서 봉직의로 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듣고 나니, 은우가 왜 그런 결정을 했을지 쉬이 납득할 수 있었다.

그를 바라보았다. 정원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남자의 얼굴을 스쳤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떠 있지 않았다. 냉정하고도 철두철미한 평소의 성미가 드러났다.

하지만.

설희의 손 밑의 그의 손등은 더없이 따뜻했다.

저렇게 서늘하고 이성적인 얼굴 아래는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이 있었다.


“그게 이런 이유라서, 실망스럽지 않아?”

“전혀. 오히려…… 이런 이유라니 너무 대단하다, 그런 생각만 들어.”

설희의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단하긴…… 난 그런 사람이 아냐. 네가 나를 너무 높이 사주는 거지.”

“자긴 그런 사람 맞아.”

누구보다 그를 곁에서 지켜봤다. 은우는 대단하고 배우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서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설희의 말에 은우가 잠시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망설이는 모습. 그 모습에 설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내가 왜 돌아가려고 했는지 알아?”

회사를 그만두고, 일반 동물병원의 수의사가 되고 나서 굳이 WS로 다시 돌아갈 결심이 생긴 이유. 그 이유를 은우가 묻자, 설희가 미간을 좁혔다.


“음, 이제 충분히 준비가 되어서?”

“아니. 동물병원을 두고 다른 곳으로 가는 이유는 바로 너 때문이야.”

그가 느른하게 속삭였다. 은우의 말투는 마치 시원한 가을밤처럼 설희에게 와닿았다.


“유설희, 네가 있어서 나는 한 발자국 뗄 수 있었어.”

“…….”

“그래서 이거, 받아줬으면 좋겠어.”

은우는 네모난 상자를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옥은우는 지금 정말로,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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