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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화 : 일렁이는 감정들 (74/80)


외전 3화 : 일렁이는 감정들
2023.07.11.


설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은우가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주 이상한 분은 아니야.”

“그렇겠지.”

설마 은우의 어머니인데 아주 이상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곧 만나보게 될 거고. 그러니까 정말, 걱정하지 마.”

“응.”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데, 곧 만나보게 된다는 말에 오히려 설희의 등줄기에 긴장이 달렸다.


“정말이야. 긴장하지 마.”

은우가 설희의 단단하게 굳은 입매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은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남자였다. 가끔은 직설적이라고 그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가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다.

그렇게 설희는 마음을 다스렸다.


“알았어. 걱정 안 할게.”

“응.”

그가 씩 웃고는 어서 먹으라며 몇 가지의 밑반찬을 끌어와 설희의 앞에 놓아줬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설희야.”

“응.”

그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매일 저녁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그와 함께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갑자기 시간을 확인하다니.


“응. 시간은 있는데, 갑자기 왜?”

“할 말이 있어서.”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일까. 그의 말에 무게감이 실려 조금은 두려워졌다. 일렁이는 설희의 표정에 그가 씩 웃어 보였다.


“저녁에 이야기할게. 그때 이야기해. 우선 병원 가야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은우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하자, 벌써 시간이 8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얼른 준비하지 않으면 지각이었다.


“그렇다. 얼른 가야겠어.”

설희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도 바빴다.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느라, 그가 꺼낸 말은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


 
도화재(桃花齋).

서울의 한가운데 위치한 저택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안에 꾸며진 길을 걷다보면, 이곳이 산속인지 아니면 도시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나무가 우거졌다. 물론, 고개를 들어보면 높다란 빌딩숲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호젓한 풍경이 마음을 달랬다.

가을이 깊어지자, 도화재의 나무에는 곱게 단풍이 물들었다. 솨아,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린다. 그 풍경을 보던 여인이 웃었다.


“어째 북쪽에서 바람이 다 부나. 변화가 찾아올런가.”

그 여인의 이름은 이희윤.

WS그룹 옥경일 회장의 부인으로, 보통 WS에서 ‘안주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원래 정치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미술을 하고 곱게 자랐다. 손에 한 번 물을 묻혀본 적도 없이, 각종 예술과 교양을 습득하고 풍류를 즐겼다. 아주 오랜 시간 쌓아온 그러한 우아함이 얼굴에서도 드러났다.

벌써 60대가 되었지만 세월의 흔적은 보여도 타고나기를 빼어난 미인이었던 것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런 그녀는 묘한 예감이 들면 그게 잘 맞아떨어지곤 했다. 지금 밖을 보는 이 순간, 큰 변화가 찾아올 것을 예감했다.

커다란 창밖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을 바라보던 희윤의 귓가에 똑똑, 희미하게 울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문이 드르륵 열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큰 체구의 남자가 들어왔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희윤을 앞에 두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사모님.”

“응,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자네가 오전에 도화재에 있는 걸 오랜만에 봤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남자는 10년 이상, WS그룹의 옥경일 회장의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던 비서, 준환이었다. 그는 회장의 모든 사업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사적인 부분에도 깊숙이 참여하고 있었다.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환석이 옥경일 회장의 오른팔이라 한다면, 준환은 옥경일 회장의 왼팔이었다.


“말해봐요.”

“도련님이 드디어 결심이 서셨답니다.”

WS에서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옥경일 회장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다. 첫째이자 은우의 형인 선우는 WS에 입사해서 현재 전무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기에 선우는 ‘전무님’이라고 불리웠다. 그렇기에 도련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오직, 옥경일 회장의 둘째 아들 ‘옥은우’뿐이었다.


“응? 은우를 말하는 건가?”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은 희윤이 되물었다.


“네. 은우 도련님이 결심하셨답니다.”

“녀석이 드디어? 아.”

“네. 회장님과 오늘 회의를 가지신다 합니다.”

희윤이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이야기였다. 그녀의 얼굴에 환히 미소가 번졌다.


“그래요?”

“네.”

“그렇구나. 좋은 소식이네.”

“그렇죠.”

희윤은 준환이 들고 온 소식이 마음에 드는지, 몇 번이나 잘됐네, 잘됐어. 하고 말을 하며 손뼉을 쳤다. 환히 웃다가 문득, 희윤이 몸을 돌리고 준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은우가 마음을 정했을까. 절대 싫다고 하던 아이였잖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준환의 말 행간에 깊은 의미가 느껴졌다. 희윤이 굳이 꼬집어 물었다.


“여러 가지라면…… 예를 들어 지금 만나는 아이?”

준환은 희윤의 말에 그저 대답 없이 웃었다.

은우는 약 1년 전부터 동물병원에서 만난 여자와 사귄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사귀다가 말겠지 싶었는데, 그의 할머니, 즉 희윤의 시어머니까지 만나고, 또 제주의 할머니 댁까지 그녀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신중한 은우가 그렇게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니 딱 들어도 그냥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다.


“흐음.”

희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비서.”

“네. 사모님.”

준환을 부르는 소리에 그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은우가 만나는 여자에 대해 더 깊게 한번 알아봐요. 그리고…….”

희윤이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혹시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는지도 살펴보고.”

희윤은 준환에게 내리는 지시 중, ‘우연히’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알겠습니다.”

“물론, 은우에게는 비밀로.”

“물론입니다.”

언제나 일을 깔끔하게 잘 마무리 짓는 준환의 믿음직한 말에 희윤은 만족하고 그만 나가보라고 손을 저었다.

아주 일이 재밌게 되었다.

은우가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거기에 여자도 데리고 오고.

요즈음 희윤의 일상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매일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됐는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창밖에는 여전히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떨어진 낙엽들이 소용돌이치며 파란 하늘을 어지러이 떠다녔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기대되네.”

희윤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

어제 소란스러웠던 하루와는 달리 오늘의 돌마래 동물병원은 아주 고요하고도 조용했다. 응급은커녕, 들어왔던 예약 환자까지 취소될 정도였다.

그래서 매니저와 다른 사람들은 다 뒤쪽에 가서 정리를 하고 있었고, 설희만이 우두커니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서류 정리도 끝나서 이제 정말 할 일이 없다. 오늘 오전에 했던 은우의 말이 설희의 뇌리에서 떠올랐다.
 


“할 말이 있어서.”

 
무슨 이야기일까. 그가 할 말이 있다고 한 적은 최근에는 거의 없었다. 간단한 문제였다면 아침 식사 시간에 말했을 거고. 병원 관련된 일일까? 하지만 요즘 병원은 더없이 평온했다.

이현이 그만두고 새로운 수의사 선진이 들어왔는데, 그녀는 전에 계셨던 부원장님만큼이나 경력도 길고 능력자여서 체재가 잘 자리 잡았다.

도대체 뭘까. 그가 말하고 싶다는 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설희의 핸드폰이 띠링 울렸다.

누구에게서 온 메시지일까. 핸드폰을 확인하자, 자신을 이렇게 심란하게 만들고 있던 남자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 은우는 대학의 강의 때문에 오후에는 병원을 비우고 있었다.


[오늘, 저녁 8시에 식사 어때? 레스토랑 예약했는데.]

[응, 좋아. 레스토랑은 좋은 곳이야?]

설희가 보낸 문자에, 곧 답장이 왔다.


[조금. 많이 꾸밀 필요는 없어]

평소 평일에는 집에 가서 은우가 차려준 식사를 하거나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레스토랑, 이라고 말할 정도로 좋은 곳은 자주 가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은우는 설희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름다운 곳에 데리고 가곤 했다. 뭘 입어도 근사한 은우와 달리, 설희는 그런 곳에 갑자기 가면 당황하곤 했다.

그래서 만약 특별한 곳에 가게 되면 설희는 은우에게 늘 말해달라고 했다.


[그럼 나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가야겠다. 평범하게 입고 나왔거든.]

[그렇게 해. 집 앞에서 7시 반쯤 만나요.]

[네, 그래요.]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설희는 턱을 괴었다.

조금 좋은 레스토랑이라.

오늘 할 말이 있다고 했지. 그 말 때문에 레스토랑을 예약한 게 틀림없었다. 그냥 우연이라기엔 점점 더 궁금해졌다. 불안해지기도 하고.

전에 은우는 설희에게 결혼을 언젠가 하자고 했었다. 설희는 당시 아직 공부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그런 그녀가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지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다. 설희도 이제 안정되고, 결혼을 생각해봐도 된다고 여겼지만 아직 은우에게 말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 했던 말들을 없던 말로 돌리려는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의 사이는 더없이 화목했지만, 결혼은 아니라고 한다든지 하는 건 아닐까. 실없는 걱정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거 아니면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힘들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설희는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오래 사귄 찬정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기억. 은우는 찬정과는 전혀 달랐지만, 그래도 가끔 너무 완벽한 그의 모습에 불안해질 때가 있었다.

오늘 아침, 자신을 보고 속삭였던 남자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런 소리 내면 너무 사랑스럽잖아.”

 
은우의 표정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우가 그럴 리가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은우만큼은 거짓말하지 않는 남자였다. 다만, 그가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몰라 공연히 불안한 마음에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가을밤. 여름의 열기가 지나간 9월 말이었다. 찌르르, 풀벌레가 울고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설희와 은우가 사는 건물 앞. 설희는 평소 잘 입지 않는 바람결에 한들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그를 기다렸다. 가을의 깊은 밤처럼 검은색의 원피스였다.


“날이 좋네.”

고개를 들어 은우와 자신의 집이 있는 오피스텔을 올려보았다. 이 건물에 이사 온 지도 1년이 넘었다.

그와 사귄 지도 1년. 봄, 여름, 가을, 겨울. 4개의 계절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과연 우리에게 다가올 계절은 어떤 색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가만히 은우를 기다렸다. 그와는 같은 건물에 살고, 같은 직장을 다닌다.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하기에, 아니, 대부분의 날들은 밤도 그와 함께하기에 이렇게 그를 기다릴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언제쯤 올까, 그는 무슨 옷을 입고 올까, 어디로 날 데려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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