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집어삼키다 (69/80)


69화. 집어삼키다
2023.06.27.



“엇.”

“이렇게 하면.”

은우가 말하며 싱긋 웃었다. 마치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비를 머금은 두 사람의 몸이 착 달라붙었다.


“덜 젖겠지?”

입꼬리를 끌어올려 그 웃음이 아찔했다. 심지어 몸과 몸이 닿아있는 이 상황에서 그의 미소는 눈앞이 어지럽다. 그는 오늘 얇은 셔츠만 입고 있어서 그의 근육이 오롯이 다 느껴진다.

나도 참, 비가 오는 데 무슨 음흉한 생각인가.


“으, 으응.”

“그래도 꽤 많이 젖어버렸네.”

은우의 말에 설희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은우 씨가 마침 딱 등장해서 우산을 씌워줘서 살았어요. 이대로 집에 갔다간 정말 비 맞은 생쥐 꼴이었을 텐데.”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연락하지 그랬어.”

“연락이요?”

“응, 앞으로 이렇게 밖에서 우산이 필요하거나 무언가가 필요할 때가 있으면 연락해.”

언제든, 어디서든.

그 말에 설희가 씩 웃었다.


“우산이 필요한 정도로 연락을 하면 안 되죠. 편의점에서도 팔 텐데. 귀찮게.”

“내 마음을 아직도 잘 모르는구나.”

은우의 손가락이 수분기가 도는 설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 김에 당신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은 거잖아.”

우산 가져다주면서, 너와 이렇게 빗길을 함께 걸을 수 있으니까. 설령 조금은 귀찮더라도, 번거롭더라도 나에게 연락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귓가를 속삭이는 미칠 듯 달콤한 목소리가 설희의 귓가를 흘러내렸다.

옥 선생님은 정말, 연애를 하면 어디까지 갈지 모를 타입이구나. 그는 입만 열면 자신의 마음을 녹일 만한 말을 내뱉는다. 조금만 방심을 하면 이렇게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마음에 스며들어온다.

달콤한 말에 젖어 들어 설희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얼른 가자.”

그리고 은우는 설희의 몸을 끌어안은 채, 두 사람이 사는 오피스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제 제법 차가워진 빗방울이 요란하게 쏟아졌지만, 딱 붙어 있어서 춥지 않았다.

따스하고도, 뜨거웠다.

***


 
오피스텔에 도착하고 나서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설희의 방에 들러 곰곰이에게 밥을 주고, 오늘은 비가 와서 산책을 가기 힘들다고 곰곰이에게 설명했다.


“끼잉.”

“산책 가고 싶지.”

“끼잉.”

“근데 오늘은 비가 많이 와. 지금 가면 곰곰이 감기 걸려. 대신 주말에는 호수공원에 가서 산책하자, 응?”

알아들은 건지 곰곰은 고개를 갸웃, 갸웃 몇 번을 하다가 곧 등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둘은 바로 은우의 방으로 향했다.

설희의 방에는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서, 은우의 방에서 두 사람은 자주 식사를 했다.

설희의 집, 옆 옆 문. 그게 그의 방이었다.

뭐랄까. 기숙사 생활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럴 때면 기숙사에 있는 것만 같다. 가끔은 그런 게 설레고 재밌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우의 고양이 체리가 꼬리를 말고 설희를 반겼다.


“야옹.”

몸이 불편한 체리는 은우의 말에 따르면 사람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이 체리의 몸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체리는 제 주인만큼이나 설희를 좋아했다. 지금이야 몇 번 은우의 집에 왔기 때문에 더더욱 친해졌지만, 처음에도 거리낌 없이 그녀의 발에 다가와 얼굴을 비벼댔다.

그런 체리를 보고 은우는 늘 신기해했다.


“늘 방어적인 체리가 어쩐 일로 저렇게 따른담.”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희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박고는 갸르릉 소리를 내려 했다.
 
하지만 오늘 설희는 손으로 체리를 밀어냈다.


“안 돼, 체리야. 언니 젖었거든. 언니한테 오면 체리도 젖어.”

그러나 체리는 설희가 그녀를 왜 밀어내는지 몰라, 까맣고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애? 왜 나를 밀어내? 나는 더 놀고 싶은데.

은우는 체리의 몸을 집어 그녀를 체리의 쿠션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기다려.”

집사의 엄한 말에 체리는 잠시 불만스러운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몸을 말아 잠에 들었다. 설희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푸르르, 몸을 떨 때마다 부드러운 털이 파동쳤다.


“오늘도 체리는 귀여워.”

하지만 체리를 보고 있는 설희의 시선과는 달리, 은우는 설희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젖어 버린 머리카락, 거기서부터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은우의 시선이 집요하게 쫓았다.


“왜요?”

“귀여워서.”

체리가 아니고 당신이.
 
또 둘이 되니 쏟아지는 달콤한 그의 말에 설희의 뽀얀 살결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맨날 나만 보면 귀엽대. 내가 무슨 애인가.”

투덜거리는 설희의 입술이 톡 튀어나왔다.
 
은우가 더없이 정중한 말투로 예쁘다, 귀엽다 하는 것 너무 쑥스러웠다. 한점 흐트러짐 없는 시선으로 진심이라는 것을 아니 더더욱.
 
전에 사귄 남자친구는 물론이요, 엄마 아빠조차 이정도로 저를 예쁘다 귀엽다 하지는 않았다. 

누가 보면 옥 선생이 자신을 키운 줄 알겠다. 그 정도로 그는 어화둥둥 설희를 예뻐했다. 설희가 투정을 하자 은우가 설핏 웃었다.


“그건 안 될 것 같네.”

“…….”

“내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가는 걸 어떻게 해.”

그리고 그는 갈색 수건을 들어 설희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 물기로 넘쳐나던 머리카락이 금세 수건에 물기를 빼앗겨 마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닦은 뒤에는 그는 천천히 설희의 이마부터 코를 닦았다.

가슬가슬한 섬유가 얼굴을 스친다. 고작 그것뿐인 행동인데도 은우의 행동이 충분히 느려서인지 야릇한 감각을 선사했다.

그가 두 손으로 수건을 설희의 얼굴에 뒤집어씌운 덕분에 그녀의 얼굴 반 즈음이 수건으로 뒤덮이고, 시야가 가려졌다. 눈앞이 까맣게 물든다. 자신의 피부를 수건 위로 꾹꾹 누르는 그의 손길 때문에 자연스럽게 심장 박동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 잘못이야.”

“……제가 뭘요.”

“이렇게 축축하게 비 맞고 다니고, 걱정시키고, 귀엽게 얼굴 붉히기나 하고, 그러니까 자꾸만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거잖아.”

빈틈을 보이니 자꾸만 파고들고 싶어지잖아.

수건 때문에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은우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어느 정도 가까운지 몰라 자신도 모르게 설희는 허리를 비쭉 세웠다. 그의 말소리는 점점 가깝게 들리더니, 곧 그의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가깝다.
 
너무 가까워서 놀랄 정도로.
 
그리고 눈앞이 까맣게 물든 채,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설희의 입술을 빨았다.


“흡.”

방심해서 반쯤 열려 있는 설희의 입술을 그가 삼켰다.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그녀를 한없이 빠르게 헤집었다.
 
아직 물도 다 닦지 못했는데.
 
그의 셔츠도 설희의 반대쪽에 있던 오른쪽 어깨가 푹 젖어 있는 채였다. 하지만, 닦을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은우는 설희를 탐했다.


“으응.”

조금 있다가 하자는 표현으로 설희가 고개를 살짝 흔들며 싫다고 말하자, 그의 입술이 천천히 설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싫어요?”

“싫은 게 아니라, 아, 아직. 그,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요.”

“연인끼리 키스하는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가?”

그냥 키스라면, 그래 언제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의 접촉은 농밀하고도 뜨거웠다. 그냥 키스가 아니다. 그냥 입맞춤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마치…….
 
더 거대한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한.

설희가 어떻게 할지 몰라 바르작거리고 있는 사이 그가 한쪽 수건을 걷어냈다. 눈앞에서 자신을 보면서 빙글빙글 웃는 은우의 얼굴이 보인다.
 
부드럽게 휘어있는 눈매, 날카로운 콧날, 자신과 조금 전 부딪쳐서 붉게 달아오른 입술.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마음의 준비란 거.”

그가 그렇게 말하며 설희의 목선을 쓸어내렸다. 짜르르한 감각이 흘러내린다. 건조한, 그러나 뜨거운 입김을 품은 입술이 살결을 간지럽힌다.


“말해주면 앞으로 키스할 때마다 할게. 당신의 마음의 준비를 위해.”

“그, 그게.”

어쩌면 영원히 마음의 준비는 안 될지도 모르겠다.
 
그와 입술을 부딪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여전히 눈앞이 어지럽고 힘드니까. 언제나 이렇게 짜릿하고 어지러울지도 몰라.


“오늘은 늦었고, 그리고, 저, 비도 맞았고, 그래서 놀랐어요.”

“맞아. 비도 맞았고, 젖었고, 그래서 당신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온 거잖아.”

“저를요? 왜요?”

설희의 질문에 은우가 싱긋 웃었다.


“샤워하려고.”

“같이 샤워…… 를?”

이게 무슨 말인가.
 
설희는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너무 적나라한 그의 유혹에 어쩔 줄을 몰랐다. 발끝부터 녹아내리는 감각이 든다.

물론, 은우와 밤을 보낸 것은 오늘이 결코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이잖아.
 
그러자 은우가 피식 웃었다.


“기억 안 나? 오늘 아침에 나한테, 샤워기 헤드 떨어졌다고 연락한 거.”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샤워를 하다가 샤워기 헤드가 똑 하고 떨어졌더랬다. 어떻게 고치는지 몰라 은우에게 물어본 참이었는데.


“그래서 우리 집에서 우선 씻으라고, 그동안 내가 고치겠다는 의미였어.”

빙긋 웃는 은우의 웃음이 얄미웠다. 은우가 말을 이었다.


“같이 샤워하자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저도 그런 변태 아니에요.”

진짜, 아침에 샤워 헤드 고장 난 것은 까맣게 잊고 이게 뭘 하는 짓이람. 설희가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말하자 은우가 또 쿡, 낮은 소리로 웃었다.


“아뇨. 생각해보니까 그게 좋겠어.”

“……뭐가요?”

“해요.”

“…….”

“샤워, 같이 들어가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설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또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닌데.”

“혼자 씻을래요. 저렇게 밝은 욕실에서는.”

“또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어?”

그의 말에 설희는 미간을 좁혔다.

이제는 속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아주 특기였다. 설희는 샤워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은우의 욕실은 당연히 같은 건물, 같은 구조의 방이라 화장실 역시 짜임새는 같았지만, 어두운색으로 인테리어해서 인지 훨씬 단정한 느낌이 있었다.

그와 꼭 닮은 느낌의 욕실.

이곳에서 샤워를 하니 뭔가 색다르면서도 긴장이 된다.

샤워를 다 끝내고 옷을 대충 갖춰 입고 나가는 그 순간.

문이 열리자마자 벽에 기대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다 끝났어?”

“앗, 욕실 쓰시려고요? 급하셨어요?”

“응, 좀 급했어.”

말을 하지. 설희가 얼른 비켜주려는데 은우가 턱, 그녀를 잡았다.


“설희 네가, 너무 고파서 힘들었어.”

그리고 그는 단숨에 설희를 집어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