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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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2023.06.24.
채린의 말에 진호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채린이 양손을 꽉 움켜쥐고는 속삭였다.
“진호 씨가 정말 좋은 마음에서 절 카풀해주시는 건 아는데, 회사생활 하시면서 동물원 생활하시면서 결코 쉽지 않은 거 알아요. 때로는 예상보다 빨리 업무를 하고 오시는 것도 알고 있고요.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
“그래서 카풀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진호 씨는 계속 만나고 싶어요.”
채린의 말이 정확히 이해가지 않았다. 잠시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보자 채린이 앞으로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눈이 부시도록 뽀얀 얼굴이 드러난다. 그 얼굴에는 쑥스러움과 미소가 맺혀 있었다.
“물론, 진호 씨가 원한다면요.”
“진심입니까?”
“네.”
채린은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진호 씨 같은 타입을 안 좋아한다…… 라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사실 진호 씨 같은 타입을 전혀 만나보지 못했어요. 한 번도. 늘 자기 멋대로고 하고 싶은 대로 하던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죠. 심지어 가족조차 그랬어요. 그래서 그게 아주 평범하고 보통의 일인 줄 알았고요. 그런데 제 앞에 진호 씨가 나타난 거예요.”
그녀는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진호 씨는 왜인지 몰라도 아무것도 없는 저를, 좋다고 해주시고 뭐든 제 위주로 생각해주시고…….”
“내가 그게 좋았어요. 채린 씨가 편한 게 좋아서. 내가 그걸 좋아해서 한 거예요. 이기적이에요, 나.”
그 말에 채린이 활짝 웃었다.
“네, 알아요.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저의 없이 하신다는 걸. 지금은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처음에는 그게 낯설고 어려웠어요. 왜 타인을 위해서 저렇게 하지? 아무리 날 좋아한다고 해도 어떻게 저렇게 할 수가 있지? 그렇게 생각해서 진호 씨를 만나지 않으려 한 거예요.”
“…….”
“하지만, 막상 가장 위험한 때 진호 씨 생각이 났어요.”
그건 결코, 그가 가장 와줄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그라면 믿을 수 있어서, 그리고 이렇게 위험한 때에 그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서였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조금씩, 제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심장을 진호 씨의 따뜻한 마음이 녹인 것 같아요.”
“채린 씨.”
“그래서, 이제는 이런 카풀이라는 이름 말고 정식으로 만나고 싶어요.”
채린이 몸을 돌려 진호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까만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래서, 저. 괜찮으시다면 저랑 사귀어 주시겠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
거절을 상정하고 나온 만남에서 그녀에게 고백을 받다니.
하지만 여기서 채린은 멈추지 않았다. 진호를 마치 녹여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말을 더했다.
“좋아해요.”
“…….”
“좋아하게 됐어요, 따뜻한 당신을.”
그리고 채린이 손을 뻗어 핸들 위에 올려져 있던 진호의 손 위에 살짝 올렸다. 딱딱하고 거친 자신의 손과는 달리 그녀의 손은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진호는 연애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했던 연애 때도 지금 같은 심장 떨림을 느낀 적은 없었다.
고작, 손과 손이 맞닿은 것뿐이다. 손가락이 겹쳐진 것도 아닌 그저 그 정도의 접촉. 이정도야 모르는 사람과도 할 수 있는, 스킨십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그런 접촉.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호는 무너져내렸다. 말할 수 없이 뜨거운 감정에 잠시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몸을 돌려 채린을 바라보았다.
“나도.”
“…….”
“나도 좋아해요, 채린 씨. 설마, 정말로 이걸, 그러니까 당신보다 늦게 말할지는 몰랐지만.”
“…….”
“가슴이 터질 정도로 좋아하고 있어.”
그 말에 채린은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어여쁜지, 다시 한번 진호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잘됐어요.”
“……정말 이게 꿈인가?”
진호가 멍하니 속삭인 혼잣말에 채린이 쿡쿡 웃었다.
“저, 그렇게 좋은 여자 아니에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후회 안 해요.”
“그럼 고맙고요.”
“채린 씨야말로 후회하지 말아요.”
그러자 채린은 손을 굽혀 진호의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저, 오래 살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진짜 많은 후회를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부터는 후회 안 할래요.”
“…….”
“후회 안 하게 해줄 거죠, 진호 씨?”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후후, 웃었다. 예쁘고 말간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다.
저렇게 웃는데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다. 아름답게 웃는 채린을 보며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밤, 작은 차 안에서 부드럽게 사랑이 피어나고 있었다.
***
요즈음 채린 씨가 예전 같지 않다.
설희는 고개를 쭉 빼고 채린을 관찰했다. 물론, 예전 같지 않다는 게 나쁜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의미였다.
설희가 돌마래 동물병원에 처음 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채린은 늘 성실했고, 완벽했다. 그건 지금도 별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뭐랄까. 가끔 얼굴에 홍조를 띠우고 웃곤 했고, 쉬는 시간이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늘의 점심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채린 씨.”
“아, 네?”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채린이 화들짝 놀라, 자신을 바라보았다.
“요즘 어때요?”
“아, 좋아요.”
“별일 없고요?”
“아, 네.”
별다를 것 없는 대답. 이래서야 채린이 왜 저렇게 둥둥 떴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음,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설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
다른 병원 사람들에게 오지랖 피우지 말라고 해놓고는.
설희는 무심코 전에 진호가 병원을 찾아왔을 때 호들갑 떨던 병원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오늘의 행동을 비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채린이 너무 달라졌으니까. 오늘만 해도 설희가 만나자는 약속에 좋다 싫다를 말하기 전에 핸드폰을 한번 확인해보고는 “좋아요.”하고 또 발그레 웃었다. 동성인 설희조차 마음이 설렐 정도로 달콤한 미소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병원 앞 술집에 가서 간단하게 맥주 한 잔씩을 했다.
“아, 채린 씨도 참.”
맥주를 마시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신도 모르게 설희의 발걸음이 붕붕 떴다.
“그랬구나아, 진호 씨랑 연애를 하는구나.”
어린나이에도 늘 완벽하게 보이던 채린이 그 사실을 말해주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그 모습을 상상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일까. 혼자 집으로 가는 길이 쓸쓸하지 않았다. 아까 퇴근할 즈음에는 아직 거리가 환히 밝았는데, 채린의 연애 이야기를 한참 하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전봇대에는 불이 환히 켜졌고,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어졌다.
“늦었네.”
시계를 흘깃 쳐다본다. 벌써 9시다.
오늘 다소 흥분하면서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아니면 일이 바빠서였는지 어깨가 뻐근했다.
“그래도 곧 집에 가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생긋, 웃으며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빨리 파란 불이 되었으면. 집에 가서 곰곰이 밥 주고 산책시키고, 그러고 나서 곰곰이 뱃살 조물조물하면서 놀아야겠다.
생각만 해도 귀엽다. 그 까만 코를 씰룩씰룩거릴 것을 생각만 해도 조금 전까지 우울했던 기분이 달라졌다.
눈앞에 어른어른거리는 곰곰이를 생각하며 설희의 미소가 퍼졌다. 그때, 갑자기 손등 위에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톡.
“어, 뭐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어둑어둑한 하늘에는 두꺼운 구름이 껴있었다.
“비인가?”
여름도 다 끝이 나가는데 소나기라도 오는 건가 싶어 설희는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은 마침 일기예보도 보지 않고 나와서 우산도 가방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상황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 전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
“어떻게 하면 좋아.”
정말 지구 온난화 때문에 지구가 망가지기라도 한 건지, 올해는 유난히 비가 갑자기 쏟아지는 때가 많았다.
이러다가 다 젖어 버리겠다. 싶을 때 즈음.
큰 그림자가 발밑에 드리워졌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요란하게 자신의 피부를 두드리던 빗줄기가 뚝 멈췄다.
투투투툭, 빗줄기가 우산을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엇.”
위를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살짝 비틀어진 입술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설희의 몸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
은우였다.
“……선생님, 아니, 은우 씨.”
설희는 도저히 아직은 그를 자기, 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물론, 그의 말이 맞았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영원히 그와의 거리가 좁아 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기라고 부르는 건…… 아직은 설희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중도를 지켜,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은우 역시 설희를 이름으로 불렀다. 근사한 목소리로, ‘설희야’라고.
설희의 말에 그가 우산을 씌워주며 말했다.
“비까지 맞으면서 팔랑팔랑 걸어오면 그러다 감기 걸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붉은 입술이 살짝 떨렸다. 커진 설희의 눈을 보면서 은우가 씩 웃었다. 그 웃음에 다시 한번 심장이 쿵.
“그……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 은우 씨가 왜 여기 있어요?”
“나는 퇴근하는 중이야.”
이 길은 병원에서 집에 가는 길이었다. 아까 설희가 채린과 퇴근할 때 은우는 일이 있어서 좀 더 남는다고 했더니 마침 시간이 딱 맞았나 보다.
“아까 7시에 퇴근했으면서, 아직도 여기서 뭐 해? 우산도 없이.”
“아, 그게.”
설희는 채린과 만났던 이야기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직 그가 진호와 채린의 연애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진호와 친구인 은우이니, 알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혹시라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싶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렇게도 바뀌지 않던 횡단보도 신호등이 겨우 바뀌었다. 파란불을 가리키며 설희가 입을 벌렸다.
“아, 신호 바뀌었네요. 가, 가요. 우리.”
“……뭔가 수상한데.”
“가요, 네?”
그가 좋아하는 미소를 듬뿍 얼굴에 뿌려본다.
오히려 그 모습을 의문스럽게 바라보는 옥 선생에게 설희는 모른 척 서두르자며 그를 재촉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던 은우의 눈이 얇아졌다.
그러나 곧, 그녀가 그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신호를 건너갔다. 크지 않은 우산 아래 두 사람이 서 있어서 그런지, 자꾸만 어깨가 부딪쳤다. 그뿐 아니라, 자신을 향해 우산을 기울이고 있어 설희보다 훨씬 키가 큰 은우의 어깨가 빗물로 젖어갔다.
“저, 아무래도 자꾸만 그쪽이 젖는데. 전 괜찮아요. 아까 이미 조금 젖기도 했고…….”
그러니까 그쪽으로 더 기울여도 돼.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은우는 설희의 말을 듣고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딱딱한 손이 부드러운 어깨를 꽉 움켜쥔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살짝살짝 닿기만 했던 몸이, 이제는 완벽하게 밀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