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당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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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당신뿐.
2023.06.13.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은우가 말을 했다.
“없어요, 약혼녀 그런 건 없어. 있어 본 적도 없고, 있을 예정도 없고. 그 기사에 왜 이런 게 났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기사에서는 실제 기업을 거론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마치 사실처럼.
그러나 다시 한번, 믿어지지 않는지 은우는 핸드폰을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심지어 우리 형도 오래 사귄 여자가 있어요. 일반인이에요. WS물산에서 오래 일한 한 살 연상의 일반인.”
“…….”
“그냥 회사원이에요.”
“정말요?”
“네. 다음다음 주에 상견례인데. 곧 결혼할 예정이라.”
설희가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 기사는.”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있지도 않은 일이 기사로도 나고, 풍문으로도 돌아요.”
일어나지도 않을 기업간의 합병, 확실하지 않은 인사이동, 아직 상의된 적도 없는 사업계획안. 그런 것들이 때로는 의도를 품고, 때로는 실수로 기사화 되곤 했다.
“그 기사에 나온 두 사람은…….”
이름을 되뇌며 그가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은 아마 형이랑 단순한 동창일 거고, 한 사람은 진짜 모르겠네요. 어쩌면 형이랑 아는 사이일 수도 있겠지. 하여튼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내가 모르는 것 보면.”
“……정말요?”
“응.”
그가 고개를 까닥였다.
“못 믿겠어요?”
“…….”
“어떻게 믿게 해줄까요. 우리 아버지라도 지금 당장 만나보겠습니까?”
“아, 아뇨. 그런 건…….”
그의 말은 어디까지고 진심이었다.
“설희 씨를 만났기 때문에, 다른 여자와 만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게 사실이고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설희 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절대로 재벌가나 정략결혼은 안 했을 거예요. 설사, 회사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해도.”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약혼녀 따위는 정말 없다는 그의 말. 힘을 주어 말한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리고 회사에 관한 건, 숨기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모든 사람들이 내가 WS그룹의 사람인 건 몰라요. 특별히 설희 씨만 모르는 건 아니고.”
“아무도요?”
“집요하게 뒷조사해서 알아낸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언론이나 이런 곳에는 나가지 않게 회사 차원에서, 집안 차원에서 막아놨어요.”
“왜요?”
은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말을 할까, 말까. 조심스럽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
옥은우는 태어나기를 주목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
“어쩜 저리 잘생겼을까.”
“맞아요. 어쩜 저리 눈이 똘망똘망할까.”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고, 조각 같은 얼굴은 지금과 같이 그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 선우의 경우도 준수한 외모에 준수한 성적이었지만, 은우는 아예 그 차원이 달랐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던 아버지의 두뇌와, 원래 모델 출신이었던 어머니의 외모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WS를 이끄는 것은 선우가 아니라 은우일지 몰라.”
그랬던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부터 은우는 말이 없어졌다. 원래도 과묵한 편이었지만, 점점 더 말수가 줄었고 어떤 날은 아예 말이 없어졌다.
“은우야, 또 100점 받았네. 축하해.”
“…….”
칭찬에도 대답하지 않는 아이에게는 ‘선택적 함묵증’이라는 병의 진단이 내려졌다.
말을 잘 알아듣고, 언어능력에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정한 상황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증세였다.
어디를 가도, ‘옥은우’에게는 시선이 떨어졌다. 선생님들, 같은 반 친구들, 가족들까지.
섬세한 은우가 너무 과도한 기대, 사람들의 주목을 너무 많이 받아서 생긴 병이었다.
“치료를 계속하고, 스트레스가 줄어들면 나을 수 있는 병입니다.”
이런 환경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나아질 수 있다는 그런 의사의 선고에 특히 은우를 누구보다 아끼셨던 할머니는 결심을 내리셨다.
“안 되겠다, 우리 은우는 달리 키워야겠어.”
그녀는 은우를 데리고 본인의 고향이었던 제주에 내려갔다. 그리고 그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그를 제주에서 키웠다. 유학을 간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당시 은우는 너무나도 어렸다.
“우리가 갔던 집은, 내가 중, 고등학교를 보낸 곳이에요.”
그곳에서는 은우가 WS의 사람이라는 것을 거의 몰랐고, 아는 사람들은 무척 친해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마디도 입을 떼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던 그의 증세는 3개월이 못가 호전되게 되었고, 자유롭게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도 원래대로라면 회사에 도움이 되는 학과를 선택해야 했겠지만.”
보통은 재벌가의 자제들은 경영학을 많이 선택했다. 그게 나중에 경영자가 될 때 유리하기도 했고. 때로 가전회사의 자제들은 공대에 진학하기로 했으나, 은우가 선택한 것은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수의학.
왜 수의사가 되려고 하냐는 질문이 많았다. 왜였을까. 은우는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는 동물도 제대로 길러본 적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겁쟁이였어요.”
은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증세가 완전히 나아지고 나서도, 주변 사람들이 내가 어느 집안 사람인지 다 알게 되고 나서도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쓴 것 같아.”
과연 그게 겁쟁이일까, 그게.
설희는 그가 어떤 경험을 하고 살아왔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설희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화목한 부모님 아래서 자라고 평범한 얼굴을 하고, 평범한 성적으로 살아왔다.
누군가의 시선을 받을 일도 거의 없었고, 부모님도, 주변에서도 과도한 기대를 품지 않았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어린 시절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너는 이렇게 큰 회사를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듣는다면.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다 감시당한다면.
그런다면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물이 편했어요. 그래서 수의대에 진학했고. 처음에는 부모님의 부탁도 있어서 원더풀랜드에서 몇 년 일도 했지만, 난 차라리 소동물 임상이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으로 나왔습니다. 나머지는 설희 씨가 아는 대로입니다.”
그랬구나.
“말하지 않은 이유는 설희 씨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초조한 듯, 손끝으로 테이블 위를 두들겼다.
“이런 이야기를 다 하면, 설희 씨가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
“…….”
“실망했습니까?”
은우의 설희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모든 이야기를 다 토해낸 남자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눈빛으로는 자신을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어떠한 감정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긴 속눈썹이 드리운 그 부드러운 눈빛을 바라보고 있다가, 설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실망을 할 리가.”
자신이 아는 은우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오히려.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자신이 비겁자라서 떠나왔다고 했지만, 정말 비겁한 사람이라면 그저 피하기만 했을 뿐 이렇게 새로운 길을 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 테다. 자신이었다면, 그냥 안 한다고 하고 안전한 곳에 안주했을 텐데. 그는 완전히 새로운 곳에 와서 제힘으로 완벽히 해냈다.
은우가 얼마나 일에 대해서 철두철미한지, 얼마나 열심인지는 누구보다 설희가 잘 알았다. 그런데 그에게 실망할 리가.
“선생님이 어떤 집안의 사람인지, 어떤 길을 걸어오셨는지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냥, 저는…… 선생님이 왜 저에게 이야기를 안 해주신 걸까, 그런 생각이 듣기도 하고 정말 약혼자가 있으신 걸까, 그런 고민이 있어서 여쭤본 거지 절대로 실망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은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그림자 때문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을 보려 했다. 부드럽게, 진심을 속삭이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네.”
“오해는 다 풀렸습니까?”
“……아마도.”
약간의 웃음기를 품은 그녀의 말에 은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자 설희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너무 큰 일이잖아요. 하루에 다 알게 되기에는. 다 받아들일 때까지 시간을 주세요.”
“좋아요.”
그리고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할 때까지 시간을 줄게요.”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희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뒤에 서고는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아 제 가슴 안에 품었다. 딱딱한 팔이 꽉 그녀를 끌어안았다. 놀라 설희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시간을 주신다고 했잖아요.”
“설희 씨는 생각해요. 내가 이렇게 안고 있을 동안.”
놓치기 싫다는 듯,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은우와 닿은 곳들이 점점 붉게 달아오른다. 오늘 있었던 일에 집중하고 싶은데, 점점 정신이 흐려지고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은우의 손가락이 천천히 설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은 신경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짜릿짜릿해진다. 결국, 설희의 눈이 반쯤 감기며 짙은 숨을 토해내었다.
“아.”
결국은 오늘도 설희는 그에게 쓸려 내려가 버렸다.
***
늦은 밤.
“끼잉.”
물이 부족하다며 우는 곰곰이 소리에 설희는 잠에서 깼다. 눈을 반쯤 뜨자, 옆에서 누워 있는 은우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멍하니, 드러난 단단한 은우의 어깨를 바라보며 설희는 눈을 느리게 떴다. 정신이 채 가다듬어지기도 전에 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곰곰이, 목말라?”
“끼잉.”
손을 내려 곰곰이의 까만 털을 쓸어내린다. 설희와는 다른, 크고 단단한 손이 기분이 좋은지 곰곰이 얼굴을 기대고 비벼댔다.
“좋아?”
“끼잉.”
좋다는 듯, 대답하는 것 같다.
곰곰이는 병원에서 오래 있기도 했고, 설희의 집에 은우가 자주 드나들어 그런지 그를 설희만큼이나, 아니 때로는 설희보다 더 따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섭섭한 때도 있었다.
은우가 침대에서 일어서서 나갔다.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 그의 몸의 실루엣이 보인다. 왠지 봐서는 안 될 것 같아, 눈을 돌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심장이 벌컥 뛴다.
그러니까, 어제. 어제 옥 선생님 댁에 가서 정말 약혼녀가 있는지 아닌지 묻고, 그리고 생각해보겠다니 옥 선생님이.
“설희 씨는 생각해요. 내가 이렇게 안고 있을 동안.”
그리고 입술을 겹쳤더랬다. 뜨거운 입술이 제 입술을 훔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말 이러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 그를 밀어냈다.
“고…….”
그냥 가겠다고 하면 보내지 않을 듯한 집요한 남자의 눈을 보며 설희가 속삭였다.
“곰곰이 밥 주러 가야 해요.”
“그래요, 그럼.”
선선히 말하고는 남자는 싱긋 웃었다.
“나도 같이 가요.”
“……네?”
“가요, 설희 씨 집에. 데려다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