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밤에, 둘이. (64/80)


64화. 밤에, 둘이.
2023.06.10.


지금 은우를 올려다보는 얼굴은 평소의 설희의 얼굴이 아니었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 평소와는 퍽 다르다.

예삿일은 아니겠다.


“오늘 조제약이 바뀌는 일이 있었다면서요.”

은우의 말에 잠시 굳어 있던 설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일도 있었죠.”

그리고는 설희가 고개를 숙여 낮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 일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큰일도 잊었네요. 와, 까마득히 오래된 일 같이 느껴지네.”

“그 일 때문에 온 거 아니었습니까?”

은우는 그녀의 방문이 당연히 이현과의 일 때문에 온 거라 생각했는데, 설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옥 선생님에게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아아…….”

무슨 이야기지만 작은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은우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요, 들어와요.”

“늦은 시간 죄송해요.”

은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 뒤에 눈썹을 찡끗 들어 올렸다.


“늦은 시간에 집 오는 걸로 뭐라 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반듯한 입술이 내뱉는 말을 멍하니 설희가 바라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여자친구답지 않게, 딱딱한 말투로 말하며 설희가 집으로 들어왔다.

***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은우의 집 안에 들어와서 테이블을 하나 두고 마주 앉았지만, 설희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선생님, 진짜 이현 선생님이 말한 게 사실이에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설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뭘 말했는지 모르시지. 뭐라고 해야 할까.

선생님, 사실은 오늘 선생님이 엄청난 부자인 걸 알았습니다. 왜 말해주지 않으셨어요?

아니, 그가 재벌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왜 이렇게 머리가 엉망진창일까.

설희는 그가 어느 정도 부자일 것 같다, 나와는 다른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정도인 줄은 몰랐지만.

그러니까 그건 괜찮은데, 문제는…….

그 기사 속에 실려있던, 약혼에 대한 이야기. 설희는 그게 가장 궁금했다.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진짜로 약혼자가 있는 건지, 지금까지 나와 했던 감정, 결혼,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짓말인지. 거짓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순간의 감정이었는지.

설희가 굳은 얼굴로 한참을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비쭉, 목 근육이 솟아오른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무슨 이야기예요?”

“……선생님.”

예전의 설희 같으면 절대,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않았을 터였다. 혼자서 불안해하고 힘들어할지언정. 전 연애에서도 그랬다.

남자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고, 그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을 때도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도 있었고 만약 마음이 변한 거라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은우가 했던 부탁을 기억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


“더 알 수가 없네. 유설희 씨는 너무 어려워. 손에 들어올 것처럼 하다가, 금방 토라져서 멀어져버리고…….”

 
그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말 안 하면 모르잖아. 다른 남자들은 다 알아줄지 몰라도, 나는 그런 거 몰라.”

 
그렇게 늘 먼저 다가와 줬던 것은 은우였고, 이번에는 설희가 솔직히 물어볼 차례였다. 설희는 크게 숨을 들이켠 이후 말을 내뱉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은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선생님이, WS그룹의…… 그 옥경일 사장님? 의 아드님이라고.”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이상한 소리라 설희의 말에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질문에 조금 숙여져 있던 은우의 허리가 펴진다.


“아…….”

어이가 없다. 무슨 소리냐.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은우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올 게 왔다, 그런 표정이었다.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다.


“왜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몇 번인가 기회가 있었다. 할머니 댁에 찾아갔을 때, 그의 집에서 살게 되었을 때 등등.


“말해야 했나요?”

“아…… 그럼 사실인가요?”

“음.”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흐트러짐 없던 은우 역시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손바닥으로 은우가 앞으로 쏟아져 내려와 있던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의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응, 맞아요.”

“…….”

“숨기려 한 건 아니에요. 근데, 내가, 우리 집이 이렇다는 걸 잊고 살아. 그래서 말 안 했어요.”

그랬구나, 역시.


“물어본 적 있었는데.”

그의 할머니 댁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엄청난 저택을 바라보며 아무래도 이건, 평범한 집은 아니겠거니 싶었다.
 


“보통 할머니 댁은 이렇지 않아요. 여기, 진짜 할머니 집 맞아요?”

 
지하에 주차장이 있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설희가 입술을 반쯤 벌리며 아연실색하자, 은우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괜찮아요. 평범한……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특이할 것 없는 집이에요.”

 
그의 집안도, 그의 할머니의 저택도 특이하다 못해 엄청난데. 그는 그냥 특이하지 않다고 말했다.

설희의 비난에 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말할까 했는데, 그땐 설희 씨가 날 좋아할 때가 아니었어요.”

“…….”

“오히려 날 거부할 때였지.”

그의 말에 잠시 설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혹시 그런, 배경만 보고 좋아할까 봐 걱정하신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말을 안 한 걸까. 왜 로맨스 영화에서는 흔히 있는 일 아닌가. 대단한 배경을 가진 남자가, 어느 숨겨진 유럽의 왕국의 왕자님이 자신의 배경을 숨기고 로맨스를 즐기는.

그 말에 은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파동이 퍼진다.


“그럴 리가.”

“…….”

“나 되게 비열하고 나쁜 사람이에요.”

예상을 벗어난 은우의 말에 설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옥 선생이 비열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유설희 씨가 내 배경이나, 뭐 이런 것들을 보고 날 더 좋아해줄 거라고 믿었다면.”

“…….”

“그랬다면, 미안해요, 기꺼이 말했을 거야.”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오히려 그가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반대였다.


“전에 말한 적 있죠.”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하는 은우의 시선이 부드럽게 설희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끝도 닿지 않았지만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에 조금 전까지 단단하게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풀어진다.


“나, 여유 없어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어도 좋은데 유설희 씨는 나에게 진짜 새로운 감정을 알려준 사람이고,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말했다가 지금처럼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도망갈까 봐서.”

그의 말이 슬며시 설희에게 스며든다.


“그래요, 설희 씨가 집안이나 배경을 따지고 그런 거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면 말했을 거예요.”

“실망하지 않고요?”

“음, 그땐 이미 실망하기엔 너무…….”

은우의 목소리가 짙고 깊다.


“너무 유설희 씨를 좋아할 때라 실망하기 힘들 것 같은데.”

“…….”

그는 정말 나빴다. 은우에게 이런 이야기를 왜 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러 왔는데 이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저렇게 다정하게 말을 하면, 어떻게도 말할 수가 없다.

설희는 손을 내려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집안이 사실은 재계 순위 몇 위의 엄청난 기업이고, 그가 앞으로 그런 기업을 물려받을 줄 알았다면 그래, 자신은 그를 더 멀리했을 수도 있었다.

원래도 옥은우는 설희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사람이었다. 잘나고 잘생기고 모든 게 완벽한. 그래서 업무 중에도 같이 있으면 긴장이 되어 허리가 꼿꼿이 섰다.

그런 그가 사실은 정말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리 가짜 연애라도 하지 않았겠지.

설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은우가 물었다.


“부담스러워요?”

“…….”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요?”

“아, 아뇨.”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들었다. 은우가 쓰디쓴 표정으로 설희를 바라보고 있다. 입꼬리에는 슬며시 웃음이 맺혀 있었으나 진짜 기쁨의 웃음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그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오히려.

설희가 펄쩍 뛰자 은우가 다시 한번 재차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온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래서 온 거.”

“…….”

“물론 부담스러워요. 선생님이 그렇게 대단한 집안의 사람인 것도 부담스럽고, 나랑 너무 다른 환경에서 자란 것도 부담스럽고.”

하지만, 오늘 진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근데 제가 진짜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

목소리가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정말 너무 황당한 일이라 지금 말하는 대화 내용이 믿기지가 않는다.


“선생님에게 약혼자가 있다고 들어서요.”

그 말에 은우가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약혼자?”

“네.”

“내게 설희 씨 말고?”

“……아, 아니요. 어디랬더라.”

설희는 결국, 자신의 핸드폰에 있던 기사를 그에게 내밀었다. 까만 핸드폰의 액정에 떠 있는 하얀 글자.

옥 회장의 두 아들은 둘 다 미혼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원활한 승계를 위해 지분 증여 이전에 결혼식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PW그룹 박해영 회장의 차녀와 대손건설 이재영 전무의 장녀와의 약혼이 예정되어 있어 향후 연계주로서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어…….

은우가 크고 단단한 손을 내밀어 설희의 핸드폰을 쥐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기사를 천천히 읽었다.


“선생님 형님이랑, 선생님이…… 약혼을 한다고.”

“아.”

“……이제 짚이는 데가 있으세요?”

이현이 그랬었다. 아버지가 억지로 약혼을 시켰다고. 설희는 일반적인 집에서 자라 알 수 없었지만 재벌집에서는 별별 일이 다 일어난다고 했다.

은우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저 남자는 거짓말을 하면서 설희를 꼬시기엔 너무 정직하고 반듯한 사람이었고, 거짓말을 하는 바에는 모든 걸 솔직히 말하고 차라리 당당하게 행동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막 선생님 아버님이 억지로 선생님을 약혼 시키구 결혼도 시키고 막 그러실 수 있잖아요. 그런 걸까요? 전, 괜찮아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설희 씨.”

옥은우의 입술이 꿈틀, 움직였다.


“……네.”

“아니에요. 정말.”

그제야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약혼자가 있다고 해서 걱정한 겁니까?”

지금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남자의 얼굴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느른한 웃음이 퍼져나갔다.


“내가 다른 약혼녀가 있을까 봐 질투한 거예요?”

“……네.”

결국은 솔직하게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가짜였다.

자신에게 거들먹거리는 찬정을 속이기 위해, 그리고 그의 할머니를 안심시켜드리기 위해.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진짜였다. 그를 좋아하는 이 마음도, 옥은우를 생각하면 일렁이는 감정도.

그의 대답을 이제 초조히 설희는 기다렸다. 그리고 은우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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