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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사적으로 (62/80)


62화. 사적으로
2023.06.03.


한 시간 정도 지나고, 돌마래 동물병원에는 조용한 사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설희는 보호자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아니에요, 다행히 집이 가까워서 금방 왔어요.”

순순이의 보호자가 웃으면서 절레절레 손을 저었다.

다행히, 급하게 설사 증상이 있는 초코네 집에 연락을 했더니 아직 약을 먹이지 않아 올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두 보호자들은 집이 가까워 금방 병원으로 왔고, 거마비 대신 약제비를 받지 않겠다고 병원 측에서 제안하고 정중한 사과를 드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확인을 못 했네요.”

미끈한 외모를 한 이현이 여성 보호자에게 난감한 듯 웃으며 말을 건네자, 보호자가 금세 얼굴을 붉혔다.


“괜찮아요. 그러실 수도 있죠.”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보호자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고, 이현이 길게 숨을 뱉었다.


“하. 그래도 잘 끝났네요. 컴플레인도 없었고, 약도 다행히 복용 안 했고.”

“다행이에요, 근데.”

왜 약이 바뀐 걸까.

설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이현이 약을 동시에 자신에게 건네주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가 말한 대로 전달한 것 같은데. 그래도 약 봉투는 똑같이 생겼으니 착각한 걸까.

하지만 설희는 혹시 이런 실수를 할까 봐 두 번, 세 번 체크를 했다. 병원에 들어온 이후로 꼼꼼히 챙기는 게 몸에 배어 있는데.

그래도 오늘 아침에 환자가 많아 조심성이 흐트러졌는지도 모른다.


“왜 약이 잘못 나간 걸까요?”

아까 보호자들이 있었을 때 열심히 사과하던 이현이 비스듬히 선 채 설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싹 사라져 있었다.


“내가 실수한 건 아닌데. 그럼 어떻게 된 걸까요.”

이현의 냉정한 시선에 설희가 아랫입술을 씹었다.

약을 건드린 것은 설희와 이현밖에는 없다. 그가 아니라면 설희라는 그의 은근한 압박이 이현의 말에서 느껴졌다.

그에게서 약을 받아 종이봉투에 이름을 쓰고 넣던 장면을 다시 떠올리려 해도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매일 하는 일의 연속이었으니까 특별히 기억하지 않았다.

자신은 기억이 없고, 이현은 절대 아니라고 하니.


“……제가 실수를 했나 보네요.”

설희의 입에서 쓰디쓴 쓴 말이 튀어 나갔다.

다행히 순순이 보호자가 꼼꼼해서 약을 먹이기 전에 확인하고 연락을 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두 강아지가 다 큰일을 겪을 뻔했다.

지금까지 실수를 한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몇 번이고 확인하는 성격인데.

근데 이렇게 사소한데 서 큰 실수를 했다니.


“죄송합니다.”

설희가 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현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지 않아도, 실수에 대해서는 제대로 사과해야 했다.


“저 덕분에 병원도, 최이현 선생님도 곤란하셨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뭐, 내가 한 건 없지만.”

“아니에요. 저 때문에 사과하시고, 뒤처리도 해주시고.”

설희의 말에 이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게 미안해요?”

“네.”

“흐음.”

그가 손을 올려 그 자신의 턱을 쓸어내렸다. 뭔가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만?”

“네?”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고 넘어갈 셈이에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네. 설희 씨만 가능한 일인데 날 꼭 좀 도와줘야겠어요.”

자신이 가능한 일이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을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의뭉스럽게 말하는 이현의 말 때문에 설희는 더 불안해졌다. 눈썹을 찌푸리고 그녀가 속삭였다.


“그게 뭔가요?”

“오늘 저녁, 시간 있어요?”

“있긴 한데.”

“무슨 일이세요?”

“차 한잔 마시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현의 말에 설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관련한 일인가. 이현이 싫어서 그와 단둘이 보는 것은 꺼림직했지만 자신 때문에 오늘 몇 번이고 보호자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던 이현이었으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일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그럼.”

“…….”

“기대되네요, 오늘 저녁.”

오늘도 그는 제멋대로였다.

***



“하아.”

점심시간. 밥을 먹는 설희의 한숨이 길었다. 영 밥맛이 없는지, 싸 온 도시락의 반찬을 뒤적뒤적거리면서 한숨만 쉬었다.

설희가 돌마래 동물병원에 들어온 지 몇 개월.

채린은 설희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언제나 밝고 당당했던 설희였는데, 이런 모습은 낯설었다.

병원에서 좋지 못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사람들의 기분을 북돋워주는 것은 설희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설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가끔 한숨을 쉬기도 하고, 오늘도 밥을 결국은 반도 먹지 못하고 도시락을 닫았다. 평소 같으면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싹싹 긁어먹고, 통통한 입술로 오물오물 씹어먹었을 텐데.

먹는 거 하면 유설희 아닌가.

채린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나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설희 씨. 무슨 일 있어요? 아파요, 혹시? ”

“네? 아, 아뇨.”

“얼굴색이 좋지 않은데. 집에 안 좋은 일 있는 건 아니고요?”

“그게, 이현 선생님이. 아, 아니에요.”

설희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러나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이현과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상세한 내용을 채린은 더 캐물으려 했지만 억지로 웃는 듯한 얼굴로 설희는 채린을 안심시켰다.


“정말 별일 없어요. 그냥 오늘 아침을 많이 먹어서 속이 안 좋은가 봐요.”

“그럼 다행인데.”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설희가 서둘러 도시락을 챙겨 일어섰다. 아무래도 그 표정이 마음에 남아 채린은 손을 내밀어 설희의 작은 손을 움켜잡았다.


“설희 씨. 저기, 아무 일도 없겠지만.”

늘 밝은 얼굴에 힘을 받았던 채린인 만큼 설희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요.”

“…….”

“제가 무슨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들어주는 것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자 꾸벅, 설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꼭…… 그럴게요.”

그 뒷말이 썼다.

***

오늘 실수하고, 이현과 차까지 마셔야 하고. 진짜 재수 옴 붙은 날이다.


“설희 씨, 퇴근 안 합니까?”

“선생님, 오늘은 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은우의 말에 설희가 부드럽게 거절하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

이현이 오늘 자신과 차 마시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설희도 굳이 은우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실수한 것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도 않고, 이현에게 폐를 끼친 것을 알리고 싶지는 더더욱 안됐다.


“네. 그냥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친구를 만난다든지 하는 서투른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설희는 거짓말이 서툴렀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은은한 설희의 말에 은우가 미간을 좁혔다.


“바쁜가 봐요.”

“네. 조금.”

“그래요, 그럼.”

그녀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은우는 말을 더 얹지 않고 “잘 다녀와요.” 짧게 말한 뒤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그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마 궁금하겠지. 나도 옥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다면 궁금할 테니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설희의 머리가 아팠다.


 

***



“오늘 하시고 싶으시다는 말이 뭔가요?”

병원에서 멀지 않은 카페. 창가의 자리에 이현이 느른하게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턱을 치켜든 표정이 밉살스럽다.

설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급하게 말을 꺼냈다. 이 사람과 오랫동안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


“사적인 이야기예요. 병원에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사적인 이야기요? 오늘 실수한 것 때문에 부르신 것 아닌가요?”

업무적인 실수 때문에 저녁에 차를 마시자고 해서 나왔더니, 사적인 이야기라니. 설희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이런 거 아니면 설희 씨는 내게 시간 내주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이래서 더 시간을 내기 싫었던 것이다.

머리가 아프다. 그러나 기왕 나온 거, 이야기를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하시고 싶은 ‘사적인’이야기가 뭔가요.”

“그렇게 가시 돋친 말투로 말하지 말아요. 나는 설희 씨에 대한 호의로 나온 거니까.”

“호의요?”

호의 다 얼어 죽었구나.


“무슨 호의요.”

“은우 형이랑 사귀죠?”

“…….”

그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은우와 사귄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병원에서는 설령 다른 사람들은 암암리에 눈치를 채고 있었어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원내 연애여서 더욱 그랬다.

어쨌든 비밀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이현에게 말할 이유도 없었다.


“선생님이 알 바 아닐 텐데요.”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에는 설희 씨도 관심 있을 텐데.”

“뭐요?”

“은우 형에 대해 이제는 잘 알아요?”

“……네, 그럭저럭.”

그 말에 이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잘 안다고 생각해요?”

“네.”

“잘 아는데도 사귈 수 있어요?”

“……무슨 말이에요.”

이현이 놀랐다는 듯 눈썹을 추어올렸다.


“은우 형이 사실은 약혼자도 있고 이런 것도 다 안단 말이죠? 지금 설희 씨랑 사귀는 건 그냥 가볍게 사귀는 건데, 설희 씨가 그런 것도 다 받아들이고 그냥 만날 수 있단 게 놀라워서.”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순간 설희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설희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거봐.”

이현이 재밌다는 듯, 손바닥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탁, 탁 쳤다.


“하나도 모르고 있잖아.”

“…….”

“그러면서 옥은우랑 사귄다니. 정말 나쁜 사람이네.”

이현은 빙글빙글 웃었다. 설명을 찬찬히 하지 않고 놀리는 모양새가 화가 났다. 설희는 입술을 잘근 씹고는 말했다.


“돌려 말하지 말고 말해요. 옥 선생님이 왜 약혼자가 있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하지 말아요.”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국, 설희는 설명했다. 도대체 이현의 말도 안 되는 말에 속아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저, 할머니도 찾아뵈었어요. 저희가 사귀는 것 아셨지만 그런 말 없으셨고요.”

“할머니야 그러시겠지. 아버지가 정해준 약혼자니까.”

“…….”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설희는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은우 형네가 무슨 일 하는 집인지는 알고요?”

“무슨 일 하는 집?”

미간을 좁혔다. 그의 집이 잘사는 것은 알았지만, 무슨 일 하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와, 역시 형 대단하네. 사귀는 사이에 이런 이야기를 안 했다니.”

이현이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해 설희에게 내밀었다.


“읽어봐요.”

“…….”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보여주는 거예요. 어떻게 이걸 말을 안 해주나.”

그리고 이현이 보여준 핸드폰 화면을 보고 설희는 눈을 치켜떴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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