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떨리는 심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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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떨리는 심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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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떨리는 심장은
2023.05.30.
병원에서 가깝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스킨십 하는 것이 쑥스러운 것조차 잊어버리고.
설희의 모든 신경은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은우의 크고 단단한 손에 가버렸다. 자신의 작은 손과 다르게 그의 큰 손은 저릿한 감각과 안락함 마저 느껴졌다.
‘집으로 가자.’
같은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닐 텐데도, 그저 같은 건물에 살고 있으니까 돌아가자는 것이 그 말이 담은 뜻이 농밀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설희는 심장이 속절없이 떨렸다.
두근, 두근.
그와 집까지 가는 길.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야외에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더웠고, 실내에서 에어컨을 틀어도 창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열기가 한여름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이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맞닿아 있어도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이 좋네요.”
설희는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러자 같이 걷던 은우가 발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설희를 응시했다.
쏟아지는 시선에 설희 역시 발을 멈췄다.
“왜요?”
뭐라도 묻었나?
무언가가 잘못되었나 싶어 설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설희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흐트러진 설희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러네.”
“…….”
뭐가 그렇다는 말인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은우가 싱긋 웃고 말을 이었다.
“좋네요.”
“…….”
“정말 좋아.”
날씨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겠지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자신이 좋다는 말 같아서.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옥 선생은 오늘 하루 꽤 힘들었을 것이다. 오전에 제주도에서 돌아와서, 오후에 그를 기다리던 환자들이 많아 중간에 한 번 숨 내뱉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러나 중간중간, 그의 시선이 병원에서 느껴졌다. 일요일, 제주도에서 그가 자신에게 보냈던 눈길과 아주 비슷한.
그래서 그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설희는 병원에서 집중해야 하는데도 문득 손가락이 멈추곤 했다.
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갈까 했지만, 오늘 제주도에서 돌아온지라 서로 피곤할 것 같아 그대로 집으로 가기로 했다.
걸으면서 설희가 종알거렸다.
“곰곰이랑 얼른 껴안고 자고 싶네요.”
곰곰이는 제주 내려가 있는 동안 동물병원에 맡기고 있었다. 오늘 집에 오는 길에 데리고 오고 싶었는데, 짐 정리가 끝나지 않아 내일 데리고 오기로 했다.
“조금 서운해요. 며칠 만에 만나서 곰곰이가 저 엄청 그리워했을 줄 알았는데, 병원이 더 좋은지 똘이랑 노느라 정신이 없더라고요.”
“원래 곰곰이는 병원에서 오래 지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별것 아닌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새 둘이 집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복도에 섰다. 오랜만의 자신의 집 앞에 서자, 안심이 되면서도 무언가 서운한 느낌이었다.
요 며칠 동안 옥 선생님이랑 내내 같이 있어서 그런가.
“들어가세요, 그럼. 저.”
서운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섭섭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몰라 설희는 입을 다물었다.
설희의 인사에 은우가 고개를 까닥했다. 고작 벽을 두 개 사이에 둔 거리인데 헤어진다는 게 서운하다고 하면 그는 미쳤다 하겠지.
말하지 않기를 잘했어.
고개를 서둘러 젓고는 설희는 키패드를 눌렀다. 그러자 뒤에서 남자의 두꺼운 팔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앗.”
“어쩌죠.”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들여보내기 싫은데.”
“…….”
“서운하고 허전해.”
조금 전, 자신이 생각한 것과 은우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한 번 놀라고, 또 자신의 등 뒤에 붙은 남자의 몸에서 뛰는 심장박동에 놀랐다.
두근, 두근, 두근.
설희의 입술에서부터 귓가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주말 내내 같이 있었는데, 이런 내가 미친놈 같겠죠.”
“아. 아니에요.”
“아뇨, 맞아요. 진짜 미친 것 같아. 왜 이러는지.”
놓아줘야 하는데.
놓아주기가 싫으네.
그렇게 낮게 말하는 것을 보고 설희는 어쩔 줄 몰랐다.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가 달콤하디달콤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설희를 꽉 안고 있던 은우가 결국은, 두 팔을 풀었다.
“오늘 피곤할 테니, 그래도 놓아줄게요.”
“…….”
“잘 자요.”
그리고 그가 한 발자국 물러서서, 손을 한들한들 흔들었다. 느른한 그의 입술을 가만히 보다가, 설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은우 씨.”
“음?”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뭘요?”
이런 말은 익숙하지 않지만.
“헤어지기 아쉽다고. 사흘이나 있었는데 떨어지는 게 서운하다고 생각했어요.”
설희의 말에 은우의 얼굴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그 말은.”
“그냥 그렇다고요. 그러니까 은우 씨가 미친 거면, 저도 미친 거예요. 비겼어요, 우리.”
그렇게 말하고는 설희는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즐거웠어요. 제주도.”
차마 말하고 그를 보기에는 쑥스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더 있다가는 정말 은우랑 헤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아 발길을 재촉했다.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말에 놀라 살짝 눈이 커진 은우를 뒤로하고,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으로 주르륵, 쓰러져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연애라는 거,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었구나.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설희가 들어가고 난 후.
은우는 그녀가 남긴 말 때문에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버렸다.
“헤어지기 아쉽다고 생각했어요.”
“…….”
“은우 씨가 미친 거면 저도 미친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는 쏙 집 안으로 들어가버린 설희 때문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제길.”
이렇게 불을 지르고 도망가 버리다니.
“유설희 씨, 당신 이러는 거 반칙이야.”
그녀에게 들리지 않게 낮게 읊조리고는 은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
은우와 설희가 제주도를 다녀오고 나서 일주일. 최근의 돌마래 동물병원은 조용했다.
늘 오던 단골 환자들이 많았고, 큰 수술이나 응급상황도 없었다.
그러던 병원의 일상에 폭탄이 떨어진 것은 어느 금요일이었다.
설희는 돌마래 동물병원에 들어오고 나서 내내 즐거운 일만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좋았다. 거기다가 안정적이고, 출퇴근도 규칙적이고 좋아하는 동물들도 마음껏 볼 수 있고.
싫은 사람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는데.
“휴.”
머릿속에 한 남자가 떠오르자 설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왜 한숨? 무슨 일 있어요?”
옆에 서 있던 채린이 설희의 어두운 표정이 신경 쓰였는지,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아뇨, 무슨 일은요.”
채린에게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아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자꾸만 이현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서 곤란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말해요. 제가 도와줄게요.”
“네, 감사해요.”
그때, 이현이 약 조제실에서 나오며 테크니션, 설희를 불렀다.
“설희 씨.”
“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싫은 사람이 등장했다.
그가 비스듬히 서서 설희를 잠시 바라보더니, 생긋 웃었다.
설희는 그가 부담스러웠다. 뭐라고 할까, 실수도 많았고 일을 설렁설렁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 수의사와 비교해도 그는 특이했다. 얼마 전에도 같이 진료하다가 말실수를 했던 일로 병원이 뒤집혔었지.
거기다가 이현은 옥 선생과 사이가 나쁜지 사사건건 옥 선생을 걸고넘어져서 더욱더 불편하다.
이현이 또 뭐를 시킬까 봐 설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더니 그가 약봉지를 두 개 내밀었다.
“약 조제 다 했습니다. 왼쪽이 설사 증상이 있는 초코한테 나갈 약이고, 오른쪽은 심장병 순순이에게 나갈 약입니다. 진료 내역 올려놨으니, 계산하고 퇴원시키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에게 두 개의 약 봉투를 받아 카운터로 갔다.
“초코 보호자분.”
“네.”
“오늘 초코가 설사 증상이 있으셔서 선생님이 약을 조제해 주셨어요. 식후에 먹이면 되시니까요. 혹시 알약이라 잘 안 먹으면 영양제를 발라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른 약 봉투를 집으며 순순이의 보호자를 불렀다.
“순순이 보호자님, 여기 약입니다. 늘 받아 가시는 약이라 어떻게 먹이시는지는 아시죠?”
“아, 네. 걱정 마세요. 감사합니다.”
“순순이 안녕. 오늘 조심해서 가.”
작은 포메라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자, 순순이가 웃는 것처럼 까만 눈을 반짝 빛냈다.
그렇게 평온한 하루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폭탄은 1시간 뒤에 떨어졌다.
***
순순이와 초코가 돌아간 지 얼마나 됐을까. 동물병원에 전화 한 통이 왔다.
“네, 돌마래 동물병원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오늘 방문했던 포메라이안 순순이네 집인데요. 받아온 약이 이상해서요. 저희 집은 늘 같은 약만 받아오는 걸로 아는데, 이번에 약이 바뀌었나요? 아무래도 평소 먹던 거랑 달라져서. 확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잠시만요.”
-네.
갑작스러운 전화에 놀라, 설희는 전화기에서 잠시 귀를 떼고 이현을 찾았다.
“저기, 최 선생님.”
“음?”
마침, 진료실에서 나오던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죠?”
“오늘 내원했었던 포메라이안 순순이요. 혹시 오늘 약 처방이 바뀌었나요?”
“아뇨. 그대로인데.”
“순순이 보호자님께서 연락이 오셨는데, 약이 바뀐 것 같다고.”
그 말에 이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눈썹을 비틀며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받아보죠.”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 그가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최이현입니다.”
이현의 통화를 듣고 있던 설희의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전화를 받은 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지금 받으신 알약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파란색이 섞여 있다고요?”
그렇게 되물은 이현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알겠습니다. 지금 순순이가 복용한 것은 아니죠? 혹시 괜찮으시면 다시 내원해주실 수 있을까요?”
“…….”
“네, 알겠습니다.”
이현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현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무슨 일이 있나요?”
설희는 이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러자 이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환견들 사이에서 약이 바뀐 것 같네요. 아무래도.”
“……네?”
“순순이에게 가야 했던 약이 초코에게 가고, 초코에게 가야 했던 약이 순순이에게 간 것 같은데.”
“헉.”
설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순순이는 확장형 심근증이 있는 강아지였다. 확장형 심근증이 있는 경우, 심장 근육이 늘어나기 때문에 심장의 수축력이 떨어진다. 수축이 잘 안 되어 혈류가 줄어들기 때문에 때로는 배뇨량이 줄어들고, 몸이 붓는다.
그래서 소변을 많이 볼 수 있도록 이뇨제를 반드시 써야 했다.
그와 반대로, 초코는 지금 설사 증세가 심했다. 오늘 낮에 와서 링거까지 맞고 갈 정도로 탈수 증세가 심했는데.
“이뇨제를 먹어버렸다면.”
“큰일이지.”
탈수가 더 진행되어 순간적으로 생명의 위협도 생길 수 있었다.
이현이 얼른 초코의 집을 연결해달라 했다. 혹시라도 약을 먹이면 문제가 더 커져 버리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