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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밤의 소원 (58/80)


58화. 밤의 소원
2023.05.20.


바로 옆에 은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진 까만 밤인데도 불구하고, 비가 억수로 내려 밖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어디서 새어 들어온 빛인지. 그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아까 낮에, 내 부탁 하나 들어준다고 했죠.”

“……네.”

“그 소원, 지금 써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설희는 숨을 멈췄다.


 
지독히도 탁한 목소리. 흔들림 하나 없는 눈동자. 당장이라도 그가 머리를 숙이면 콧날이 닿을 것만 같았다. 조금 멀어질까 했지만, 허투루 움직이다가 오히려 더 가까워질까 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부탁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뭔데요?”

“솔직히 답해줘요.”

“……네.”

“유설희 씨에게 난, 뭔가요?”

그의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설마 그런 질문이 올 줄은 몰라서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저에게 옥 선생님이요?”

“……응, 유설희 씨에게 나는 직장 상사 이외의 다른 의미가 있긴 한가?”

일단은 우리 사귀는 사이인데.

다른 의미가 있긴 하냐고 물어보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자……친구. 아니에요?”

“남자인 거 아는데.”

그의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그렇게 쉽게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요?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

“나만 이렇게 긴장하는 건가.”

그가 손을 뻗어 설희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의도한 건지, 의도하지 않은 건지 천천히 그 손가락은 아래로 쓸어 내려가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짜릿한 감각이 스쳤다.

은우가 입을 열었다.


“나만 이렇게 닿고 싶어 하고.”

“아……닐걸요?”

“아니면 아닌 거고, 이면, 이다이지 아닐걸요는 뭐지.”

“저한테 옥 선생님은…… 옥은우죠.”

설희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그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까다로운 수의사 선생, 옥은우?”

“그것도 맞지만.”

그의 긴 속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동그란 눈동자가 저를 바라본다. 남자다운 턱선 밑으로는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인다.

마른침을 삼키는 그가 더없이 색정적이다.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팔이, 그가 설희의 몸을 스칠 때마다 근육이 요동쳤다.


“옥 선생님은……. 이렇게 가까이 있기만 해도 내 심장을 꽉 쥐고 터트릴 것 같은.”

설희의 말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방에 들일 때 나름의 긴장이라고 해야 하나, 기대를 하고 말을 할 정도로.”

“그건, 어떤 의미지?”

설희가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음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말 하는 게 미친 건 알지만.

어쩌면 너무 빠를 수도 있지만.


“남자예요. 은우 씨는 나에게.”

처음으로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귀고 나서도, 어디를 가서도 그를 “옥 선생님”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언젠가 그는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달라 했지만, 쑥스러워 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르륵, 그렇게 나왔다.

그의 이름은 예뻤다.

‘은우’라는 이름은 특이하지도, 별나지도 않은 이름이었지만 실제로 입에 담아보니 정말 좋았다. 어쩌면 눈앞에 있는 남자가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숨을 들이켰다. 긴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진다.


“다시 한번 불러봐요.”

“…….”

“내 이름, 다시 한번.”

“은우 씨.”

“나, 내 이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가 담담히 읊조렸다.


“설희 씨가 부르는 내 이름, 듣기 좋네요.”

정말 좋아.

그리고 그는 뜨거운 숨을 설희의 귓가에 불어넣었다. 귓바퀴가 간질간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가 자신에게 고백했던 그 날부터, 아니 처음 입술을 겹친 그 날부터 은우는 자신에게 그냥 남자였다.

지금도…….

지금도 닿을 듯 말 듯 한 입술이 감질나, 미칠 것 같았다. 곧,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워졌는데, 그의 눈빛이 제 입술을 녹일 듯했다.

그 입술이 어떤 감각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달았다.

그러나 은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설희가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다른 한 손을 뻗어 설희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더 다가오지도, 더 끌어당기지도 않은 채 설희의 얼굴을 그저 직시했다.

닿고 싶어…….

결국은 참지 못한 것은 설희였다.

설희는 불시에 턱을 쳐들었다.

그러자 그와의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던 거리가 확 줄어들면서 뜨거운 입술이 맞닿았다.

달콤하고 녹아내릴 것 같은 입술이 닿는 순간, 설희의 어깨를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 않게, 그러나 확연하게 그녀의 살갗으로 손가락이 파고든다.


“흡…….”

설희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랐는지, 은우의 눈은 살짝 커졌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제주에 태풍이 와서 비가 많이 왔다. 바람도 많이 불었다. 그래서 나무가 쓰러졌고, 그의 방에서는 도저히 잘 수가 없고.

그래서 방에 그를 불러들인 것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더 닿고 싶다. 그 생각만이 설희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은우는 잠시 눈을 치켜떴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깨를 감쌌던 손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단단한 가슴에 부드러운 몸이 짓눌린다. 숨이 가빠져 설희의 입술이 반쯤 벌어지자, 거칠게 그가 안을 탐색했다.


“흐읍.”

숨소리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이 설희의 잇새로 삐져나간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목선을 훑고 올라가 설희의 뒤통수를 감쌌다.

크고, 단단한, 남자의 손.

저릿저릿해서 미칠 것만 같다.

그의 몸이, 그의 입술이 부드럽다. 처음에는 속상할 정도로 느리게 그녀를 탐하던 그는 점점 빠르게 안을 휘저었다.

미치겠다.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바깥에서 위잉위잉 위협적으로 불어오는 바람도, 몰아쳐서 바닥에 차오르는 빗물도 다.

그의 뜨거운 손길과 숨결에 다 녹아버렸다.

설희가 눈을 감고 황홀할 정도로 키스에 빠져든 순간,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순간, 온몸을 휘감던 열기가 사라졌다.

눈을 반쯤 뜬 채, 눈앞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한번 설희에게 입맞춤하고 천천히 티셔츠를 벗었다.

완벽한 몸매가 어두운 한옥집에 드러났다. 전에 그의 위에 쓰러졌을 때 느꼈던 딱딱한 가슴, 그리고 어깨…….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말릴 수도 없었다.

셔츠를 벗은 그가 속삭였다.


“나는 참으려 했어.”

“…….”

목이 꽉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나 더는 못 참아요. 당신이 시작한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설희는 겨우 목을 쥐어짜 속삭였다.


“좋아요.”

“…….”

“좋으니까.”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자, 은우의 신경이 끊겼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을 잊었다. 뜨겁게, 뜨겁게 서로를 원하기만 했다.

몰아치는 폭풍우의 밤은, 열렬하게 달아올랐다.

***

쏴아.

빗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온몸이 아프고 끈적거렸지만, 쏟아지는 빗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희는 눈꺼풀을 반쯤 떴다. 방 안에는 작은 창을 통해 희미한 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텅 빈 방.

여기가 어디지.

서울에 있는 부모님 집의 벽지는 장미꽃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어지러운 패턴이다. 그리고 곰곰이와 함께 사는 오피스텔의 벽지는 은은한 아이보리색.

이 방은…….

굵고 단단한 나무로 된 서까래가 보인다. 우리 집도, 부모님 집도 아니라면.


“아!”

흐릿했던 기억이 돌아왔다. 설희의 입에서 단말마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기는 은우 씨네 할머니 댁.”

제주도였다.

학회 때문에 제주도에 내려왔고, 그리고 폭풍우가 왔고, 그래서 그를 자신이 묵는 방에서 재웠고, 그리고…… 그리고…….


“미치겠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젯밤의 기억이 생생하게 돌아왔다.
 


“은우 씨, 제발.”


“……하.”


“거기, 아, 제발, 은우 씨.”

 
애원하듯, 바라듯 그에게 달라붙었다.

어제 얼마나 그의 이름을 연달아 불렀는지,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칼칼했다.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좋아.”

창피한 것도 모르고 그에게 달라붙었다. 술이라도 마셨으면 핑계라도 댈 수 있겠지만, 어제는 단 한 방울의 알코올도 마시지 않았다.

취했다면 분위기에 취한 것이다.

그렇게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던 그때.

덜컹.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방안에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어떻게 해.”

은우였다.

직감적으로 방에 들어오는 것이 은우임을 알아챈 설희는 펄쩍 뛰었다.

비스듬히 앉아 있어 반쯤 드러난 자신의 살결을 설희는 손을 뻗어 이불을 끌어당겨 뻗었다. 아무리 비가 와서 어둑어둑하다고 해도 낮이었다.

결코 알몸을 그대로 드러낼 정도로 용기가 많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삐걱, 소리를 내고 문이 활짝 열리자, 밖에서 은우가 들어왔다.


“깼어요?”

그는 씻었는지, 머리가 젖어 있었다. 앞으로 흐트러진 머리가 깊은 고동색의 눈동자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날카로운 콧날에 붉은 입술.

그 입술이 어젯밤 자신을 얼마나 괴롭혔던가. 그게 떠올라 설희는 시선을 서둘러 돌렸다.

어제 취한 것은 분위기 때문이 아니다.

저 남자에게 취한 거다. 지금도, 벌건 대낮인데도 그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쾅쾅 뛴다.

대답이 없는 설희를 보고 은우가 두 눈썹을 추어 들었다.


“더 잘래요?”

“……아.”

“괜찮아요? 몸은. 어제 내가 너무 괴롭힌 것 같은데.”

양심은 있는지 걱정하며 묻는 은우를 보고 설희는 고개를 까닥였다.

12시 넘어 시작된 그들의 키스는, 몇 시간이고 몇 시간이고 길어졌다. 격렬하고 뜨거웠다.


“네. 그러기는 했어요.”

“미안해요, 좀. 흥분했나 보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도 은우의 말투는 전혀 미안한 것 같지 않았다.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그래요, 미안하지는 않아요. 설희 씨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거니까.”

“…….”

뻔뻔한 말도 잘도 한다.

설희는 갑자기 전에 돌마래 동물병원에서 다른 직원들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옥 선생님은, 어쩌면 무성욕자일지도 몰라요.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데, 그렇다고 남자에게도 관심이 없으니까.”

 
기가 찰 노릇이다.

뭐?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

뭐? 무성욕자?

그들에게 어젯밤의 일을 말해줄 수는 없었지만, 설희는 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옥은우는 절대 무성욕자가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저 사람은.

설희가 가만히 은우의 얼굴을 쏘아보자, 그가 몸을 숙여 설희에게 다가왔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아니에요, 그냥 피곤해서.”

“좀 더 누워 있을래요? 비행기가 뜬다 해도 아직 시간 넉넉하니까.”

어떻게 할까.

허리가 욱신거리고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아팠다.


“좀 몸이 쑤시기는 하는데.”

“어디가 아파요?”

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열이 있나?”

그리고 손을 뻗어 설희의 뺨을 짚었다. 붉어진 뺨이 한가득 그의 손안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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