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56/80)
56화.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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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2023.05.13.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냐면.”
은우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싹 설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질투하는 설희 씨가,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
“다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말에 설희는 눈을 깜빡깜빡였다.
자신은 분명, 바보 같은 말을 했다. 오늘 옥 선생과 학회에 가서, 은우의 후배를 보고 괜히 심술궂게 마음을 먹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니, 은우에 대해서 더 잘 알 것은 분명한데 괜한 걸로 유치한 질투나 하고. 그런 말을 은우에게 내뱉다니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설희의 반응에 은우는 싫어하기는커녕, 그는 오히려 웃음을 머금고 다가왔다. 손가락이 설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뭘 하려는 지 알 것 같아서.
그래서 가슴에 긴장이 차오른다.
“흡.”
예상대로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설희의 입술을 덮쳤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입술이 겹쳐진다.
뜨겁고도 다정하다. 마치 막을 수 없는 꿈틀대는 화염처럼 그의 욕망이 와닿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옥 선생이었다. 평소에 일할 때는, 혹시 파충류가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로.
그의 피부를 만지면 손끝이 얼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바보같이 쿡쿡 웃기도 했다.
하지만.
뜨거웠다. 뜨겁다 못해 자신에게 화상을 입힐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뜨거웠다.
“앗.”
그와 닿는 모든 곳이 달아올랐다. 안전벨트를 풀고 바싹 다가온 그가 만든 그림자가 기다랗게 설희의 위에 늘어졌다.
그의 콧날이 그녀의 뺨을 짓이겼다. 어둑어둑한 배경에 유일하게 차 안에서 반짝 빛나는 것은 은우의 눈동자뿐.
미친 것 같아.
차에서, 이런 못된 짓을.
학생 때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와의 연애는 아주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스릴이 넘쳤다. 그래서 가끔 무섭기조차 했다.
거침없이 키스를 하던 은우가 순간, 입술을 뗐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입술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묻어 있었다.
“……우리, 들어갈까요?”
집으로.
그 말이 지독하게 야릇하게 들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설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고작 5미터 정도 될까.
은우의 집. 야트막한 담장 너머에 차를 세우고는 집으로 들어가는 데까지 고작 5미터. 그러나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달려갔다.
설희의 한 손은 은우의 커다란 손안에 갇힌 채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은우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대충 집어 던지고 뒤를 돌아보았다.
은우가 뒤를 돌아본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숨 막혀서 설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숨이 막혀서, 허튼 농담이라도 해서 이 공기를 식히고 싶었다.
그 정도로 둘 사이에 팽팽히 긴장감이 감돌았다.
설희가 입술을 달싹거리자, 은우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봐요?”
달빛 속에 드러난 당신의 얼굴이 너무 근사해서.
그래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렇게 말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 정도로 창피했다.
“어…….”
서툰 변명을 하려던 그 순간.
대충 저 어디 던져놓았던 은우의 가방 안에서 핸드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Rrrrrrr
설희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은우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놓고 싶지 않다는 듯.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음에도 그는 흘깃 가방 쪽을 바라만 보았을 뿐, 설희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전화벨은 몇 번인가 더 울리다가 끊겼다.
다행인 건가?
전화를 무시하고 한 발자국 걸은 순간.
다시 한번 전화가 울렸다.
-Rrrrrrr
은우의 고운 미간 사이에 주름이 졌다. 결국, 설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화, 받으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저러다 곧 끊어지겠지.”
오늘은 토요일.
원래대로라면 은우도, 설희도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학회에 나오기 위해 휴가를 내고 빠진 것인데.
때로 휴가를 내거나 심지어, 병원이 쉬는 일요일에도 급하게 들어온 강아지나, 특히 옥 선생이 평소에 돌보는 개의 문제가 있으면 전화가 오는 일이 흔했다.
오늘은 주말이니까, 당연할지도 모른다.
“병원이면 어떻게 해요.”
설희의 말에 은우의 미간이 더더욱 좁아졌다.
-Rrrrrrr
그러는 사이에도 전화는 계속 울려댔다. 결국, 은우와 설희가 맞닿은 손이 떨어졌다.
“잠시만.”
그리고 그는 가방을 주워 안에서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이름이 적혀져 있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
“……누구지.”
잠시 고개를 기울였던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옥은우. 너 이럴 거야? 지금 제주도 와 있다며.
걸걸하고 큰 남자의 목소리.
통화 건너편의 소리가 얼마나 큰지, 전화를 받는 옥 선생이 아닌 설희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은우의 인상이 한층 찌푸러 들었다.
“어.”
-왜 연락을 안 해? 제주도까지 내려와서. 할머니 집에 있다며.
“그건 어떻게 알았담…….”
한숨처럼 그가 말을 내뱉고는, 마이크 쪽을 손으로 가리고는 고개를 돌려 설희 쪽을 바라보았다.
“가족이에요. 병원 아니고.”
“가족이요?”
“네. 형. 금방 끊을게요. 쉬고 있어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희가 서둘러 손을 흔들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전화 받으세요.”
그러자 은우는 어쩔 수 없이 전화로 돌아갔다.
***
늘 세상에 관심이 없고 무뚝뚝했던 은우와 달리, 형인 선우는 어렸을 때부터 좋게 말하면 화끈하고, 나쁘게 말하면 다혈질이었다.
가족 간의 사이도 중요하게 생각해서, 제주에 내려와서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난리가 나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피하려 했는데.
은우는 형의 잔소리를 끊임없이 들었다.
-그래서, 언제 서울 올라가?
“내일.”
-내일 그럼 점심 먹자.
“안 돼.”
오후 비행기긴 했지만, 기껏 설희와 시간을 빼서 내려왔는데 자주 봐봤자 쓸모도 없는 형을 만나러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거기다가 이제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를 형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차도 없는 그녀를 제주시에 덜렁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놀러 온 거 아니야. 학회 때문에 온 거야.”
-놀러 온 거 아냐? 혼자 아니라며.
마치 집안의 CCTV라도 설치해 둔 것 같은 상대방의 목소리에 놀라, 은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형이라면 충분히 해놨을 수도 있다.
은우가 한동안 말이 없자, 형이 낄낄 웃었다.
-새끼는. 야, CCTV 설치 안 해놨어.
정말 안 해놓은 게 맞는 걸까. 은우가 카메라를 찾는 것을 확인이라도 한 것처럼 답을 했다. 선우가 말을 덧붙였다.
-파란 지붕 할머니가 알려주신 거야. 너랑 어떤 처자랑 왔다고.
파란 지붕 할머니는 은우의 할머니와 절친 사이로, 때때로 은우가 내려와도 챙겨주시곤 했다. 그 할머니가 설희와 집을 왔다 갔다 한 것을 보신 게 틀림없다.
제주도의 이 집은, 은우에게는 특별한 장소였다.
숨 막히는 서울의 집과는 달리,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곳.
그곳에 설희를 꼭 데려오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법.
그러나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직원이야.”
아무 사이 아니야. 라고 덧붙이려다가 혹여 설희가 들을까 봐, 아니, 양심상 그런 말은 할 수 없어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냥 넘어가기에는 은우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네가 참도 그냥 직원을 할머니 집까지 데려왔겠다.
“…….”
-너 바쁘면 내가 찾아가고.
“안 돼.”
-안 돼?
단호하게 은우가 대답하자, 더 재밌다는 듯 선우가 말을 이었다. 웃음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왜 안될까. 그냥 직원이랑 온 거면 잠깐 얼굴 볼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당장이라도 찾아올 선우의 말투에 은우가 이를 악물었다.
“대충 해라.”
-…….
“웃으면서 말할 때.”
2살 차이 나는 형 동생 사이였지만, 선우는 늘 은우에게 달라붙었고, 은우는 그런 선우를 늘 귀찮아했다.
은우의 목소리에 날이 서자, 선우는 낄낄 웃었다.
-나 다음 주에 서초동 올라가거든, 술 한잔 마시자.
“……알았어.”
-가능하면 그 ‘직.원’분 얼굴도 보여주고.
“제발 꺼져.”
파르르 떠는 은우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선우는 낄낄 웃었다. 통화 내용이 들릴까 봐 설희에게서 조금 떨어져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설희의 인기척이 없어졌다.
전화가 아무래도 너무 길어졌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샤워라도 하는 걸까.
마음이 달아 얼른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선우는 끈질기게 말을 이었다.
-야, 그나저나, 뉴스 봤어?
“무슨 뉴스.”
아까 핸드폰으로 대충 봤지만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이라도 터트리신 건가.
“아버지?”
-아버지는 강녕하시고, 제주 뉴스 말이야. 태풍이 올라와서 제주도도 난리라던데. 오늘 밤부터 영향권, 내일은 완전 직격.
“태풍?”
-응. 뭐래더라. 역대급 태풍이 온다고. 그런 날씨에는 비행기 못 뜨고 서울 못 올라갈 수도 있으니까 확인해봐.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심상치 않던 하늘은 아니나 다를까 당장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처럼 검게 물들었다. 빗방울도 몇 방울 떨어져 내린 것 같다.
-월요일 날 출근일 것 아냐. 제주도에 갇힐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그럼 재밌게 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툭, 형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집 쪽으로 돌아오자, 아니나 다를까 설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걸까. 오래 생각하기도 전, 욕실 문이 삐그덕 열리고 물을 탁탁 털면서 샤워를 한 듯한 설희가 안에서 나왔다.
하얀 피부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아까 옅게 화장을 했던 얼굴은 어느새 화장기가 사라지고 뽀얀 살결 위에 붉은 입술만이 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습격에, 은우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꽉 쥐었다.
은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설희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죄송해요. 아까 빗방울이 좀 툭툭 떨어져서, 서둘러 샤워 좀 했어요. 전화 길어지시는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전화, 더 안 받으셔도 돼요?”
“끝났습니다.”
“비가 오려나 봐요.”
설희는 대청마루를 타박타박 걸어와 그 끝에 주저앉았다. 섬세하고 긴, 하얀 목덜미가 은우 앞에 드러났다. 그 위에는 갈색의 잔머리가 흩뿌려져 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이,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돌아 은우는 하늘로 시선을 피했다.
“태풍이 오고 있는 중이라고.”
“제주에요?”
“네. 오늘 밤부터 영향권에 든다고 하네요.”
“어머……그럼 어디 나가기도 힘들겠네요.”
그 말에 은우는 입술을 비틀었다.
태풍에 갇혀, 좋아하는 여자와 이 집에 단둘이 남다니.
오늘 밤, 괜찮을까.
은우는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