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심상치 않은 비밀
(55/80)
55화. 심상치 않은 비밀
(55/80)
55화. 심상치 않은 비밀
2023.05.09.
“……집이요?”
설희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의 집에 대해서는 들은 게 없었다. 조모까지 만나보았지만, 굉장히 부유하신 것은 알았어도 집안에 대해서는.
아직, 옥 선생은 설희에게 의문에 가득한 존재였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아도, 그 외에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아, 보이는 차가운 얼굴과는 달리, 동물을 좋아하고 예뻐한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그 정도가 다였다.
설희는 은우에 대해서도 그 정도밖에 모르는데, 그의 집안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설희의 말에, 세나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잘살아서?”
“그냥 잘사는 집이 아닌데. 정말 모르시는구나. 병원에서는 아무도 모르시나 봐요.”
“…….”
“궁금하면, 알려줄까요?”
기다랗게 보기 싫은 눈꼬리가 휜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세나라는 이 사람은 말은 상냥하게 해도 그 아래 일렁이는 묘한 감정이 들여다보인다. 그 물결은 깊고 거멓다.
설희는 미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정말요?”
“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뒤에서 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요.”
아직 비밀이 많은 옥 선생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음식도 늘 자신에게 맞추는데,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요리나 공부 말고 주말에는 뭘 하는지. 영화는 보는지. 영화도 본인같이 심각한 것을 보는지.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본인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눈앞에서 “내가 옥 은우에 대해서 너보다는 많이 알지.”라고 뻐기는 듯한 세나의 얼굴이 얄밉다.
그 말이 의외인 듯, 세나의 눈꼬리가 바싹 올라간다. 설희는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세요. ‘옥경일’이라고.”
그게 뭐지?
낯선 이름에 설희의 행동이 멈추자 세나가 싱긋 웃었다.
“아무 검색창에 넣어보시면 알 거예요.”
***
‘옥경일’
‘옥경일’
‘옥경일’
세나가 ‘집안’ 운운한 것을 보아서 가족 이야기인 건 확실한데.
“신경 쓰기 싫은데.”
설희가 자신도 모르게 웅얼웅얼 중얼거리자 옆에 앉아 있던 은우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를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학회까지 와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들킬까 봐 설희가 괜히 펜을 달칵달칵하며 팸플릿에 줄을 그었다.
“어려워 보여서.”
“그냥 이런 게 있다, 들으면 되니까.”
“네.”
그래도 머릿속에는 아까 세나가 한 말이 빙글빙글 돌았다. ‘옥경일’은 누구일까. 그리고 세나는 왜 저렇게 그 무서운 옥은우 선생이랑 사이가 좋은가.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발표가 시작되었다.
발표의 제목은 ‘동물보건사 도입에 따른 병원의 변화와 치료 체계의 혁신 방안에 대하여’.
한참 듣던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런 거구나.
옥 선생 곁에서 들은 다른 발표는 솔직히 어려웠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이번 발표는 설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것이어서 그런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앞으로 시행되는 절차나 병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고.
발표를 듣는 도중, 어느새 세나가 한 말은 지워지고 발표 내용만이 가득 찼다.
***
“어땠어요?”
목표로 했었던 발표가 끝나고, 은우가 듣고 싶었던 강연을 다 듣고 조금 일찍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생각보다 좋았어요.”
“그래요?”
“네.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아야겠다 싶고.”
동물보건사가 새로 생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자세한 것에 대해서는 인터넷에서 조금 찾아본 것이 다였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더 깊이 알게 되어 제주도까지 온 것이 후회가 없었다.
은우가 설희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잘됐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아니었으면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그뿐인가.
제주도에까지 오는 비행기 표며, 렌터카, 숙소까지 다 그가 부담했다. 설희가 내겠다고 해도, 은우는 그저 그 말에 괜찮다고 웃을 뿐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네.”
“진짜?”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설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은우의 눈동자가 반짝 빛난다. 얼굴 가득 떠 있는 미소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도 좋았던 것도 사실, 고마운 것도 사실이니까.
“네에.”
“그럼, 나중에 나도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부탁이요? 뭐요.”
“나중에 말해줄게요.”
“…….”
“나중에 한 번 쓸 수 있게 해줘요.”
은우는 부탁을 잘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더 빨리 출근해서라도, 아니면 야근을 해서라도 끝내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부탁하는 일은 없었는데.
“무슨 종류의 부탁인데요?”
“소원이라고 해야 할까. 싫으면 안 해줘도 됩니다.”
“……음.”
안 해준다고 하면 끝이겠지만, 어쩐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거절했다간 인정 없는 사람일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하나 쓰세요. 소원권.”
그 말에 은우가 씩 웃는다. 그가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설희가 재빨리 덧붙였다.
“너무 어려운 건 안 되고요.”
“알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은우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때.
뒤에서 초조하게 달려오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은우 오빠. 설마, 벌써 가는 거야?”
불청객, 세나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분이 한 분 서 계셨다.
아, 아침에 아까 인사드렸는데.
은우의 대학 시절 은사라고 하셨던 것 같다. 이건우 교수라고 하셨나. 그가 인자하게 웃으며 은우에게 말을 걸었다.
“은우야. 가는 거야?”
“네. 오늘 들을 건 다 끝나서.”
“끝나고 애들이 다 같이 회식한다는데 같이 먹지 그래.”
그러나 교수의 제안에 은우는 부드럽게 거절을 했다.
“괜찮습니다.”
교수의 시선이 설희에게 닿았다.
“같이 오신 분도 같이 가도 되잖아. 오랜만이기도 하고.”
그 말에 재빠르게 세나가 말을 얹었다.
“그래, 오빠. 같이 가자.”
세나만 있는 거라면 무어라 말을 얹지 않았겠지만, 교수님에 같은 대학 사람이 모인다고 하고, 자신의 존재 때문에 혹시 은우가 무리할까 봐 설희가 입을 열었다.
“가셔야 하는 일이 있으면, 전 따로 관광하고 있어도 되는데요, 선생님.”
설희가 은우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은우는 고개를 젓고는 교수님께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아뇨. 저희는 따로 일정이 있어서요. 죄송한데, 교수님. 서울 가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어.”
그가 툭툭, 어깨를 치고는 지나갔다.
***
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을 하면서 은우가 입을 열었다.
“내일은 학회에 들을 발표가 없어서, 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혹시 설희 씨는 어떻습니까? 보고 싶은 것 있었어요?”
“저도 오늘 본 것으로 될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내일은 제주 떠나는 날이니까 여유롭게 지내죠.”
창밖으로 천천히 어둠이 내리깔렸다.
아직 해가 지려면 조금 더 남았건만, 두꺼운 구름이 껴서 어둑어둑해졌다.
“비라도 올 모양인가 보죠.”
은우가 말을 했지만, 설희는 듣지 못한 듯 밖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그러고 보니 유설희 씨의 행동이 이상했다. 강연을 들을 때는 멀쩡했지만, 그 외에는 가끔 말이 없어지다가, 이상한 메모를 끄적이다가.
그러던 사이, 우선 집 앞에 도착했다. 차를 부드럽게 주차하고, 설희를 바라보았다.
차가 도착했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만히 눈을 깜빡, 깜빡 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러다가 한참 그녀를 향한 시선에 눈치를 챘는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야. 뭐예요?”
놀라 말하는 그녀를 보고 은우가 비식, 소리 없이 웃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그게. 바보 같은 생각인데.”
“뭡니까?”
그녀가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말하자, 오히려 은우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설희인지라, 또 무슨 말을 할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저…… 그 아까 만난, 윤세나라는 분이랑은 많이 친하세요?”
“……아뇨.”
윤세나?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은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러시구나…….”
“왜 그러는데요.”
“아뇨, 정말 별거 아니에요.”
“내가 뭐랬죠?”
은우가 입을 열었다.
“나는 여자 마음 잘 모르고, 특히 설희 씨 마음은 너무 어려우니까. 다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아…….”
“말해줘요, 이 안에서 뭘 생각하는 건지.”
은우가 손을 뻗어 톡, 톡, 설희의 반듯한 이마를 만졌다. 그럴 때마다 마치 복숭아처럼 그녀의 얼굴이 은은하게 달아올랐다.
“저, 그분이랑 친하신 것 같아서 별로 기분이 좋진 않더라고요.”
“…….”
“팔짱도 끼시고…….”
“…….”
“그분은 옥 선생님에 대해 제가 모르는 이야기도 많이 아시는 것 같고요. 그건, 오래된 사이시니까 당연하겠지만.”
이 여자는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까.
창피한 듯, 얼굴을 앞머리를 쓱쓱 내려 말하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속을 타게 하는지 아는지.
“그래서, 좀 딴생각을 했어요. 죄송해요.”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은우의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아니…… 그래요. 네. 선생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뭐가 그렇게 알고 싶어요?”
다 말한 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유설희 씨를 좋아하는지, 지금 마음이 달아있는지. 이런 거.
설희가 그 말에 눈을 깜빡깜빡였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언제나 선생님은 저한테 맞추는데,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요리나 공부 말고 주말에는 뭘 하는지. 영화는 보는지. 영화도 동물 관련한 걸 보시는지…… 그런 게 궁금해요.”
“음식은 뭐든 잘 먹습니다. 딱히 좋아하는 건 없고, 아무래도 혼자 사니 골고루 섭취하려 하는 편. 요리나 공부 말고 주말에 설희 씨 안 만날 때는.”
잠시 은우가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주말 내내 공부만 하세요?”
“논문도 읽고, 책도 좀 읽고. 그렇네요. 영화는…… 보러 가는 일이 별로 없어요. 좋아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설희 씨가 알려줘요.”
“아……. 그렇군요.”
“나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됐어요? 더 궁금한 것은?”
은우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저, 너무 당황해서. 나중에 더 물어볼지도 몰라요.”
“그래요, 언제든. 24시간 궁금 한거 생기면 전화든 직접하든간에 연락해요.”
“……네.”
그러다가 설희는 문득 고개를 들어 물었다.
“지금은 무슨 생각하세요? 사소한 걸로 기분이 들쑥날쑥하는 제가 이상하다 생각하시는 건.”
그 말에 은우는 픽 웃었다.
이상한 것은 저였다. 지금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고 말을 내뱉는 설희의 저 앙증맞은 입술을 당장이라도 삼키고 싶었다.
마치, 사춘기 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설희만 앞에 두면 열이 식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냐면.”
은우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싹 설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질투하는 설희 씨가,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
“다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그는 주체 없이 설희의 몸을 끌어당겼다. 작고 여린 몸이 제 품에 갇히자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맞닿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