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잠들 수 없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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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잠들 수 없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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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잠들 수 없는 밤
2023.05.02.
설희의 눈은 평소보다 더 동그래졌다.
은우가 데려온 곳은 평범한 숙소가 아니었다. 제주시에서 조금 떨어진, 야트막한 지붕을 얹은 제주식 전통 가옥이었다.
검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담장은 파릇파릇한 풀들이 자란 작은 정원을 감싸고 있고, 고즈넉한 장독대가 눈에 들어왔다.
“호텔이 좀 더 편했겠지만.”
은우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여기가 좋아요.”
“그럼 다행이고.”
전통 가옥이지만, 결코 낡지 않았다. 리모델링을 한 것인지, 아니면 관리를 잘했는지 오히려 세련된 디자이너 가옥 같았다. 담장 너머로는, 제주 시내와 저 멀리 푸르른 바다까지 보일 정도로 근사한 곳이었다.
밤이라서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휘영청 뜬 달이 반짝거리면서 수면에 비쳤다.
“다행인 수준이 아니라 너무 멋져요.”
“…….”
“여기, 뭐예요? 그, 한옥 민박인가 그런 건가요? 일부러 빌리신 건가요?”
“아, 음.”
설희의 말에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집이에요.”
“집이요?”
“내 집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요.”
그 말에 설희는 가지고 있던 가방을 품에 안았다.
지금 뭐라는 거야? 옥 선생님네 집은 병원에서 가까운 오피스텔이다. 그렇다는 말은.
“여기 가족들이 사신다는 말씀인가요? 옥 선생님의 가족?”
그렇게 말을 해도 믿어질 정도로 집은 크고 아름다웠다. 설희가 놀라 펄쩍 뛰자, 은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 아뇨. 아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제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시댁? 시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무슨 시댁이야. 시집도 안 갔는데. 물론 할머니는 한 번 뵌 적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였다.
엉망진창인 설희의 머릿속과는 반대로 집 안에는 차분하게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내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설희 씨를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 데리고 올 정도로 미치진 않았어요. 아니, 여기는 아무도 안 살아요. 가끔 사람을 써서 청소는 하지만.”
“……그럼.”
“내가 그냥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집이에요.”
“집이…… 또 있어요?”
이미 확인된 것만 서울에 오피스텔 두 채, 제주에 이렇게 멋진 집이 한 채.
“옥 선생님, 역시 엄청 부자죠?”
설희의 말에 픽, 소리 없이 은우가 웃었다.
“엄청 부자는 아니고.”
꽤 부자라는 말인가.
설희의 궁금증 가득한 눈에 은우가 얇게 눈을 뜨고 설명했다.
“할머니 집이에요. 사정이 있어서 내가 물려받았고.”
“……그렇군요.”
은우씨 할머니는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일까. 원래 서울 저택도 근사했는데, 제주도의 집까지. 은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그와 함께 있었다. 병원에서, 그리고 가끔은 퇴근 후에도.
그래서 이제 그에 대해서 잘 알 만큼도 되었는데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지금도, 갑자기 이런 곳에 데리고 오는 걸 봐.
가만히 설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주의 달빛이 단정한 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날카로운 콧날이 만든 긴 그림자. 그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
제주 사람인 줄도 몰랐는데. 아,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할머니만 제주도에 사셨던 걸까.
저렇게 말을 줄이지 말고 좀 더 말을 해줬으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봅니까?”
은우의 말에 설희가 피식 웃었다.
“참, 옥 선생님은 알 수 없구나 싶어서요. 이런 곳에 데리고 오다니…….”
“나도 고민했어요.”
“…….”
“그냥 호텔이 좋을까, 아니면 내가 제주 오면 늘 묵는 이곳이 좋을까. 근데 설희 씨가 여기를 좋아할 것 같아서. 그냥, 그런 예감이 들어서.”
“좋아요. 이 집이.”
설희가 웃었다.
그러자 그가 손을 뻗어 제주의 바람에 흩날리는 설희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고작 머리카락인데, 아무 신경도 없는 단백질 덩어리를 그가 쓸어내리고 있는데도, 조금 전까지 하얗고 투명하던 설희의 살결이 붉게 달아올랐다.
큰 손이 바로 눈앞에 있다.
“다행이야. 좋다고 해서.”
“…….”
“억지로 끌고 온 거 아닌가 걱정했으니까.”
뭐, 억지로 끌고 온 것은 맞다.
공부에 좋다는데 싫다고 할 명분도 없고, 그가 무엇보다 설희의 성장을 생각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서 어쩔 수 없이 왔다.
은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릴 뻔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괜히 긴장에 입술이 마른다.
“……고…… 공부하려고 온 건데요.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의 손끝이 천천히 설희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피곤했죠. 들어가요. 저 방이 설희 씨가 쓸 방이에요.”
“아, 제 방이요?”
“……응.”
설희의 말에 그가 묘하게 웃었다.
“왜요. 같은 방에서 자자고 할 줄 알았어요?”
“아뇨.”
“아니면 같은 방에서 자고 싶었어요?”
“절대 아니요!”
설희가 펄쩍 뛰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은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아찔하게 보이는 미소에 오늘도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또 놀리려고 그러지.
“아, 난 그러고 싶었는데.”
“…….”
“근데 그랬다가는 내일 아침까지 한숨도 못 잘 것 같아서.”
은우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설희의 입이 방긋거린다.
“좋아하는 여자 옆에 두고 가만히 놔둘 정도로 신사적인 남자는 아니거든.”
“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설희가 한 발자국 물러서니 그가 손을 뻗어 설희의 머리를 톡 쳤다.
“그러니까 얼른 도망가요, 덮치기 전에.”
그리고는 그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은우가 먼저 씻으라고 해서, 설희는 화장도 다 지우고 짐도 정리했고, 내일 가지고 가야 할 노트랑 옷이랑도 다 확인했다.
“이제 뭐 하지…….”
이제 10시였다. 서울에서 이 시간이면 할 일이 많았다. 티브이도 보고, 곰곰이랑 놀기도 하고.
그러나 제주는 다르다.
곰곰이는 병원에 맡기고 와서 평소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고, 텔레비전도 없다. 밖은 너무 적막해서 오히려 잠들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바로 앞의 방에서, 은우가 자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더욱 마음이 심란했다.
설희는 뒤척뒤척, 몇 번인가 잠자리에서 몸을 움직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아침은 7시에만 일어나면 되니까, 산책이라도 할까.”
아까부터 문밖이 조용한 것을 보니 은우는 이미 자러 들어간 것 같았다. 아까 차를 타고 왔을 때, 집 앞에 꽤 예쁜 길이 있었는데, 거기라도 걸어볼까 해서 설희는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벌컥.
집 한구석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설희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은 욕실이었고, 그리고…….
은우가 그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래는 면바지에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대청마루에는 작은 등을 켜놨는지라, 보고 싶지 않아도 그의 나신이 그대로 설희의 눈앞에 드러났다.
지금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 물방울은 너른 어깨에서부터 쩍 벌어진 가슴을 타고 내려와 갈라진 복근에 맺혔다.
그가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젖은 머리를 타월로 툭툭 털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요?”
“아, 저기.”
“욕실 쓰려고?”
그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은우의 넓은 등 근육이 드러난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같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교하게 드러난 근육을 보고 설희는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눈을 떨궜다.
아, 깜짝이야.
“아뇨. 그, 조용해서……. 밖에 산책이나 갈까 하고.”
“산책?”
그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같이 가죠.”
“아, 혼자 가도 되는데.”
“안전해 보여도 인적이 드물어서 혼자 다니긴 위험하니까. 같이 가요.”
“그러고요?”
아무리 여름이라도 그렇게 벗고 다니는 건 좀.
그 말에, 은우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벗은 몸에 있는 걸 깨닫고 “아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옷 입고 올게요. 실례.”
“……네.”
곧 얼마 뒤에 셔츠를 걸친 옥 선생이 나왔다. 바로 옆에 서자,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설희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괜히 산책을 간다고 나와 가지고는.
오늘 밤은 잠을 다 잤다.
꿍얼거리며 설희는 몸을 숙여 신발을 신었다.
***
“아. 피곤해.”
아침 7시 반.
이대로라면 학회에 꽤 간당간당하게 도착할 시간이 되고 나서야 설희는 눈을 떴다. 그것도 은우의 노크로.
그게 아니었다면 깜빡, 10시까지 잠들 뻔했다.
“내가 못살지…….”
전날.
옥 선생의 벗은 반신을 보고 말았다. 안 그래도 전에부터 그와 부딪치면 심장이 뛰어서 미칠 것 같았는데, 그 단단한 몸을 실제로 눈에 담으니 흰자에 핏줄이 섰다.
그 이후, 은우와 간단한 산책길을 나섰지만.
오히려 흥분은 식을 줄을 모르고 자꾸만 그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기만 했다.
“어휴, 이놈의 음란 마귀.”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좀 잠이 들 만하면, 은우가 속삭였던 말이 귓가를 흔들었다.
“좋아하는 여자 옆에 두고 가만히 놔둘 정도로 신사적인 남자는 아니거든.”
“네……?”
“그러니까 얼른 도망가요, 덮치기 전에.”
덮친다는 게 그런 의미 맞겠지?
그렇다는 건…….
“하아. 미쳤나 봐.”
옥 선생님도 지금 나처럼 잠이 오지 않을까? 아니면 나만 이런 걸까.
그런 바보 같은 고민을 한참을 반복하다가 겨우 잠이 든 것은 새벽 3시가 넘어서였다. 그러니 눈이 퀭해져 화장을 했는데도 피곤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
“피곤한가 보네요.”
학회가 열리는 호텔로 가는 길.
은우의 말에 설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잠을 못 자서.”
“왜요?”
“아, 긴장…….긴장이 돼서요. 한 번도 학회라는 데를 가보지 않아서.”
설마 당신 나체를 봐서 내가 잠을 못 잤다고는 말할 수 없어 설희는 어색한 변명을 했다.
“별거 아니에요. 오늘 설희 씨는 그냥 강연 듣는다 생각하면 됩니다.”
“수의사 아닌 사람도 들을 수 있나요?”
“네. 등록을 해놨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학회가 열리는 장소에 도착을 했다.
생각보다 학회장은 넓었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접수처로 가서 등록 확인받죠.”
“아, 네.”
그렇게 걸어가는데,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은우에게 인사를 했다.
“어, 옥은우. 오랜만이다.”
“아, 오랜만이에요. 선배.”
대학 때부터 알던 사람들인지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아는 사람이 많구나.
학회라는 곳을 처음 왔고, 더더군다나 수의학회 따위는 처음인 설희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때, 회장 안으로 세련된 여자 한 명이 들어섰다.
설희는 키가 작고, 올망졸망한, 좋게 말하면 귀여운 스타일인데 그녀는 걸어가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바라볼 정도로 우아한 미인이었다. 머리를 살짝 틀어 올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은우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빛내며 뛰어놨다.
“은우 오빠.”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 날씬하고 긴 팔이 은우의 팔을 끼웠다. 다정하게 기대며 미인이 웃었다.
“오늘 온다고 말하지 그랬어.”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