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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위험한 밤 (48/80)


48화. 위험한 밤
2023.04.15.


은우의 말에 이현이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형, 바뀌었네요.”

“…….”

“예전엔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이현의 입에서는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처음, 은우를 만났을 때는 이현의 눈에 옥은우는 정말 차가워 보였다. 서늘하고도 주변에 관심이 없는 사람. 그게 이현의 안에서 은우의 이미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뭐든 잘하고,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사람이랄까.

한때, 자신과 너무나 다른 그를 동경했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이현은 그를 잘 따랐고, 은우를 설득해 같이 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이현의 여자친구, 세나가 은우를 좋아하기 이전까지의 일이었다.


“세나가 형 좋아할 때까지만 해도 연애 같은 거, 귀찮다고 했잖아요.”

세나를 생각하니 이현은 다시 한번 목구멍까지 화가 치밀어올랐다. 4년을 넘게 사귄 여자친구, 윤세나. 은우를 동경하던 이현은 그와 같이 살기 시작했고, 자주 세나가 자취방에 놀러 오면서 세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나 자신이 좋아하던 그녀가 은우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이현을 후벼 판 것은 은우의 반응이었다.
 


“윤세나? 아무 생각 없는데……. 곤란하네.”

 
세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표정 변화 하나 없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냥, 곤란하다고.

그렇게 대화를 마쳤던 옥은우.

그때 그랬던 은우가, 지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유설희라는 이름이 나오기만 해도 날을 세우고 인상을 쓴다. 제가 모르던 은우의 한 조각이었다. 이현이 말을 이었다.


“선배 연애 같은 거, 여자 같은 거 귀찮아했잖아요.”

“그건.”

이현의 말에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책을 탁 덮었다.


“유설희 씨는 그냥 연애도, 그냥 여자도 아니니까.”

그를 놀려주려 했던 이현의 입이 단호한 은우의 말에 닫혔다.


“그러니까 달라. 그러니까 평소의 나를 생각하고 덤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세상에 관심 없고, 늘 일과 공부에만 집중하던 남자의 눈에서 번쩍 안광이 빛났다. 그 모습에 순간, 이현은 말을 잃었다.

***


 
오늘도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채린은 다음 있을 진료를 위해 비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진찰실에 이현이 들어왔다.


“제길, 멋있는 척하기는.”

뭐라고 욕을 중얼거리는 것 같다. 이현이 거친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들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라고 채린은 추측하고 있었으니까. 이현이 방으로 들어오면서 거친 말을 하다가 채린이 있는 것을 보고 문득 멈췄다.


“아.”

채린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어요?”

“뭘요?”

“내가 말한 거.”

“뭐 말씀하셨는데요?”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짓는다. 괜히 들었다고 할 필요도 없고 그래봤자 좋은 것도 없다. 채린은 어린 나이치고는 오랜 사회생활로 능숙한 면이 있었다.

이현은 괜히 건드리기 싫은, 싸한 부분이 있었다. 천연덕스러운 채린의 연기에 이현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뭘 더 물어봐주길 원하는 눈치인데, 귀찮다.


“네에. 알겠습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고는 채린은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한참 일을 하다 보니 이현이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은 네, 네, 하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도저히 흘려들을 수는 없는 이야기를 그가 꺼냈다.


“근데 채린 씨, 서교동 살아요?”

“네?”

채린이 바삐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현의 앞에서 자신이 사는 곳을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은 서교동에 사는 걸 알고 있었으니,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 네에. 뭐, 그렇죠.”

채린의 반응이 뜨뜻미지근 하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서교동 청과빌딩 뒤에 사는 거 아니에요?”

“……네?”

“나 거기 근처에서 예전에 인턴 했었거든요.”

이상했다. 채린이 서교동으로 이사 간 것은 2년 전 일로, 서교동이라는 것 이외에는 오래 알고 지냈던 병원 식구들조차 자세한 주소까지는 알지 못했다. 도대체 청과빌딩 근처에 사는 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러세요? 근데, 제 주소는 어떻게 아셨어요.”

“직원 파일에 적혀 있던데요.”

“왜…….”

직원 파일의 자신의 주소를 확인한 것인가. 이현을 쳐다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선선히 말해줄 사람은 아니었다.

찜찜하긴 했지만.

***

퇴근하고 난 밤. 9시.

채린이 사는 곳은 서교동의 작은 원룸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여 누구의 도움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

자신이 오롯이 모은 돈으로 빌려야 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1층이었지만, 제가 제 손으로 마련한 곳이었다. 보안 등이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그래도 들어가 앉아 있으면 아늑하고 좋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이현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인가. 오늘 시종일관 이상하게 채린은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일 거야.

고개를 젓고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는 그때.

집 한편에서 위화감이 들었다. 불투명창이라 실루엣만 보였지만 집 바로 밖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사람인가 싶었는데, 미동이 없다. 그저 그 자리에서 마치 창문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림자가 움직였다.


“누구, 세요?”

채린의 목소리에 남자의 몸이 움직였다. 이현인가?

아니, 옆 실루엣을 보니 꽤 뚱뚱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현은 아니다.

이현이어도 문제였지만,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인 거니 더욱 무서웠다. 왜 움직이지 않고 여기 있을까. 이사 온 지 한참이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1층에 얻지 말걸.

이제 와 후회해봐도 늦은 노릇이었다. 경찰에 전화해볼까. 하지만 낯선 남자가 길에 서 있는 것만으로 신고한다고 와주기나 할까. 그럼 누구에게 연락하지.

핸드폰을 켰지만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채린의 가족들은 연락하지 않은 지 오래됐고, 이 시간에 선뜻 와줄 만한 사람도 생각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먼저 그 이름을 눌렀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다정한 목소리가 채린의 귓가에 닿았다.


-괜찮아요? 지금 집 앞이에요.

“네, 괜찮아요. 근데 아직 있어요.”

채린이 전화를 건 것은 진호였다. 은우가 채린에게 소개시켜준, 원더풀랜드의 수의사 진호. 왜 그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와 만나지 않은 지 이 주도 넘었는데. 그것도 마지막 만남이 썩 유쾌하지 않은, 그에게 그만 보자고 한 만남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왜 연락했을까. 후회해도 이미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죄송해요, 진호 씨.”

 
전화 걸자마자 사과를 한 채린이 무언가 이상했는지, 진호가 단박에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음, 그게…….”


-말해봐요. 무슨 일이에요.

 
차분히 설득하는 진호에게 결국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차를 타고 날아오듯 빠르게 날아왔다. 말릴 새도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진호가 말했다.


-누군지 보이네요. 60대쯤 된 아저씨인데. 아는 사람일까요.

“아닐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은 몰라요. 서울에 아는 60대는…….”

원장 선생님은 60대였지만 여기 올 리도 만무했고, 진호도 아는 사이였다.


-좋아요. 제가 말 걸어볼게요.

“위험하면 어쩌죠.”

-괜찮아요. 그 정도 준비는 하고 왔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진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

전화를 끊고, 진호는 채린이 알려준 건물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원룸 건물이었는데, 채린이 말했듯 채린의 방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허름한 차림새의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였다. 저벅저벅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왜 거기 서 있습니까?”

“어, 엇?”

진호는 원래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유도를 한, 단단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바로 곁에 서자, 남자의 몸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늘어졌다. 남자가 몸을 움츠렸다.


“그, 왜요. 길에 내가 서 있는 건데. 당신이 전세 냈어?”

“우리 집인데, 왜 우리 집 앞에 서 있냐고.”

“우리 집?”

남자가 진호의 말에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우리 집일 리가 없는데.’ 뜻밖이라는 얼굴에 진호가 위협하듯, 얼굴을 기울였다. 험악한 진호의 표정에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여기 당신이 살 리가…… 거짓말하지 마.”

“우리 집이야. 내가 내 집이라는 데 왜 당신이 의문을 가지지.”

“하지만.”

“하지만?”

그의 말을 복기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채린이 자신에게 연락하기 잘했다. 남자는 그냥 지나가다가 멈춰 선 게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선 것이었다.

진호의 위협적인 말에 남자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다가, “아무것도 아닙니다.”하고 결국 몸을 돌리고 멀어졌다.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진호는 채린이 이미 알려준 번호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의 가장 안쪽에서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채린이 모서리에 서 있었다.


“진호…… 씨?”

“네, 나예요. 괜찮아요?”

두려움에 찬 얼굴이었던 채린은 진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심한 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 다행이다.”

“괜찮아요?”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무슨 일 당한 거 아니죠?”

“괜, 괜찮아요. 긴장이 풀려서.”

한참 색색거리며 숨을 고르던 여자는 눈을 위로 추어뜨며 말했다.


“괜히 죄송해요.”

“아니에요. 전화하기 잘했어요. 아무래도 그 남자는 이상했어요. 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아.”

“아. 그래요?”

“네. 내가 이 집에 산다니 당신이 사는 집이 아닐 거라고 하더라고요.”

채린은 그 말에 놀랐는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진호가 이마를 쓸어올렸다.


“어쩐다. 혹시 갈 친구나 본가 있어요?”

“본가는 한참 멀고, 친구는 없어요.”

“음.”

그가 곤란하다는 듯 낮은 소리를 냈다. 곤란하다는 듯한 그의 말에 채린은 무언가, 창피해졌다.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말에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하긴,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는 만날 수 없다고 해놓고는 이렇게 뻔뻔하게 전화하다니.

그러나 위기 상황에 몰리니, 다른 사람이 아닌 그냥 진호 얼굴이 떠올랐다. 그라면 아무 말 안 하고 달려와줄 것 같았다. 그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진호가 손을 들어 턱을 쓸어내리면서 생각에 빠졌다.


“어쩐다. 여기서 밤을 보내면 위험할 것 같은데. 또 돌아올 수도 있고. 여기서 같이 밤을 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아.”

진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호텔로 가겠습니까?”

그의 말에 채린이 살짝, 눈썹을 추어올렸다.

뭐? 호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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