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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가만 안 둬 (47/80)


47화. 가만 안 둬
2023.04.11.


설희는 어떨 때는 하고 싶은 말을 명확히 하지만, 어떨 때는 그 속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싫어하나 싶다가도, 또 저를 보고 쑥스러워하고.

계속 알아가면 알수록 어려운 게 유설희였다.

그러나 이제는 좀 유설희라는 여자에 대해 알 것 같았다.

설희는 먹는 것을 좋아한다.

햄스터처럼, 입에 음식을 넣고 오랜 시간을 꼭꼭 씹는다. 초코파이라도 하나 주면, 그걸 가지고 두 손에 들고 한입 깨물고, 오물오물, 다시 한입 깨물고 오물오물 먹는다.

꼭꼭 씹어 먹고는 초코파이 봉투를 작게 접어 쪽지 모양을 한 다음, 반짝이는 눈망울로 쓰레기통을 본 다음, 포장지를 손가락 끝으로 톡 튕겨 쓰레기통에 넣어버린다.

단것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이 고기다. 점심시간에 도시락 전문점에서 음식을 사다 먹을 때는 꼭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다.

고기고기 도시락, 제육볶음 도시락, 마요치킨 도시락, 돈가스 도시락…… 고기 없으면 도시락을 안 먹는다. 한 번, 최 선생이 채소가득 비빔밥이라는 도시락을 사오자, 설희 씨는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최 선생을 계속 쳐다보았다.
 


“채소가득…… 고기는 없는 건가요?”


“응, 이건 그냥 나물이랑 생채소만 들은 거예요.”


“그럼…… 무슨 맛으로 먹어요?”

 
정말 신기하다는 듯, 살짝 인상까지 쓰고 있는 설희 씨를 보며 은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조차 웃음을 참느라 고생하고 있다. 심지어, 가장 어린 채린 씨조차 설희 씨의 그런 모습에는 가끔“귀엽다”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먹을 거는 잘 알고 좋아하는 것도 많고, 흥미를 가지는 것도 많은 유설희 씨는 특히나 연애를 모르는 게 틀림없다.

연애라는 것이 세상에 꼭 필요한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던 은우보다도 더 둔감한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발자국 다가가면, 두 발자국 도망가곤 했다.


“이번에는 도망가게 내버려둘 수 없어.”

자신을 피해 숨어버리는 설희를 보고, 은우는 입술을 비틀었다. 쑥스러워서든, 어떤 이유에서건 그녀가 더 멀어지는 걸 참을 수 없다.

그러다가 문득, 곧 다른 사람들 출근 시간이란 것을 발견하고 은우는 바삐 자리에 앉았다.


“그보다 지금은 다른 데 신경 쓸 때지.”

오늘은 확인할 것이 있어 빨리 나왔다.

컴퓨터를 켜고, 전날 있었던 병원의 차트를 연다. 차트 작성자, 최이현. 이라고 써져 있는 차트를 전부 다 확인해야 했다.

이현은 예전부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학교에 있을 때도 사고를 많이 쳤고, 졸업하고 나서는 같이 일하지는 않았지만.

전주에서 그와 같이 일했던 선배에게 전화하여 물어보니 한 줄로 이렇게 표현했다.
 


“환자들에게 인기는 많아. 말도 잘하고, 설명도 잘하고. 근데 그게 끝이야. 내가 보기엔 일을 설렁설렁해. 걔 언제 일 한번 칠 거야.”

 
그러니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문제가 없는지. 그래서 매일 아침 은우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동물병원에 나와 차트를 확인했다.


“최악이군.”

역시나 차트는 볼 게 없을 정도로 대충 적혀 있었다.


“하…….”

은우는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잡았다. 이현은 은우의 후배였다. 같은 연구실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사이가 꽤 좋았던.

심지어 2년 정도는 같이 자취방을 썼을 정도였다.

그런 그들의 사이가 비틀어진 것은, 본과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이현의 여자친구, 세나.

이현과 동기인 그녀는 긴 생머리에 차분한 이미지, 그리고 전형적인 미인상으로 학과 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마찬가지로 인기가 많았던 이현과 오랫동안 사귀었다.

이현과 은우가 같이 살고 나서 세나는 꽤 자주 자취방에 놀러 왔다.
 


“오빠, 안녕하세요.”


“응, 그래 안녕.”


“같이 밥 먹어요. 제가 떡볶이 사 왔거든요.”

 
생글생글 웃으며, 세나는 셋이 같이 식사하자고 청하곤 했다.

은우는 욕심이 많았다.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았고, 연구실에서 교수님의 연구를 돕기에 바빴다. 일 아닌 것에 관심을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다른 여자도 아니고 후배의 여자친구에 대해 별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 좋아해요.”

 
생각지도 못한 폭탄이 은우에게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너, 이현이랑 사귀지 않았어?”


“맞아요. 근데 그래도 오빠가 좋아요. 어쩔 수가 없어요. 저도 이현이가 상처받을 것을 알지만…….”

 
곤란하다. 정말로 곤란한 일이었다.

은우는 세나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품은 적도 없었고, 연애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했는데.
 


“형이 꼬신 거죠? 세나가 얼마나 착한 앤데, 형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랬을 리가 없어요. 집안을 내세워서 세나를 유혹한 거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현이 비뚤어진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현은 은우를 미워하게 되었고, 집을 나갔다.

거기까지는 그래, 그렇다고 치는데.

학생 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세나의 마음은 곤란했고, 친한 후배였던 이현과 멀어진 것은 뼈아팠지만.

그러나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은우는 교수님의 연구를 서포트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바이러스를 제어하는 기존의 약물을 찾는 연구로, 마우스 100마리와 30마리의 토끼를 가지고 실험하고 있었다.

사람에게는 감염되지 않는 바이러스였지만, 외부에 퍼지지 않기 위해서 음압 격리 실험실에서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환기 시스템이 꺼졌다. 8개월간 진행한 실험의 막바지였다. 실험실의 특징상, 환기 시스템이 꺼지면 공기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우스 100마리와, 30마리의 토끼는 그렇게 질식해서 다 죽었다. 모두 폐사 처리.
 


“말도 안 돼. 보조 전력까지 다 있는데? 누가 일부러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출입 기록을 확인하고, 결국 찾아낸 범인은 이현이었다.

은우에게 홧김에 저지른 일이라고 했다.

고작 그런 이유였다.

고작.

***


 
며칠 뒤.

돌마래 동물병원에 잘 보기 힘든, 어려운 케이스의 고양이가 왔다.

신우신염으로 의심되던 고양이는 그러나 특징적인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세한 정밀 검사가 요구됐는데, 정밀 검사를 하겠다고 하니 보호자가 돌아가 버렸다.
 


“초음파랑 뇨검사요? 피검사도 해야 할지 모른다고요?”


“네, 지금 상황에서는 필요해 보입니다.”


“그냥 약만 타러 온 건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요. 좀 쉬면 낫지 않을까요?”


“지금 상황에서는 쉬는 걸로는 낫기 어렵습니다.”


“과잉 검사 말고, 치료해주시든지, 아니면 돌아가겠습니다.”

 
아까 들었던 보호자의 말을 생각하며 은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아.”

이런 케이스는 난감하다.

자세한 검사를 하지 않고, 치료 먼저 요구하는 케이스였다. 검사에는 돈이 들지 않냐며, 검사하겠다면 돌아가겠다고 한사코 우겨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병이 가벼운 경우에는 치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서 상황을 지켜봐도 되지만, 저렇게 하루 이틀도 넘기기 어려운 경우에는 검사가 꼭 필요한데.

그래도 돈이 덜 드는 다른 검사를 제안해볼 걸 그랬나. 아니면, 우선 약을 써보자고 할 걸 그랬나.


“어떤 게 좋았을까.”

한숨을 내쉬며 팔랑팔랑, 교과서를 읽고 있는 은우의 앞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설희 씨?

어두웠던 마음에 한 줄 빛이 비춘 것처럼 반가운 마음에 눈을 들자, 그곳에는 이현이 서 있었다. 비뚜름한 자세로 그가 굽어봤다.


“형, 뭐 봐요?”

은우는 그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업무적으로는 일을 대강 대충하는 그의 성격도 걸렸고, 사적으로는 그가 설희 주변을 뱅글뱅글 돌아 거슬렸다.

은우가 고개를 기울이고 눈살을 찌푸렸다.


“최이현 선생. 뭐 필요한 거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입술을 실룩이며 다가오는 이현이 귀찮았다.


“근데 왜 왔어?”

“오면 안 되나요? 지금 환자 없어서 선배하고 대화 좀 하려고 온 건데.”

“넌 할 일 없어도 난 공부해야 하니까.”

좀 가줄래.

굳이 문장을 다 말하지 않아도 다 느껴지도록 이야기를 하자, 이현이 쌜쭉 웃었다.


“차갑네.”

그러나 그런 말에도 은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괜히 말 더 섞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현은 사이가 비틀어지고 난 후, 이렇게 은우에게 시비를 걸었다.


“형은 아직도 그 옛날에 내가 저지른 실수 하나 때문에 아직도 이렇게 나한테 대해요?”

옛날에 그가 저지른 실수 하나.

아주 가볍게 말하는 이현이 싫어서 입술을 깨물었다. 피내음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렇게 사람한테 담쌓고 살아서…… 아직도 사람들이랑 잘 못 지내지 않아요? 그 설희 씨인가 뭔가 하는 직원도…….”

그 입에 설희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도 싫어서 은우는 눈을 치켜떴다. 그 모습을 보고 이현이 재밌다는 듯 킥킥 웃었다.


“별로 형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던데.”

이현은 예전부터 여우, 아니 뱀 같은 구석이 있었다.

일은 묘하게 대충하면서도 말재간이 좋아 스윽 빠져나간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런 그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 은우가 그를 싫어하는 것은 그의 말대로 너무 과잉 대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꺼림직했다. 특히 설희를 입에 올리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말을 잘하는 거야 재능이라지만, 제 일도 제대로 안 하는 인간에게 저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유설희 씨가 나를 싫어하건 말건, 네가 무슨 상관이지?”

툭 치는 은우의 반응에 드디어 재미가 있다는 듯, 이현이 싱글거렸다.


“상관있죠.”

이현이 잠시 고개를 까닥이다가 말을 이었다.


“유설희 씨. 그 직원 좀 귀엽더라고요.”

“그래서.”

“뭐, 그래서라기보단 그냥.”

은우가 원하던 대로 반응을 터뜨려주지 않자, 이현이 말을 이었다.


“한번 접근해 볼까 해서.”

“하.”

피곤하네, 정말.

그가 또 설희 근처에 가서 깐족거리는 걸 보는 것도 싫었고, 설희가 그것 때문에 또 힘들어하는 것도 싫었다. 전날, 자신을 마주치고 난감해하던 그녀의 표정이 떠올랐다.

여기서 자신이 이현에게 왈가왈부하면 필시 귀찮은 일이 많아지겠지만.

기왕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거라면 유설희 씨가 아니라 나한테 생기는 게 좋겠다. 은우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 마.”

“왜요?”

“내가 싫으니까.”

그 말에 이현이 재밌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은우를 바라보았다.


“형이 싫다면 내가 하지 말아야 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유설희 씨…….”

이런 말을 내가 내뱉을 줄은 몰랐다. 몰랐는데, 최이현 이 자식 때문에. 이를 악물고 말을 뱉었다.


“그 사람, 내 거야. 그러니까 건들지 마.”

은우의 얼굴에 아주 오랫동안 써져 있던 가면이 쨍, 하고 깨졌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으므로.


“…….”

“귀찮게 하거나 힘들게 하면, 내가 가만 안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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