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참지 말아요.
(46/80)
46화. 참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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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참지 말아요.
2023.04.08.
설희가 그를 부르자, 은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근사한 목 근육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녀는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인내심 있게 은우는 그저 설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만히 기다렸다.
말해야 했다. 손에 들고 있던 모든 패를 까서 보여준 옥 선생처럼, 자신도 모든 패를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이상하게요.”
“…….”
“선생님이랑 이렇게 둘이 있으면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 같아요.”
은우의 눈썹이 바싹 올라갔다.
“당신이 나를 끌어안을 때마다, 달콤한 말을 할 때마다, 떨리고 긴장이 됩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닿아 있는 그의 손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을 못 했어요.”
설희는 팔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제 손과는 다른 단단하고 큰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다.
“지금도 이렇게 닿아 있으니 심장이 파들거려요. 느껴지세요?”
“설희 씨.”
“옥 선생님만 유치해지는 거 아니에요. 저도…….”
전 남친, 찬정과 연애할 때는 친구 같았다. 손을 잡아도 가슴이 파들거린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안정되고 편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달랐다.
“저도 옥 선생님이랑 있으면 달라져요.”
“하…….”
그가 깊고 긴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그 숨결이 뜨거운지 뺨을 간지럽혔다.
“진심입니까?”
“……네. 전…… 거짓말 안 해요.”
그 말에 은우의 입꼬리가 비쭉 올라갔다. 얼마 전, 환견에게 손가락을 물렸을 때 뻔뻔하게도 옥 선생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또 옛날 일을 떠올릴 게 뭐람.
그래, 나도 거짓말, 하지, 하는데.
“그러니까. 이런 일에 대해서는 거짓말 안 한다는 의미에요.”
“안 할 거 알아요.”
그가 붉은 입술로 느른하게 읊조렸다.
“아는데, 한번 놀려본 거예요.”
“아.”
사람이 얼마나 긴장하고 한 말인데, 이 순간에 날 놀리다니.
설희의 눈이 바싹 위로 올라갔다. 화가 나서, 조금 전까지 설렘을 담고 있던 입술이 단단히 굳었다.
그러나 분노도 잠시.
“놀려서 미안.”
“…….”
“미안해요. 설희 씨가 그런 말 하면, 난 좀 참을 수가 없어져서.”
“뭘요?”
뭘 참을 수가 없다는 말인가.
놀리려는 욕망? 아니면.
설희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숙여 의자에 앉아있는 설희에게 더욱더 가까이 다가왔다.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입술이 반쯤 벌어지고, 그가 그녀의 입술을 시선으로 탐했다.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잡혔다.
“뭘 참을 수 없냐면…….”
그가 그 자신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안 그래도 붉은 입술이 더 붉어졌다.
“이런 짓을.”
그리고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작은 창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불빛에 은우의 눈이 번쩍였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것 같은 짐승의 눈빛.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고 싶지 않았다.
곧, 뜨거운 숨결이 섞이고 그의 입술이 자신의 것에 닿았다.
“흡.”
뜨거워.
지난번, 골목길에서 했던 키스는 전혀 예상도 못 한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그의 앞에 선다고 가슴이 떨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가슴 떨림보다 놀라움이 더 강했던 그때의 키스와는 달리, 지금은.
미치겠어.
그의 입술이 천천히 설희의 것을 머금었다. 부드럽게, 따뜻하게. 거칠지 않고 마치 솜사탕을 녹여 먹듯 살살 굴리는 그의 감촉에 설희의 몸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반쯤 감고, 손을 뻗어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의 손이 그녀를 오히려 끌어당긴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지금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 그의 심장인지, 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눈앞이 팽글팽글 돌았다.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발끝이 비쭉 섰다. 오른손으로는 그의 팔뚝을, 왼손으로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하아.”
입술과 입술이 떨어질 때, 달뜬 숨이 튀어나왔다. 입술이 농밀한 접촉으로 젖었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설희의 입술을 문질렀다.
“미안해.”
“…….”
“정식으로 사귀기 전 까진 이런 일 안 하겠다고 했는데.”
“…….”
“정말 미안해. 참지 못해서.”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하나도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후회 따위는 섞여 있지 않았다.
설희는 몸을 기울여 그에게 더 다가왔다. 뺨을 스치고 다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참을 필요 없어요.”
사그락사그락, 설희의 입술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좁은 창고 안에서, 그와 단둘이 있어서 이 열기가 그저 설희를 둥실 떠오르게 했다.
그래서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속삭였다.
“참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
“참지 말아요, 우리.”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은우는 입술을 비틀었다. 아주 오랫동안 참아왔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그러나 설희가 참지 말라고 속삭이는 지금, 은우의 신경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툭, 하고 무언가가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욕망에 달렸다.
아주 빠르게.
평소에는 차갑고 냉정하고 이성적인 옥은우.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상의 모습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작은 창고 안에서, 그는 설희의 몸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크고, 단단하고, 뜨거운 그의 손.
짐승이 먹잇감을 탐하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뜨겁게 그녀를 헤쳤다.
은우의 손이 설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럴 때마다 두피에 손끝이 닿아 저릿저릿 몸이 달아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삐쭉, 치켜세웠다.
평소와 다른 것은 은우만은 아니었다. 설희 역시, 좀 더 그에게 다가가려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점점 더 뜨겁게 겹친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군지 조차 다 잊고 그저 앞에 있는 남자만을 바라보았다. 마치 사춘기 소녀처럼 들떠서 그에게 매달렸다.
“설희 씨.”
설희는 제 이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눈이 오는 날이 싫었는데, 눈처럼 차갑고 서늘한 이름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은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설희의 이름은 더없이 뜨겁고도 녹진했다.
“선생님, 저.”
그에게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젖은 입술로 속삭이는데, 은우가 비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 선생님이란 말, 듣기 싫어.”
“…….”
“당신이 나에게 선을 긋는 것 같아서, 그래서 싫어.”
그럼 무어라 부르지. 옥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안 부르면.
“이름 불러요.”
“…….”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았다. 그러니 그냥 은우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씨’를 붙여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혼란스러워하는 도중, 이질적인 음이 귓가에 울렸다.
끼익.
무슨 소리지? 화들짝 놀라 고개를 기울여 소리가 난 쪽으로 바라보자, 그곳에는 창고의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매니저가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눈이 딱 마주쳤다.
설마 옥 선생이랑 키스하는 것을 봤을까. 혹시 너무 어두워서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실낱같은 기대를 했지만.
“어…… 저기.”
매니저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평소의 그녀와는 너무 달랐다.
“그, 설희 씨가 마시멜로 용 꼬치 가지러 왔다가 너무 안 오길래,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하하. 하하, 근데 아무 일도 없었네요. 하하, 괜히 왔네.”
“…….”
“난 아아아아아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설희 씨랑 옥 선생님이랑 있는 것도 못 본 거에요. 정말 아무것도 무엇도 보지 못했어요, 아휴, 왜 이렇게 덥지. 여름이긴, 여름이다, 그죠?”
봤네, 봤어.
매니저가 평소에도 말이 많은 타입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수다스럽진 않았다. 그녀의 길게 늘어진 말만 봐도 본 게 확실했다.
“전 먼저 갈 테니 걱정 마시고 천천히 오세요. 정말 천천히 와요, 알았죠? 하하하.”
매니저는 손을 휘젓고는 문을 꽉 닫고 갔다. 아주 꽉.
***
“어떻게 해.”
그날 일을 생각만 해도 설희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늘도 진료 시간 전 환복을 하다가, 문득 제 입술을 덮치는 은우를 생각하고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감싸고 흘러내렸지만, 잊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미쳤나 봐, 나도 정말. 제정신이야?”
사귀지도 않는 남자랑. 외삼촌의 별장 창고에서 키스를 했다. 그냥 한 정도가 아니었다.
“참을 필요 없어요.”
사그락사그락, 설희의 입술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좁은 창고 안에서, 그와 단둘이 있어서 이 열기가 그저 설희를 둥실 떠오르게 했다.
그래서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속삭였다.
“참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
“참지 말아요, 우리.”
다시 생각해도 자신이 한 말은 끔찍하다. 아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아무리 창고 안에는 둘 뿐이었어도, 바깥에는 병원 식구들이 다 있었다.
“미쳤냐고.”
어디서 유혹질이야, 어? 이게 다 옥 선생님 때문이다. 사람이, 어? 그렇게 잘생겨서 다정한 말을 퍼부으면 내가 안 넘어가게 생겼냐고.
미친 사람처럼 이렇게, 저렇게 계속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뒤에서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가 들어오다가 설희를 보고 환히 웃었다.
“설희 씨,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설희는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때의 사건을 생각하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혹시 자신의 생각이 매니저에게 들킬까 봐 서둘러 눈을 피했다.
“저, 나가서 청소 좀 먼저 시작하고 있을게요.”
“응, 그래요.”
그날 이후 매니저는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설희는 그렇지가 못했다. 매니저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한 것처럼 떳떳하지가 못했다.
그리고…….
“설희 씨,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밖으로 나가보자, 오늘도 일찍 출근한 은우가 인사를 까딱했다. 밝은 아침 햇살에 잡티 하나 없는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가 반짝인다. 날카로운 콧날에, 부드러운 입술…….
입술…….
그만 보자.
설희는 고개를 숙이고는 얼른 뒤쪽으로 갔다.
그날 이후, 매니저는 물론이고 은우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뛰고, 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키스를 애달프게 갈구했던 자신이 창피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정말.”
은우가 싫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오히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 눈뜬 감정에 설희는 이리저리 휘청이고 있었다.
***
“……귀엽네.”
은우는 출근하자마자 만난 설희가 귓등을 붉게 붉히고는 인사도 못 하고 허둥지둥대는 것을 보고 웃어버렸다.
한동안 유설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대충 알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