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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나쁜 여자 (42/80)


42화. 나쁜 여자
2023.03.25.


잠에 깊게 빠진 듯, 그녀는“으음…….”하는 소리만 낼 뿐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얄미웠다.

키스도 했다. 고백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잔다는 것은 결국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은우가 도대체 눈앞의 설희를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는 찰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방 안에서 곰곰이가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곰곰아, 나왔어?”

퍼그 곰곰이는, 은우의 말에 고개를 들고 멍하니 은우를 쳐다보았다. 위험한 것이 없는지, 여기는 어디인지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은우를 바라보았다. 손을 내밀어 곰곰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곰곰이를 안아 올렸다.


“괜찮아졌어?”

“끼잉.”

곰곰이를 안고, 부엌 쪽으로 가는 동안에도 설희는 깨지 않았다.

곰곰이에게 밥과 물을 주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자는 설희가 걱정되어 그녀의 이름을 불러봤다.


“유설희 씨.”

그러나 설희는 미동도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은우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설희를 들어 올렸다. 작은 설희의 몸이 키가 큰 은우의 두 팔에 쏙 안겼다.

지금 눈을 뜨면 또 화를 내고 난리를 치겠지. 하지만 바닥에서 잠들어 버린 사람이 나쁜 거야.

그녀를 들고 저벅저벅 걸어 침대 쪽에 살포시 그녀를 내려놨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침대 위에 내려놓고서도 설희는 꼼짝도 안 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리고 은우는 방 밖으로 향했다. 자신을 따라 쫓아오는 곰곰이의 머리를 한번 쓸어주고, 마지막으로 자는 설희의 얼굴을 보고 중얼거렸다.


“잘 자요.”

“…….”

“근데 다음에도 그렇게 내 앞에서 무방비하게 자면, 오늘처럼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야.”

 

***

은우는 설희를 재우고,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설희와 식사도 제대로 못 한 저녁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으려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뭐지? 병원인가?

심드렁한 은우의 눈길이 핸드폰으로 향했다. 화면 위에는 처음 보는 번호가 떠 있었다. 병원도 아니고…… 누구지. 손을 들어 핸드폰을 들어 귀 위에 얹었다.


“여보세요.”

목소리로 대충 대답하자, 전화 건너편에서 익숙하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은우 형.

한 4년은 들은 적 없던 후배의 목소리. 곧 돌마래 동물병원에 오게 되었다는 최이현이었다.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한 은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손바닥으로 이마 위로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래.”

- 잘 있었어요?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다만 그것에는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비틀린 듯한 그의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빈정거리는 목소리.

전화번호를 바꾸었나. 은우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핸드폰 번호와는 달랐다. 이현인 줄 알았다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저냥.”

그러나 이미 받은 마당에 끊을 수도 없었다. 곧 병원으로 올 이현이니 피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 아, 저 돌마래 동물병원 가기로 한 거 들으셨죠?

“그래.”

- 잘 부탁드려요.

마음 같아서는 오지 말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 선생님이 임신 때문에 갑자기 자리를 비워서 아마 사람을 구하는 데 어려웠을 것이다.

원장 선생님이 거의 진료를 보지 않는 지금, 최 선생님까지 없으면 은우 혼자 진료를 보게 된다. 지금 맡고 있는 환견들을 생각해도 그렇게 되면 곤란해졌다.

무엇보다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원장 선생님이지.


“그래.”

- 다음 주에 봬요.

“그래. 다음 주에 봐.”

최소한의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병원 상황이 그래도……


“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돌마래에 있는 것을 최 선생이 제안했을 때 분명 알았을 것이다. 왜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현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려 하는지 알지 못했다.
 


“선배는 최악의 인간이에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이현이 한 말을 떠올렸다. 악의가 가득 스며들어 있던 목소리.

다른 곳에서 기회가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치겠군.”

이 남자만큼은 병원에 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경험이 하나도 없는 신인 수의사를 데리고 오는 한이 있어도 이 남자만큼은 병원에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

옥 선생 기분이 나쁘다.

오늘은 새로 선생님이 오는 날이었다. 새 수의사 선생님은 오후에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침에 출근한 설희의 눈에 어둠이 드리워진 옥 선생이 들어왔다.

완전 저기압이었다.

뭐…… 뭔 일이지.

평소 엄격하고 깍듯한 은우였지만, 기분파는 아니었다. 이유도 없이 저렇게 먹구름을 띄우는 일은 없는데.

처음에 설희가 취업하고 한 한 달 정도는 그녀만 보면 잡아먹을 듯 뭐라 하고, 신경질도 내던 옥 선생이지만…… 그래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

짧은 그의 숨소리에 강아지 똘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까만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그의 눈치를 봤다.

지금은 똘이조차 눈치를 챌 만큼 딱 봐도 완전 뭔가 화가 나 있달까. 옥 선생이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읽다가 또 한숨을 푹 쉬었다. 그 한숨이 얼마나 길고 긴지 진료실 전체에 그의 숨이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설희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그의 표정을 보았다.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혀 있었다. 옥 선생은 교과서를 뒤적거리다가 설희를 바라보았다.


“왜요?”

약간 날이 서 있는 말투. 설희가 잠시 손을 꼭 쥐었다. 말했다가 괜히 혼날까 봐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궁금한 게 우선이지. 결국 눈을 살포시 뜨고 그에게 물었다.


“저어…… 무슨 일 있으세요?”

설희의 말에 옥 선생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살짝 펴졌다.


“아니요.”

“…….”

“내가 뭔가 이상한가?”

말투도 약간 누그러진 상태였다. 다행이다. 뭐 땜에 저렇게 화가 났건, 자신 때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한숨을 쉬시고 화를 내시길래.”

“내가요?”

응, 당신이요.

설희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우가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이 설희를 스쳐 밖으로 향했다. 창문 너머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오늘 날이 흐려서 몸이 찌뿌둥해서 그런가 보네요.”

거짓말.

지난달에는 역대 최고 강한 태풍이 서울을 지나갔다. 병원에 방문하는 개가 준 것은 물론이오, 비가 하루 종일 내려 설희는 온몸이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온몸이 아파요…….”

 
그런 설희를 보고 옥 선생이 웃었다.
 


“비 가지고 몸이 쑤셔요? 설희 씨 영양제 좀 먹여야겠네.”

 
그렇게 말하며 운동으로 단련된 몸을 쭉 늘리며 스트레칭까지 했던 옥 선생이었다. ‘비가 더 와도 시원할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다음 환자를 기다리는 모습이 얄미웠었다.

그 기억이 생생한데, 날이 흐린 정도로 몸이 아프다고? 뭔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설희의 희미한 감으로, 이렇게 은우가 화가 나 있는 것은 오늘 오후 온다는 새로운 선생님 이 원인 같았다. 처음 새 선생님이 온다고 했을 때, 이름을 들었던 옥 선생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었으니까.

최이현 선생. 여자인가? 남자 같기도 하고. 최 선생님 후임이니 여자일 수도 있어.

회식에서 새로운 선생님이 온다는 이야기가 나온 후, 최이현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병원 안에서 화제였다.

어제 점심 식사 때만 해도 그랬다. 밥을 먹던 매니저님이 이야기를 꺼냈다. 매니저님과 설희, 그리고 은우 세 명이 밥을 먹는 자리였다.
 


“그 새로 오는 선생님, 옥 선생님 후배랬죠?”

 
매니저가 말을 꺼내니 옥 선생이 밥을 뜨던 수저를 멈췄다.
 


“네, 뭐.”


“어떤 사람이에요?”

 
그 질문에 옥 선생은 눈을 한번 빙그르르 굴렸다. 옥 선생님이 뭔가 말을 고를 때 하는 버릇이었다.
 


“여우 같달까.”

 
여우.

그때를 떠올리며 설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여자인가? ‘여우 같다.’라고 표현할 정도면.

여자면 혹시 옥 선생의 전 여자친구일 수도 있었다.

옥 선생님 기분이 나쁜 게…… 여우라고 표현한 게, 그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우고 도망갔는데, 병원에 온다고 했더니 깜짝 놀란 거 아니야?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인연의 여인이라든지. 뭐 그런 거 말이야.

그렇게 되면 다시 사랑이 꽃필 수도 있겠지.

전 여자친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설희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심장이 덜렁거렸다.

뭐야 뭐지? 왜 기분이 이렇게 싱숭생숭하지.

설희는 품에 파일을 꼭 안은 채,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옥 선생의 옆모습을 흘깃거렸다. 옥 선생은 기본적으로 까칠하긴 했지만, 기분파는 아니었다.

그런 옥 선생이 이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다니 웬일일까. 괜히 화를 내는 일도 없었고, 감정에 휩쓸리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나를 좋아한다면서도 내가 키스하자고 뛰어들 때 막을 정도로 이성적인 남자인데.

그 장면을 떠올리자, 설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귀에서 김이라도 나올 것처럼 붉어진 설희가 가만히 자리에 서서 옥 선생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옥 선생이 이상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설희를 보았다.


“유설희 씨, 뭐 해요?”

“네…… 네?”

갑자기 자신을 쳐다보는 옥 선생 때문에 놀라 설희가 몽롱한 과거 회상에서 빠져나오자, 그가 그 빨갛고 예쁜 입술로 설희를 꾸짖었다.


“할 일 없어요? 없으면 오토클레이브(고압멸균기) 좀 돌려줄래요?”

“아! 네, 네.”

고개를 돌리면서 서둘러 기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경은 뒤에 서 있는 옥 선생에게 가 있었다.

만약에 여자친구가 오게 된다면…… 어쩌지? 옥 선생님이 나한테 관심이 없어지면.

오토클레이브에 넣을 세척된 수술용 기구들을 정리하면서 설희의 머릿속에서는 점점 망상이 이상한 쪽으로 번져나갔다.

오토클레이브용 봉투에 기구를 넣으면서도 생각은 그쪽으로만 향해 있었다.

그 여자친구였던 최이현 선생이 오고, 옥 선생이 그 여자친구랑 다시 사랑에 빠지는 거지. 그럼 나처럼 별 볼 일 없고 일만 치고 다니는 애는 관심도 없어지겠지? 따지고 보면 우리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설희의 상상은 말릴 새도 없이 뻗어나갔다. 최 선생님이 안 그만두셨으면 옥 선생님 여자친구가 우리 병원에 올 일도 없었을 텐데. 애초에 그 여자는 왜 오는 거지? 전 여친이면 옥 선생님이 여기 있는 거 알면 피해주지, 좀.

최이현 선생님 나쁜 여자네.

소독기계를 돌리는 설희의 입술이 실룩였다.

***


 
최이현이라는 새로 오는 수의사 선생님은, 남자였다. 너무나도 건장한 남자.

심지어 잘생겼고, 키도 컸다.

180을 훌쩍 넘기는 옥 선생님과 거의 비슷한 키였다. 얼굴은 섬세하게 잘생긴 느낌의 옥 선생님과 다르게, 남성적이었다. 굵직굵직하게 잘생긴 느낌. 서양식 미남이랄까.

여자 중에서도 키가 유독 작은 설희는 아래에서 위로 이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봐도 여자로는 안 보이네…….

유치하게, 뭘 생각한 거야! 여자 선생님이 온다는 이야기도 없었고, 설사 여자 선생님이 온다 해도 옥 선생과 관계있다는 보장도 없었는데.

이현이 출근하고 오랜만에 원장 선생님, 외삼촌이 나와 모두에게 설명을 했다.


“여긴 새로 오신 최이현 선생. 이제 5년 차시고, 알아서 워낙 잘하시겠지만, 우리병원은 처음이니 잘 대해주세요. 최 선생님이 그만두시기 전에 많이 알려주시구요.”

하나하나 번갈아 가며 소개를 했다. 설희의 차례가 되어 자기소개를 하자, 이현이 한 발자국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단단하고 손마디가 굵은 손이었다.


“최이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 저두요.”

그렇게 입을 열자, 옆에 서 있던 외삼촌이 싱글벙글 웃었다.


“하하하, 최이현 선생도 잘생겨서 아주 우리 병원을 밝혀줄 것 같네. 우리 병원 직원들은 좋겠네. 옥 선생도 그렇고, 최이현 선생도 미남이니 말이야.”

그 말에 외삼촌을 한번 힐끗 보았다. 또 쓸데없는 말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내가 옥 선생님이랑 사귄다든지 또 그런 말 하면…… 어떻게 하지? 어휴, 외삼촌이 병원에 오는 날이면,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야.

원장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옥 선생의 눈치를 보는 설희를 이현이 바라보며 웃었다.


“흐응…….”

이현의 눈이 설희와 옥 선생의 사이를 왔다 갔다 바쁘게 움직였다. 이현의 입꼬리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재밌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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