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 줄 알고.
(41/80)
41화.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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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 줄 알고.
2023.03.21.
차트를 보던 은우의 시선이 설희에게로 옮겨왔다. 설희가 그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걸레를 꼭 쥐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 때문에 설희는 바닥으로 눈을 떨어뜨렸다.
“유설희 씨.”
“네?”
또 달콤한 말을 하려나 싶어 긴장하던 설희의 귀에는 딱딱한 옥 선생의 핀잔이 꽂혔다.
“왜 진료대 닦다 말고 멍해져 있어요?”
“아니요…….”
설희는 중얼거리다가 마음을 정했다.
옥 선생이 고백한 이상 어정쩡한 상태로 지낼 수는 없었다. 사귀거나, 거절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용기를 내자, 설희야.
설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내뱉었다.
“옥 선생님!”
“네.”
갑자기 설희치고는 큰 소리를 내자, 옥 선생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시간 있으세요? 오늘 아침 일도 있고 하니 제가 맛있는 거 살게요.”
물론 예전에는 은우가 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덥석, 그의 감정을 받아들이기에는 깊이 믿었던 전 남친, 찬정에 대한 상처도 아직 오롯이 남아 있었다. 은우에 대한 감정도 불분명했고. 좀 더 그를 알고 싶다. 설희의 제안에 은우가 미간을 좁혔다.
거절하려나?
너무 갑작스러웠나?
“일하는 도중에 딴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저기, 아직 안 했는데.”
은우가 단단한 손가락으로 먼지가 묻은 곳을 손가락질했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라서 울컥, 화가 났다. 얼마나 용기를 짜내 말한 건데. 설희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런 설희의 모습을 보고 은우가 입술을 비틀었다. 웃음을 참으려는 듯 실룩였다.
“죄송합니다. 잘 닦겠습니다.”
설희가 진료대 위를 박박 닦고 있자, 은우가 다가왔다. 그리고 설희의 앞에 서서 고개를 아래로 비스듬히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먹겠습니까?”
아까 쌀쌀맞게 말한 것이 미웠다. 그저 무시하고 진료대만 닦고 있자 은우의 목소리가 더 달콤해졌다.
“술 마실까요?”
“또 술이요?”
“응, 유설희 씨 술 좋아하잖아요. 어제 보니 그렇던데.”
은우가 던진 농담에 설희의 눈 아래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제 술을 그렇게 진탕 먹고 실수까지 저지른 다음 날이다. 정말 그가 술을 먹자고 할 리가 없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비꼬고 놀리려고 저러는 게 틀림없다.
“옥 선생님, 어제 술 너무 많이 마셨다고 지금 비웃는 거죠?”
“비웃는 건 아니고…….”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설희가 술을 마시고 꼬장 부리고, 그에게 달려들었던 어제 일이 그에게는 좋은 놀림감이리라. 안 그래도 놀리는 걸 좋아하는데.
“됐어요. 한턱 안 낼래요. 내가 미쳤지. 옥 선생님이 뭘 예쁘다고.”
어제 집에 올 때까지 부축해주고, 오늘 아침에 밥까지 해준 은우였다. 전날 거기다가 설희는 억지로 그에게 키스하려고까지 했었다. 미안해서 밥 사려고 했던 건데…… 내 맘도 모르고.
무엇이 그리 좋은지 은우가 또 싱긋 웃었다.
“그래요, 그럼.”
정리할 물품을 들고 몸을 돌리는 설희의 귀를 옥 선생의 목소리가 간지럽혔다.
“설희 씨가 밥 사기 싫으면, 내가 밥 살 테니 오늘 식사하러 가요.”
그 말에 설희가 고개를 돌렸다.
“싫습니다. 바빠요.”
조금 전까지 밥을 먹자고 했으면서 갑자기 바쁘다는 말에 은우가 피식 웃었다.
“밥 먹고 곰곰이 애견 용품도 구경 가요. 아직 물건들 다 안 샀잖아.”
표정이 확확 변하는 설희가 재밌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보며 계속 웃는 은우가 얄미웠다.
더 얄미운 것은 그가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애견 물품을 사러 갔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동물에 대해 더 잘 아는 옥 선생이 같이 가주면 좋기야 하겠지. 그렇지만.
눈가가 곡선을 그리며 얇게 눈을 뜨고 웃는 은우가 얄미웠다.
“싫어요?”
설희의 입술이 실룩이다가 옥 선생을 째려보고 툭 뱉었다.
“대신 고기 먹기예요.”
속이 헛헛해서 고기라도 집어넣고 싶었다.
며칠 뒤. 드디어 곰곰이가 집으로 오게 되었다.
전 주인에게 버림받고 무려 3개월간 병원에서 생활하던 퍼그 곰곰이.
워낙 순하고 착하여 병원 생활도 잘했지만, 때로 그 크고 예쁜 눈을 하고 울 때면, 설희는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영 무거웠었다.
“고생 많았어, 곰곰아. 드디어 드디어 집으로 가네!”
이사도 했고, 가구도 샀고, 옥 선생이랑 같이 애견 용품도 골랐다. 퇴근 시간이 되자, 입원실에 들어간 설희는 쪼그려 앉아 곰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곰곰아! 집에 가게 되니 기쁘지?”
큰 눈을 보고 말을 시켜도, 곰곰이는 설희의 말을 알아 듣는지 못 알아 듣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턱 아래를 살살 긁는다. 곰곰이는 기분이 좋은지, 설희의 손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곰곰이랑 놀고 있는데, 설희의 귓가에 낮고 조용하게 누군가가 속삭였다.
“갈 준비 되었어요?”
귀를 간질거리는 소리에 설희의 몸에 찌릿, 전기가 흘렀다.
“어머.”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에, 쪼그려 앉아 있던 설희는 앞으로 중심이 쏠렸다. 바닥에 손을 콕 대고, 겨우 앞으로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왜 옥 선생님은 걸으실 때 소리가 안 나세요?”
“설희 씨가 못 들은 거예요. 준비됐어요, 안 됐어요?”
“옥 선생님 바쁘시면 먼저 가셔도 되어요.”
“내가 설희 씨 말고 바쁜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리고 은우가 씩 웃었다. 옥 선생님은 저러고 쑥스럽지도 않나. 나 말고는 바쁠 일이 뭐가 있냐니.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눈썹 한 번 떨지 않고 저런 대사를 읊는다. 설희가 마저 뭐라 하기도 전에, 은우가 곰곰이를 안아 들었다.
“집으로 가요.”
우리 집으로.
***
집으로 가는 길, 은우의 차에 탔다. 차 뒷좌석 애견 가방에 곰곰이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차 내에는 부드러운 클래식이 흐르고, 모든 것이 평화롭다. 그래서일까. 설희에게서는 자꾸만 하품이 나왔다.
“으음.”
사실은 어제, 곰곰이가 집에 온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어서 잠이 오질 않았다. 밤늦게까지 곰곰이가 쓸 쿠션을 만지기도 하고, 사온 장난감 포장을 뜯어놓고, 그러고 나서 잠든 것이 새벽 4시였다.
입을 벌리지 않고 설희는 이를 악물고 하품을 참았다.
“오늘 왜 그렇게 조용해요?”
옥 선생이 거는 말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젯밤에 잠을 늦게 자서’라고 하면 무슨 말을 들을지 뻔했다.
“병원 가기 전날, 잠을 늦게 자면 어떻게 합니까?”
하면서 잔소리를 듣겠지. 그래서 별일 아닌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늘 일이 많아서 피곤해서요.”
집에 도착했다.
당연하다는 듯, 같은 건물에 들어가 설희의 집 앞에 다다르자,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옥 선생이 키패드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옥 선생의 행동에, 설희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옥 선생님.”
문을 열고 먼저 집에 들어가는 옥 선생을 설희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네?”
“저희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설희의 말에 옥 선생이 고개를 기울였다.
“전 세입자랑 똑같이 쓰고 있잖아요. 안 바꿨으니 알죠. 그리고, 기억 안 나요? 설희 씨 술 취한 날 내가 데려다줬는데.”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집에 이사 오고 나서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번호 바꾸는 게 좋을 거예요. 전 세입자도 알고, 나도 알고. 또 누가 알지 어떻게 알아요.”
요즘 세상에.
은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은우는 바닥에 살포시 곰곰이가 든 가방을 내려놓았다. 마룻바닥에 설희가 무릎을 꿇고 곰곰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곰곰아, 오느라 힘들었지?”
조심스레 지퍼를 열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곰곰이는 가방 가장 안쪽에 들어가 움직이지 않았다.
“곰곰아? 나와야지.”
설희의 말에도 곰곰이는 몸을 가방 안쪽에서 둥글게 말고는 나오려 하지 않았다. 결국 설희가 손을 집어넣고 어깨를 잡았지만, 곰곰이는 몸에 힘을 잔뜩 주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곰곰아! 나와야지, 집이야!”
“그르르르…….”
설희가 만지자, 오히려 평소답지 않게 곰곰이는 목을 울리면서 싫다는 표시를 확실히 했다.
곰곰이가 왜 이러지?
곰곰이는 주인이 버리고 간 이후에도 사람들을 곧잘 따랐다. 설희에게 이렇게 위협적으로 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설희가 고개를 들어 옥 선생을 바라보았다.
“낯설어서 그래요.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서.”
“그럴 수가…… 그럼 어떻게 해요? 억지로 꺼내요?”
옥 선생이 몸을 숙여 가방 안에 있는 곰곰이를 쳐다보았다.
“가끔 강아지들이 이럴 때가 있어요. 너무 긴장해서 못 나오는 경우. 병원에서는 시간이 없으니 보호자분들이 억지로 꺼낼 때도 있지만…… 안 그래도 곰곰이 긴장했는데, 내버려둬 보죠. 좀 시간이 지나면 나올 거예요.”
옥 선생의 말에 설희가 불안한 듯 입술을 오므렸다. 이사까지 했는데…… 곰곰이가 집을 싫어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혹시…… 병원에서야 사람들이 여러 명 있으니 괜찮았는데, 나랑 사는 건 싫은 게 아닐까?
“곰곰이가 이 집을 싫어하면 어쩌죠?”
“…….”
“아니면 내가 싫으면?”
은우가 다가와 설희의 옆에 앉았다.
“지금 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 벌써 약한 소리예요?”
“하지만…….”
애초에 곰곰이는 다른 개들과 달랐다.
생후 3개월쯤에 새로운 집에 입양되어 어린 시절을 한 주인과 보낼 수 있는 다른 개들과 달리, 이미 성년이 된 나이에서 다른 집에 오게 된 것이다.
집뿐만이 아니다. 엄마가 사라진 거다. 곰곰이 입장에서는 누군지도 모를 사람과 어딘지도 모를 집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가방 안을 바라보았다. 가방 안의 곰곰이는 여전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도, 앞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
처음에 무릎을 꿇고 가방 안을 들여다보던 설희는 점점 몸을 숙여 강아지처럼 바닥에 몸을 낮췄다.
두 손 위에 얼굴을 대고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곰곰이는 그런 설희를 보고 한번 작게 울었을 뿐, 여전히 고집스레 가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설희는 그렇게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은우는 그런 설희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고집이 센 곰곰이 만큼이나 인내심이 강하다. 다리가 저리지도 않은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저러고 곰곰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냥 내버려두고 밥 먹고 오자고 입을 열려던 은우는, 그런 설희가 귀여워서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 시간이 넘어서자, 가끔 곰곰이를 부르던 설희의 목소리도 잦아들었고,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새액, 새액, 울려 퍼지는 소리.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깨가 평온하게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잠든 게 틀림없었다. 몸을 구부려 바닥에 닿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본다. 은우의 예상대로, 두 눈이 꼭 감긴 채, 입을 살짝 벌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피곤했나?
오늘은 병원에 내원한 개가 평소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됐는데.
그래도 퇴근 이후에 피곤했던 모양인지, 작게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이 무방비한 여자 좀 봐라. 아까는 집 문 따고 들어오는 은우를 보고 온몸에 긴장을 하면서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자기 좋아한다는 남자 앞에서 엎드려서 금방 잠드는 순진함.
내가 무슨 일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살짝 톡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