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둘이서 맞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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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둘이서 맞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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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둘이서 맞는 아침
2023.03.18.
더럽지도, 어지럽지도 않았다.
마치 인테리어 잡지에 ‘멋진 싱글남의 솔로하우스’라고 실릴 것 같은 아주 모범적인 공간이었다.
벽지는 흰색에 모든 가구들은 남색이나 어두운 청색으로 배치되었고, 쓰레기장은커녕 손으로 구석을 쓸어도 먼지 한 톨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더럽지…… 않잖아. 털털하다더니.
너무나 깨끗한 방이 이상해 휘둥그레 방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둘러보는 동안, 방 안쪽에서 아주 느긋하게 고양이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옥 선생님, 고양이 키우세요?”
“아아, 네.”
처음 옥 선생의 방에 들어온 어색함을 잊고, 설희가 서둘러 신발을 벗고 고양이에게 달려갔다. 고양이는 그런 설희와 달리 천천히 다가와 설희의 발목에 얼굴을 비벼 댔다.
노란 줄무늬가 귀여운 통통한 고양이. 기분 좋은 듯 눈까지 감으며 그녀의 몸에 얼굴을 가져다 대는 것을 본 옥 선생이 중얼거렸다.
“낯 많이 가리는 녀석인데. 설희 씨가 좋나 보네요.”
“정말요?”
고양이는 아직 강아지에 비해 익숙지 않은데 자신을 좋아한다니 신이 났다.
볼 한가득 잡혀 있는 통통한 살이 귀엽다.
그런데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정상적으로 걷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뒷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접혀 있었다.
“선생님, 이 아이 다리가…….”
“아아.”
별거 아니라는 듯 옥 선생이 읊조렸다.
“새끼 때 차에 치였거든요. 그래서 뒤쪽 다리 하나를 못 씁니다.”
“그렇구나…….”
아팠겠다.
설희가 고양이를 어루만지자, 그런 설희의 마음을 알아줬는지, 고양이가 목에서 그르릉 소리를 냈다.
“고양이 그만 보고 밥 먹어요. 더 꾸물거렸다간 지각하겠어요.”
옥 선생의 말에 아쉬운 듯 고양이를 놓아주고 설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팠다. 다른 사람들은 숙취가 있는 다음 날은 음식을 입에 못 댄다고 하던데, 설희는 술에 취한 다음 날은 더욱더 식욕이 증진해 뭐든 다 먹고 싶어지는 편이었다.
심지어 평소에는 잘 못 먹던 커다란 햄버거조차 아침에 딜리버리로 시켜서 먹는 일도 있었다.
하얗고 예쁜 테이블 위에 육개장과 밥, 갖은 밑반찬이 놓여 있었다.
“저…… 이거 설마 옥 선생님이 만드신 건 아니죠?”
설희가 조심스레 물어보니 그답지 않게 은우가 얼굴을 붉혔다.
“설희 씨 때문에 만든 건 아닙니다. 육개장은 만들어 놓으면 며칠 먹을 수 있어서 그제 만들어 놨던 거예요.”
육개장을 옥 선생이?
전혀 상상이 안 되었다. 육개장을 휘휘 저어보니 안에는 고사리며 대파, 잘게 찢은 고기까지 정성스레 들어 있었다. 설마 이걸 다 손으로 찢어서…
“만든 걸 사 오신 게 아니고요?”
“뭐 하러 사와요. 집에서 만들면 되는데. 어서 먹어요. 식겠다.”
요리는 잘 모르는 설희였지만 모르긴 몰라도 육개장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음식은 아닐 거다.
한입 떠서 입에 넣자, 옥 선생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입에 넣은 육개장은 칼칼하면서도 깊은 육수 맛이 일품이었다.
옥 선생님…… 이상한 사람이야.
요리가 취미라니.
“어때요?”
그답지 않게 목소리에는 긴장이 묻어 있었다.
옥 선생님도 자기가 만든 음식 평가받을 때는 긴장하는구나. 설희는 웃으며 말했다.
“맛있어요. 엄마가 한 육개장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설희의 반응에 그도 안심한 듯, 수저를 들었다. 밥을 떠서 국에 말면서, 설희가 말했다.
“전 요리 하나도 못 하는데, 앞으로 자취 생활이 험난할 것 같아요…….”
그렇게 중얼거리자 옥 선생님이 밥을 꿀꺽 삼키고는 설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
“내가 하면 되죠. 앞으로 매일 우리 집에서 아침밥 먹어요.”
별일도 아니라는 듯, 선선히 그는 그렇게 말했다.
은우의 말에 설희는 눈만 깜빡였다.
프러포즈인가? 왜 그런 거 있잖아. “나랑 매일 밥 같이 먹어요.” 그런 말. 지금 나랑 결혼하자고 하는 건가?
보통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귀지도 않는데, 이제 고백했는데 결혼이라니.
하지만 그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애초에 어제만 해도 외삼촌과 결혼 후 병원 경영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려 설희는 그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설희가 얼굴을 발그레 붉힌 채, 죄 없는 육개장만 휘적휘적거리자 옥 선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그거…… 아침 식사 한다는 거요.”
“아, 괜찮아요. 재료비 안 받을 테니 걱정 말고 와서 먹어요. 어차피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건데. 전에도 아침 안 먹고 병원 와서 저혈당 걸렸죠? 그러면 곤란하니까.”
그냥 병원 가기 전 챙겨 먹기 힘드니 아침밥 들러 오라는 말이다.
착각이었다. 결혼 같은 거 하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아…….”
유설희. 아직도 옥 선생을 모르냐. 빈말 안 하는 사람인데. 정말 그냥 옥 선생은 “밥을 먹으러 놀러 오라.”라고 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했다. 사귀지도 않는데 프러포즈할 리 만무하다.
어제 그 자리에서 한 말은 농담이었고. 설희가 자신의 착각을 눈치채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귓불까지 불탄 듯 달아오르자, 옥 선생이 인상을 썼다.
“괜찮아요?”
“아, 큼큼. 매워서…….”
설마 옥 선생님이 나한테 프러포즈하는 줄 알고 기대해버렸다는 소리는 못 한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육개장을 휘적거렸다.
“그렇게 매운가? 설희 씨 매운 거 좋아하잖아요?”
이상한 듯, 국그릇 안을 쳐다보는 옥 선생이었지만, 지금 누가 주리를 틀어도 설희는 자신의 착각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
“설희 씨, 어제 괜찮았어요?”
어제 얼마나 마셨는지, 직원들이 병원으로 들어올 때마다 묻는 질문에 설희는 말없이 얼굴만 붉혔다.
회식에서 작작 마셔야지, 괜히 외삼촌이 설희와 옥 선생을 엮는 바람에 술을 들이켠 어제의 자신이 창피해 설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매니저와 어린 테크니션 채린이 물품 정리를 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설희가 그 뒤로 다가가 정리를 돕는데, 채린이 습관적으로 약품 박스를 툭툭 선반에 꽂아 놓으면서 매니저에게 물었다.
“근데 어제 말이에요. 옥 선생님 반응 좀 이상하지 않으셨어요?”
“응, 뭐가요? 평범하던데.”
“아뇨. 새로 오신다는 수의사 선생님 이야기 듣고 되게 얼굴이 굳으시던데.”
설희는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전날 회식의 술자리에서 순간적으로 보였던 은우의 표정을 떠올랐다.
새로 온다는 수의사. 최이현 이랬나.
그는 옥 선생의 후배라고 했는데, 싫어하지 않는다면서도 일그러진 표정이 그의 심경을 다 말해주었다. 분명히 뭔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셋이 이야기를 하고 있자,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옥 선생인가.
다 같이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 그러나 들어온 것은 최 선생님이었다. 다들 입을 일자로 한 채로 놀란 채 뒤를 돌아보고 있자, 최 선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아, 새로 오는 선생이랑 옥 선생님 이야기하고 있었거든요.”
“아…….”
그 이야기를 듣고 최 선생님이 한숨을 쉬었다.
“뭔가 좀 이상했죠? 옥 선생 반응이. 나도 느꼈는데.”
“네, 평소의 옥 선생님 같지가 않았어요.”
“내가 잘못했지. 임신하고 옥 선생한테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나이가 많잖아요. 그래서 혹시 위험할까 봐서 미루다 미루다가 16주 넘어서 급하게 사람을 찾았더니. 근데 분명히 내가 그…… 최이현 선생한테 물어봤을 때는 사이 좋다고 그랬거든. 이상하네.”
“왜 그럴까요? 옥 선생님이 깐깐하시긴 하지만 이유 없이 사람 싫어할 분은 아닌데.”
설희의 외삼촌인 원장 선생은 경영만 하고 평소 진료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상 원장 노릇을 최 선생님이 했는데 선생님까지 출산으로 떠나셔서 안 계시면…….
옥 선생님이 수의사 중에는 가장 윗사람이 되는데 어떻게 될는지 걱정이었다. 설희의 한숨에 최 선생님이 웃었다.
“설희 씨 걱정돼요?”
“조금요.”
“하긴, 설희 씨가 이 병원을 이끌어 가야 하니까. 하하.”
최 선생의 농담에 설희가 얼굴을 붉혔다. 옥 선생과 결혼하면…… 이라는 전제가 붙은 이야기였다.
“농담이 너무 심하세요.”
“미안, 미안. 어제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기겁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매니저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설희에게 물었다.
“근데 두 사람은 어디까지 간 거야?”
새로 온다는 선생님에 대한 관심은 곧 원내 연애에 대한 가십으로 흘러갔다.
***
어디까지 간 걸까, 우리는.
설희는 앞에서 진료 중인 은우를 바라보았다. 늘 깔끔하게 올린 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매끈한 이마 위로 살짝 흘러 내려와 있었다. 입술이 예쁘게 곡선을 그리며, 자신의 앞에 앉은 보호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뚱이 보호자님, 뚱이 피부병이 거의 다 나았네요. 약물 치료도 꾸준히 잘 따라와 주시고, 약용 샴푸로 목욕도 잘해주신 덕분에 아주 깨끗하네요.”
“어머, 그런가요? 일 년이나 안 낫던 건데, 돌마래 동물병원으로 오고 나서 2개월 만에 나았네요. 다 옥 선생님 덕분이에요.”
“아닙니다. 보호자님이 잘 돌봐주신 덕분입니다.”
진료대 위에 올라가 있는 까만색 프렌치 불독이 기분 좋게 몸을 떨었다.
처음 왔을 땐 온몸의 피부에 딱지가 앉아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쉴새 없이 몸을 긁어 대고 있었다고 했다. 완치되어 기쁜 얼굴로 보호자가 프렌치 불독을 안고 인사를 하고 갔다.
마중하며 환히 웃던 은우는 보호자가 돌아간 후 차트에 눈을 옮겼다. 설희는 소독을 하면서 옥 선생을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얼떨결에 키스도 하고, 심지어 아침밥도 같이 먹었다. 옥 선생이 고백도 하고…… 내가 혹시 대답해야 하는 상황인가?
옥 선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잘 생겼다. 잔소리도 많고 귀찮지만, 일 관련해서도 멋있다. 얼마 전, 이물질을 먹은 개가 와서 응급 상황이었을 때, 긴급 수술을 들어갔던 때를 떠올렸다.
보호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난리를 치고 개는 산소가 부족해 입 안이 보라색으로 변해 컥컥거리는 난장판 속에서도 차분히 수술을 마치던 옥 선생.
그를 보면 마음이 불안해지면서 복잡해진다. 마냥 행복해진다기보단, 마치 바이킹을 타면서 제일 높은 곳에 배가 올라갔을 때처럼 울렁거리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