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뜨겁고도 단단하게. (38/80)


38화. 뜨겁고도 단단하게.
2023.03.11.


그때, 원장이자 설희의 외삼촌인 재성이 문을 열고 회식 자리에 들어왔다. 그는 다른 일이 있어 조금 늦게 오는 길이었다.


“아이고, 다들 기다렸네. 우리 회식 자리가 얼마 만이지? 한 세 달 만이던가?”

그 순간, 설희의 입에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살았다.

외삼촌의 한마디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옥 선생과, 그런 옥 선생과 설희를 재밌다는 듯 쳐다보는 최 선생님 사이에서 구출해주었다. 그런 설희의 상황을 모르고 재성이 입을 열었다.


“오늘 회식은, 중요한 공지사항이 있어서입니다. 흠흠.”

무슨 일일까. 오늘 공지사항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오랫동안 함께 해준 우리 부원장인 최 선생이, 갑작스럽지만 다음 달로 병원을 그만두게 됐어요.”

원장 선생님의 말에 모두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왜?

최 선생님은 돌마래 동물병원에서만 10년은 일한 베테랑 수의사였다.

최 선생이 어색한 듯 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잔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맥주가 아닌 사이다가 담겨 있었다.

설마? 그녀는 불과 1년 전에 결혼을 했다.

설희도 바로 옆에 앉은 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런 설희에게 최 선생님이 방긋 웃어 보였다.


“사실은 제가 임신 5개월이에요.”

“어머, 축하해요! 최 선생님!”

최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좀 더 빨리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도 있었지만, 나이가 있어서…… 안정되면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원장님께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을 구하셔야 하니까 미리 말씀드렸구요.”

“정말 잘됐다, 축하드려요.”

“선생님이 안 계신다니 슬프지만, 그래도 정말 잘된 일이네요.”

사람들의 축하들이 쏟아지고 외삼촌이 흐뭇한 듯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음 달 초에 최 선생님 가시기 전에 새로운 수의사도 들어올 거니 다들 잘 부탁합니다.”

“어떤 분이 들어오시는데요?”

매니저의 질문에 최 선생이 미소 지으며 은우를 바라보았다.


“옥 선생은 아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최이현이라고, 옥 선생이랑 같은 연구실이었다고? 한 학년 후배고. ”

옥 선생이 최이현이라는 이름에 인상을 찌푸렸다.


“최이현이요?”

“응, 옥 선생보다 후배일 텐데 기억 안 나?”

은우가 맥주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 그가 붉은 입술 끝에 묻은 하얀 거품을 닦아 내고는 쓰게 답했다.


“압니다.”

“사이 별로인가 봐?”

“별로일 게 있나요. 그냥 후배예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은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 보니 껄끄러운 사이인 듯 보였다. 설희는 그런 옥 선생을 보고 한숨 지었다.

돌마래 동물병원이 평화로운 것은 최 선생님이 있기 때문이었다.

늘 둥글둥글하고 차분한 최 선생님이 평소 좀 날카로운 옥 선생님을 다독이고 편하게 해줘서 살 만했다. 근데 옥 선생님과 사이 나쁜 수의사가 온다니, 절로 머리가 아파왔다.

도대체 어떻게 되려나.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멀리서 이야기를 하던 외삼촌이 설희 쪽으로 걸어왔다.


“설희야, 너 잘하고 있지?”

“네?”

워낙 병원에 안 나오는 존재감이 거의 없는 외삼촌이었지만, 일단은 원장 선생님이다.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바로 앞에 설희가 맨날 사고 치는 것을 보고 있는 옥 선생님이 바로 곁에서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지라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저…… 잘하려고 하고 있어요.”

설희의 말에 외삼촌이 크게 웃었다.

뭐가 웃기지?


“설희, 너 일 열심히 해야 돼. 맨날 연애만 하지 말고. 그러려고 동물병원 들어온 건 아니잖아.”

뜬금없는 외삼촌의 말에 놀라 설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삼촌을 바라보았다.


“연애요?”

사람들이 들을까 봐 설희가 목소리를 죽여 이를 악물고 말했다.


“오해시라니까요.”

“에이, 무슨 오해야. 다아 안다. 삼촌은 다아 알어.”

외삼촌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고 설희를 바라보았다.

죽고 싶다. 안 그래도 전부터 은우와 설희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늘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경악한 설희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외삼촌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잘됐어. 우리 옥 선생이 병원 일을 맡아서 봐주면 되겠어. 나도 슬슬 은퇴할 때가 되었으니 조카 사위에게 물려줄 때가 됐지.”

조카사위란 말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폭격 수준이었다. 설희는 손을 들어 외삼촌의 소매를 잡았다.

제발 그만…… 그만하세요. 삼촌……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아요.

그러나 너무 놀라서인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늘 밝고 긍정적인 외삼촌이 왈가닥으로 유명한 엄마와 정말 남매가 맞는지 궁금했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삼촌과 엄마의 비슷한 점을 발견했다.


“으…….”

설희의 입에서 기괴한 소리가 나고, 다른 사람들은 키득거리며 재밌다는 듯 설희와 옥 선생님을 바라보는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단호한지, 순간의 분위기를 다 얼려버렸다.

***


 
원장 선생님의 농담에 왁자지껄했던 자리가 순간, 옥 선생이 정색하고 한 말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제일 끝에서 술 먹던 직원까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은우는 그러나 물러섬이 없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저는 그런 거, 싫습니다.”

싫다고? 왜 싫어? 뭐가 싫은데?

‘그런 거’라고 목적어를 알 수 없는 말에 별로 마시지도 않은 술이 깼다.

물론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저런 말 듣는 건 싫을 수도 있다. 아무리 상사라고는 해도 너무나도 단호한 옥 선생의 말에 당황한 건 설희만은 아니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옆에서 매니저도 말을 거들었다.


“아이참, 옥 선생님도…… 원장님이랑 설희 씨 민망하게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원장 선생님도. 무슨 벌써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오랜만의 회식이라 너무 설레셨나 보다. 웬일이야. 요즘 그런 이야기 하면 안 돼요, 원장 선생님.”

“아, 그런가? 미안, 미안.”

매니저와 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미간 사이에 자잘한 주름이 잡혔다.


“뭐가 미안하죠? 만약에 진심으로 말하셨다면, 원장 선생님도 아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앞으로도 개원할 생각 없습니다. 평생 봉직의(월급 받는 의사)로 살아갈 겁니다. 경영은 잘 안 맞아서요. 지금처럼 병원에서 진료에 집중하는 게 성격에 맞습니다.”

“아아, 그런 거였구나.”

말리던 매니저가 그제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은우가 내뱉은 싫다는 말은, 설희랑 결혼하는 게 싫다는 말이 아니고 병원 경영이 싫다는 말이다.

옥 선생의 말에 설희를 제외한 모두 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야, 다른 의미인 줄 알았네.”

“그렇구나! 옥 선생, 그래그래, 옥 선생은 정말 개원의는 안 어울려. 그래그래, 지금처럼 봉직의가 낫지. 사람 응대하고 그런 것 스트레스받잖아.”

안도의 한숨까지는 아니지만, 옆에 앉아 있던 설희조차 왠지 모르게 뻣뻣하게 긴장되어 있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내가 싫다는 말이 아니었구나.

눈치 없이 계속 말을 하던 외삼촌도 크게 웃으며 좋아했다.


“하하하하, 뭘 걱정이야, 옥 선생!”

거기서만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외삼촌은 오지랖이 넓고 말 많은 설희의 어머니와 누가 피 통하지 않았다고 할까 봐, 쓸데없는 말 한마디를 더 붙였다.


“우리 설희가 경영에는 소질이 있을 거야. 회사도 다녔었고 말이야. 경영은 우리 설희에게 맡기고 옥 선생은 진료만 보면 되잖아.”

제발 그만.

이래서 가족이 있는 회사에는 취직하는 게 아니었다. 동물병원 일은 더없이 즐거웠지만 그 모든 것을 후회할 정도로 설희는 창피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목소리를 높여 원장을 불렀다.


“삼촌!”

왜 옥 선생이랑 나랑 결혼하는 걸 전제로 말하는 건데?

우리 사귀지도 않는데! 아직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당황한 설희와 달리 은우는 느긋했다. 홀짝, 술잔을 기울이며 입술을 축였다. 그러다가, 그의 나지막한 시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설희를 향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사한 목 근육이 비쭉, 떠오른다.


“설희 씨가 병원 경영이라.”

“…….”

“지금 상태면 상상이 되질 않는데. 정말 언젠가는 경영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소리인가.

가슴이 울렁거렸다. 너무 울렁거려서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사귀지도 않는데, 다들 결혼했을 때 병원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하고 있는 거지? 내가 옥 선생을 좋아한다고 한 건 아닌데, 저렇게 미래의 부인 보듯 당당하게 말하는 옥 선생은 또 왜 저러고.


“지금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다들 술이…… 지나치셨나?”

초조한 자신과는 달리 여유로운 은우가 밉살스러워 설희가 노려보자, 은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빛, 쭉 뻗은 콧날 밑에서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아찔했다.

두근. 그의 미소를 보고 설희의 심장이 날뛸 정도로.

얄…… 얄미워. 정말 얄미워.


“왜, 할 말 있어요?”

설희가 노려보자, 은우가 또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할 말, 없다.

설희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에 앉아 소주를 입으로 들이부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럴 때는 역시 알싸한 소주가 최고였다.

***

그래서, 너무 많이 마셔버렸다.


“설희 씨,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원래 그 정도 마시나? 같이 마신 건 처음이라 모르겠네.”

“그……런……가……요? 취해 보여요?”

젊은 사람들끼리 놀라며 원장과 최 선생이 빠지고 간 2차에서도 설희가 술을 마시는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안주를 안 먹어도 옥 선생 얼굴을 보면 술이 먹혔다. 가슴이 답답해서 자꾸만 맥주를 들이켰다. 홀짝, 또 들이키자 매니저가 손을 저었다.


“설희 씨, 그만 마셔.”

옆에서 매니저가 말리자 설희가 배시시 웃었다. 설희의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환하게 웃는 설희를 보고, 매니저가 난감한 듯 웃었다.


“설희 씨 취하니까 귀엽기는 한데, 집에 어떻게 가려고 그래.”

매니저의 말에 앞에서 묵묵히 술을 마시던 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만든 긴 그림자가 설희의 위에 드리워졌다. 흘깃, 그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전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은우가 일어난 걸 보고 설희가 비스듬한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는구나. 그래, 차라리 잘됐어. 사람들이랑 신나게 놀아야지. 이제 드디어 이것저것 말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설희의 예상과는 달리 옥 선생은 맥주잔을 꼭 잡고 있는 설희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손이, 맥주잔에 닿아 서늘한 살결에 닿는다. 오싹하는 감각에 설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만 마셔요. 유설희 씨도 갑시다.”

“으응? 아니요…… 싫어요. 전 더 마실래요.”

“이미 엄청 취했습니다. 더 마시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예요.”

더 놀고 싶었지만 그의 단호한 말투에, 민폐라는 말에 결국 옥 선생에게 손이 잡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흔들리는 설희의 어깨를 은우가 감싸 안았다.


“아.”

뜨겁고 단단하다. 흔들리는 몸을 꽉 끌어안은 어깨가 너무 딱딱해서 순간 숨이 막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