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미치겠다.
(37/80)
37화.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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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미치겠다.
2023.03.07.
미치겠다.
은우와 둘이 있는 모습을 가장 들켜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들켜버렸다. 설희는 은우에게서 한걸음 떨어져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삼촌.”
재성은 설희의 외삼촌이자, 돌마래 동물병원의 원장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아, 가끔 집에 찾아와 이렇게 저녁 식사를 함께하곤 했다.
망했다. 망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재성이 은우와 자신이 이렇게 하고 있는 걸 알게 된 이상, 어머니에게도 말할 것이고 그리고 병원에서도 소문이 퍼지겠지.
모두가 다 알아버린다. 하필이면 왜 외삼촌에게 들킨 걸까. 차라리 그 상대가 엄마인 게 뒤처리가 쉬울 것 같았다.
“사귀다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근데 왜 휴일에, 집 앞에서 그렇게 다정하게 둘이 서 있어?”
그것도 그렇다. 오늘은 일요일. 거기다가 저녁이 다 된 시간. 병원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쯤은 재성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본가까지 은우가 쫓아올 일은 없다.
“삼촌. 아니에요.”
식은땀이 흐른다. 그러자, 은우가 입을 열었다.
“원장님. 제가 설희 씨에게 책 빌려줄 게 있어서 잠시 집에 찾아왔습니다.”
“책?”
“네. 반려동물 간호 가이드북이 새로 나와서 빨리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하고 은우는 설희의 손에 들려 있는 쇼핑백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쇼핑백 안에는 당연하게도 반려동물 간호 가이드북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은우의 할머니인 선숙이 챙겨준 홍차가 들어 있었다. 다행히도 재성이 서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왔습니다.”
은우가 태연자약하게 말을 했다. 그의 얼굴만 보면, 사정을 다 아는 당사자인 설희조차 깜빡 속아버릴 정도의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래서인가, 재성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그, 어깨에 손은 뭐였어?”
“아, 그건. 어깨에 나뭇잎이 묻어서 털어준 겁니다.”
옥 선생에 대해 알아둬야 할 점.
그는 마음을 먹고 거짓말하면 정말 잘한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의 호수처럼 남자의 얼굴에는 긴장이 어려 있지 않았다.
재성이 미간을 좁혔다.
“정말?”
“네.”
“정말이니? 설희야.”
“정말이죠, 삼촌은 참.”
설희가 잽싸게 은우에게서 멀어져서 재성에게로 다가왔다. 바닥에 떨어진 장바구니를 주우며 설희가 웃어 보였다.
“삼촌, 이거 사 오신 거예요?”
“으응.”
“들어가서 먹어요, 얼른요. 안녕히 가세요, 옥 선생님!”
그리고 설희는 그를 질질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등에는 서늘한 땀이 흘러내렸다.
***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의 라운지 바. 그곳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최이현. 전주에 위치한 한성 동물병원의 수의사였다. 갈색의 머리카락, 뚜렷한 이목구비가 드러난 얼굴이 시원시원한 미남이었다.
“오랜만이네, 서울.”
그렇게 읊조리던 남자는 호텔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울 강남 시내가 오롯이 내려다보였다. 돌마래 동물병원이 저 어디쯤일 텐데.
“이현아.”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이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 학년 선배인 창호였다.
“아, 선배.”
“오랜만이네. 서울도 오랜만이지?”
“네.”
“이제, 서울 올라온다며.”
“네. 이제 슬슬 지겨워서요. 서울로 올라오기로 했어요. 돌마래 동물병원이라고.”
돌마래라는 이름에 창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돌마래? 거기…… 은우 있는데 아냐? 옥은우가 거기 있는 걸로 아는데.”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너 은우랑 사이 안 좋잖아. 왜 하필이면 돌마래로 가?”
세상에 이렇게 갈 곳이 많은데.
그러자, 이현이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래서 가는 거예요.”
“은우 때문에? 화해했어?”
이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부딪쳐보려고요.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아요.”
“너…… 설마 복수하려는 건 아니지?”
창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현이 피식 웃으며 다시 서울의 야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복수는요, 뭘. 유치하게.”
그런 시시한 걸 할 리가.
이현은 조금 더 재밌는 일을 할 생각이었다.
**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두통이 심해진 것 같아.”
요즘 너무 일이 많았다. 은우 할머니께 날 잡는다고 말씀을 드리질 않나, 두 사람이 있는 장면을 삼촌에게 들키고.
삼촌에게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 빙긋 웃기만 했다. 그 음흉스러운 표정이 ‘나는 다 알고 있어, 이놈아.’라는 눈빛이라 더더욱 마음에 걸렸다.
아니라고 더 강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전에 사람들 앞에서 은우와의 의혹을 해결하려 아니라고 너무 심하게 말했다가 후회한 적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우물우물 대답하다가 결국은 약간 의심하는 분위기로 끝이 났다.
할머님께 인사만 드리고 오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휴…….”
한숨을 쉬면서도, 문득 은우에 대한 것이 떠오른다.
결혼해도 괜찮다고 웃던 그의 목소리, 밤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카락, 같은 차 안에 앉아 있다 보면 폐부 깊이 스며드는 그의 상쾌한 향기.
괜히 시무룩해진 설희는 밖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매니저가 안에서 걸어 나오며 설희를 불렀다.
“설희 씨, 벌써 옷 다 갈아입었어요?”
“네. 매니저님도 준비하셨어요?”
“응, 난 준비했어요. 재밌겠다, 오랜만의 회식이잖아.”
오늘은 외삼촌, 돌마래 동물병원의 원장인 재성이 병원에 나와 회식을 하는 날이었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회식. 괜찮을까.
전에 설희가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응급환자가 연달아 들어와 회식이 취소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참여하는 병원 전체 회식은 처음이었기에 긴장도 됐지만, 다른 것보다도 은우와 또 술을 마신다는 점이 긴장됐다.
지난번 옥 선생과 술 마셨을 땐…….
그의 뜨거운 입술과 닿았었다.
왜인지 목이 바싹 마른다.
“흠, 흠.”
매니저와 말을 하다 말고 설희의 얼굴이 달아오르자, 매니저가 이상한 듯 설희의 안색을 살폈다.
“설희 씨. 어디 아파요? 볼이 빨간데.”
“아, 아니요.”
옥 선생이랑 키스했던 걸 떠올리느라 얼굴이 빨개졌다고는 말 못 해서 그저 고개만 숙였다.
이상해, 내가 너무 이상해.
***
“설희 씨.”
“…….”
“유설희 씨.”
그녀가 작은 요크셔테리어를 안은 채 정신을 놓고 있자 은우가 다가와 고개를 들이밀었다.
“유설희 씨!”
“엄마, 깜짝이야.”
“강아지 안고 무슨 생각 중이에요. 다했어요?”
“앗. 네. 발톱 다 깎고 왔습니다.”
“동물이랑 있을 때만큼은 뭐라고 했죠?”
“방심금물이요.”
“얼마 전에 강아지에게 물려놓고는 아직도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오늘 품에 안고 있는 요크셔테리어 초코는 침착하고 차분해서 괜찮았지만 다른 강아지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은우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방심은……?”
구호 외치는 시간이다. 평소에는 끔찍하게 싫었지만 오늘은 정신 차리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금물이다!”
설희가 두 주먹을 움켜쥐고 우렁차게 외치자 은우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입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그걸 보고 심장이 뛴다.
두근.
이랬던 적 없는데. 옥 선생만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났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을 생각하면 행복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설희는 옥 선생을 떠올리면 뭔가 불안하고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역시 옥 선생은 연애 상대로 아닌 건가?
옥 선생은 나를 보며 어떤 느낌이 들까?
정말 저 사람이 나를 보고 심장 떨려 하고 좋아하는 것은 맞는가.
요즘은 시간만 나면 옷을 갈아입은 옥 선생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런 옥 선생을 보고 설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내가 혹시……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타입인가?
옥 선생이 그렇게 자신을 불안하게 하고, 옥 선생만 생각하면 흔들거리는 느낌이 들어 결코 행복하지 않은데, 옥 선생의 모습을 보면 왜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보게 될까.
설희는 그 답을 알면서도 몰랐다.
***
오늘의 옥은우 통신.
그는 흰 차이나 칼라 셔츠에 감색 바지를 입었다. 하얀 가운을 벗자 약간 드레시한 느낌의 셔츠가 옥 선생님이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상반신을 감쌌다.
회식으로 온 술집. 와글와글 사람들이 떠드는 가운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은우에게 시선이 갔다.
왜 자꾸만 옥 선생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는지 설희는 화가 날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옥 선생을 쳐다보는 것은 설희 하나뿐은 아니었는지, 술잔을 기울이던 최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옥 선생, 원래부터 잘생겼지만, 오늘은 특별히 얼굴에서 빛이 나네?”
“…….”
은우는 칭찬에 익숙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셔츠 때문인가, 뭐 좋은 일 있어요?”
“좋은 일은요, 뭘.”
“왜, 뭔데 뭔데. 뭔가 있구나?”
“별거 없습니다.”
옥 선생이 붙임성 없이 툭, 이야기하자 최 선생이 까르르 웃었다.
“하여튼 옥 선생은 차가워. 냉정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훨씬 더 많았을 텐데. 저러는데도 학교에서 인기 많았다니까.”
“역시 그랬죠?”
매니저가 궁금한지 저쪽 끝에서 고개를 쑥 빼고 물었다. 그러자 부원장인 최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옥 선생 때문에 좀 시끄러운 일도 여러 번 있었지.”
“…….”
“그런데 지금, 저 얼굴에, 저 능력에 여친 없는 거 보면 좋아하는 여자는 더 괴롭히는 거 아니야?”
좋아하는 여자라는 말에 설희의 몸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왜 이 이야기에 내가 긴장되지.
최 선생의 말에 설희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자 은우의 시선이 최 선생님에게서 서서히 설희에게로 옮겨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의 시선이 천천히 스친다.
왜, 왜 날 보지?
“글쎄요. 좋아하는 여자는 더 괴롭혔었나?”
분명히 최 선생님에게 말하는 건데, 왜 날 보고 말을 하지.
“그랬던 것도 같고요.”
확실히, 그는 설희를 병원에서 강하게 키웠다. 이리저리 공부시키고, 지적도 많이 하고. 설희는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꼭 쥐고 숨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옥 선생을 바라보았다.
그런 두 사람의 미묘한 공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최 선생이 말을 이었다.
“전에 만난다는 여자는 어떻게 됐어? 예쁘댔나? 어디서 만났댔지? 잘 되어가?”
“…….”
은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원장이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말을 덧붙였다.
“어머, 잘 안됐어?”
“답보 중이에요.”
“그 여자가 옥 선생 싫대?”
그 말에 은우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그의 붉은 입술을 축인다.
“글쎄요. 아무 말이 없던데.”
은우의 시선이 다시 한번 설희를 향했다. 그와 허공에서 눈빛이 서로 부딪친다. 마치 제 마음을 알라는 듯한 그의 표정.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요,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