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할게요, 결혼.
(36/80)
36화. 할게요,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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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할게요, 결혼.
2023.03.04.
선숙이 인자하게 웃으면서 설희를 바라보았다. 충격적인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나…… 날이요?”
“응, 그래 날.”
무슨 날 말씀이시죠.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게 무슨 날인지 모를 정도로 설희도 바보는 아니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결혼, 말씀이세요?”
“그렇지. 우리 은우도 이제 30대니 얼른 결혼을 하면 좋겠지. 할미도 나이가 있고, 손주들도 보고 싶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할머니.”
“응?”
결국, 참을 수 없었는지 은우가 끼어들었다. 한쪽에서 이야기만 듣고 있던 그의 미간은 잔뜩 좁아져 있었다. 서늘한 말투로 그가 말을 내뱉었다.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너무 앞서나가지 마세요.”
은우의 딱 잘라서 하는 말에 조금 전까지 신이 나 있던 선숙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당당하던 노부인의 얼굴이 손자의 말에 금세 먹구름이 낀다.
“그러니…….”
어두운 얼굴에 설희의 마음이 욱신 아팠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하는 표정으로 설희는 은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설희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더 기대하시게 하면 안 되니까 옥 선생이 말한 것처럼 딱 끊어버리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
표정이 어두워진 선숙은 홍차를 들이켰다. 홀짝, 들이킨 뒤, 갑자기 잔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입 앞을 가로막으며 선숙이 파르르 떨었다.
“할머님, 사레라도 들리셨어요?”
“아냐, 괜찮아, 응, 괜…… 쿨럭.”
그녀가 손을 내밀어 괜찮다고 휘저었지만, 생각보다 기침이 깊었다. 설희가 저도 모르게 그녀가 앉은 쪽으로 달려가서 선숙의 등을 토닥토닥 쳤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언제든 기도가 막힐 수 있다. 설희의 할머니 옆집에 사시는 부산 할머니도 사레가 들리셔서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했다.
“괜찮으세요? 숨 쉬어보세요.”
“으응.”
조금 전까지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선숙은 기침을 하면서 등을 동그랗게 말았다. 뭐 때문에 건강이 안 좋은지 옥 선생에게 들은 적 없지만 몸이 안 좋다고 들은 마당에 이렇게 기침까지 계속하시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설희가 토닥이는 그녀의 등도 비교적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몇 번인가 쿨럭이던 선숙은 설희 덕분인지 곧 안정되었다.
“고마워. 아휴, 사레가 들려서. 요즘 자주 이래.”
“다행이에요, 이제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선숙이 손을 뻗어 손수건을 들어 제 입술을 닦았다. 액체가 붙었던 곳을 꼼꼼히 닦아 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서인지 그렇네. 오늘내일하는 건 아니지만, 몸이 약해져서…… 늙어서, 그래. 늙어서.”
“아.”
역시 그랬구나. 곱게 화장을 한 얼굴에도 이상하게 짙은 그림자가 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선숙의 행동과는 달리, 은우는 태연했다. 사레가 걸린 게 무섭지도 않은가. 아니, 평소에 차갑기는 해도 이 정도는 아닌데.
“그래서…… 오늘 결혼 이야기 갑자기 꺼내서 미안해요. 내가 손자가 은우랑, 은우 형뿐인데 은우는…… 지금까지 여자 사귄다고 한 적도 없고 그래서 특히 고민이 많았거든.”
잠시 숨이 찬지 멈췄다가 선숙이 말을 이었다.
“여자에 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녀석이 여자친구가 생겨서 들떴나 봐. 얼른 결혼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죽고 싶어서.”
“…….”
“얼른 결혼하면 좋을 텐데. 그치? 하지만 내가 너무 앞선 거지?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그렇게 말하며 선숙은 손을 뻗어 설희의 손을 잡았다. 꽉 움켜쥔 그녀의 손은 따뜻하면서도 말라 있었다. 통통한 자신의 손과는 꽤 다르다.
“……그…….”
마치 누군가가 설희의 목을 옥죈 것처럼 끄억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설희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열었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설희가 말했다.
“내년 봄쯤은 어떠세요?”
설희의 말에 선숙의 얼굴이 환히 피었다.
***
“끄아아악.”
선숙의 집을 나오자마자 설희는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옆에서 운전대를 쥔 은우가 입술을 끌어올려 설희를 보며 웃었다.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괜찮을 수가 없었다. 은우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 채, 설희는 한동안 머리를 감싸 쥐고 씩씩거렸다.
“저 오늘 일 친 거 맞죠.”
설희는 여전히 머리를 움켜쥔 채 글로브 박스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은우는 운전을 하다가 힐긋, 그런 설희를 바라보고 눈썹을 끌어올렸다.
“음…….”
고민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진다.
“조금?”
배려해서 하는 말이겠지. 설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수준이 아니었어요. 그건.”
결혼을 이야기하는 선숙에게, 결국 은우가 선을 그었다. 앞서나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리고 선숙이 사례가 걸렸고, 너무 마르고 아파 보이시는 할머니가 마음에 걸려 그만, 결혼 날짜까지 말해버렸다. 다 설희 자신의 잘못이었다.
“내년 봄쯤은 어떠세요?”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자신의 입에서 툭 튀어나와버렸다.
결혼이라니, 결혼이라니.
그 말에 선숙은 좋아서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래, 결혼은 봄에 하는 게 좋아. 지금부터 준비하면 그때까지는 맞출 수 있겠다. 그렇지?”
들뜨셔서 너무 좋아하시는 바람에, 그 말이 실수였다고는 말하지 못한 채 결국 선숙의 집을 나서버렸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제정신이면 그런 일을 못 한다. 이미 말을 내뱉어 버렸으니 다시 주워 담기는 힘들 것이다. 애초에 안 한다고 하는 것이랑, 한다고 했다가 결국 안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선숙이 받아들이는 크기가 다를 텐데.
왜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명확했다. 선숙은 너무나도 좋은 분이었다. 처음에는 낯선 집에 너무 고급스러운 노부인이라 무서웠지만, 대화를 하고 보니 마음이 저절로 녹아들었다.
그래서 그런 그녀가 아프다고 생각을 하니, 그런 그녀가 실망을 할 것 같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설희가 머리를 움켜쥐고 자신의 과거의 말을 깊이 후회하고 있는 동안, 차는 설희의 집으로 나아갔다.
***
“설희 씨 본가로 가면 되죠?”
“네.”
오늘은 일요일이라 설희는 집에서 가족 식사를 하기로 했다.
“죄송해요. 오피스텔로 가는 거면 일이 적었을 텐데.”
“가까운데요, 뭐.”
“감사합니다.”
집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자, 은우 역시 차에서 내렸다. 선숙의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도 아닌데 거리가 꽤 되어서 설희의 집에 도착하고 나니 저녁이었다.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요.”
“괜찮아요.”
“꽤 어둑어둑해요.”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하고 싶은 말도 있었다. 천천히 집 앞으로 걸어갔다.
사실 오늘이면 모든 일이 끝났어야 했다. 은우를 설희의 친구들에게 소개시키는 일도, 은우의 할머니에게 설희가 인사하는 것도. 다 끝나서 이제 원래 대로 원상태로 돌아가면 되는 거였는데.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해버려서 어떻게 될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설희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오늘 죄송했습니다.”
“아니에요.”
“정말 죄송해요. 할머님께 어떻게 다시 말씀드려야 할지…… 이러다가 그냥 결혼하게 생겼어요.”
아픈 사람에게 지난번에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고 할 수도 없고. 가장 베스트 방법은 차일피일 미루는 것일지도 몰랐다.
“또 놀러 와요, 기다릴게. 내가 적적해서 그래요.”
설희가 집에서 나오는 데도 몇 번이고 손을 흔들던 선숙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심장이 쿡쿡 쑤셨다. 그런 좋은 분을 속이다니, 내가 미쳤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속이다니.
“정말, 미안합니다. 옥 선생님.”
“미안하다는 말, 그만해요.”
은우가 손을 뻗어 잔뜩 굽어 있는 설희의 어깨를 잡았다.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셔서 그런 거잖아요. 설희 씨가 상냥해서 그런 거니까.”
“하지만…… 이러다가 정말 결혼하겠어요.”
농담처럼, 설희가 말하면서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은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나는 괜찮아요.”
“……네?”
손바닥을 확, 내려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두웠던 시야가 한 번에 밝아지면서 그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단정한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는 조금은 이르게 켜진 가로등의 불빛이 머문다.
곧게 뻗은 콧날과 그 아래 느른하게 미소 지은 입술이 그가 반쯤은 농담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래도 심장이 파르르 떨렸다.
“결혼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
“잊었어요? 내 고백.”
잊지 않았다. 은우와 단둘이 있을 때면, 아니 설령 그가 없을 때에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유설희 씨.”
그의 붉은 입술에서 부드럽게 흘러나오던 제 이름.
“설희 씨가 오해한 겁니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 그냥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에게 잘해주고, 도와주고,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어졌던 태어나서 처음 들은 고백.
“좋아합니다.”
그때 그가 자신을 어떻게 쳐다봤는지, 반쯤 열린 문으로 어떤 자세로 서 있었는지, 은은하게 풍기던 그의 향기가 어떻게 자신을 휘감았는지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다.
“유설희 씨, 당신이 너무 좋아.”
그렇게 말했었지.
그의 고백을 잊었냐는 말에 설희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으랴.
“아뇨.”
“그런데 왜 내 걱정을 해요. 괜찮아요.”
“그 말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하는 말인 걸 아는데도, 혹시라도 그의 말에 1퍼센트 진심이 섞여 있을까 봐 설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자 은우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오늘 일은 설희 씨 잘못 아니에요.”
“제 잘못이 아니라고요?”
은우가 고개를 까닥했다. 비스듬히 선 채 말을 이었다.
“할머니는 사람을 잘 읽으시는 분이에요. 설희 씨랑 날 결혼 시키고 싶어서, 그래서…….”
그렇게 옥 선생이 말을 이으려 하는 순간 바닥으로 턱,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이야기를 듣던 설희가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일이지? 설희의 어깨를 잡고 있었던 은우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고개만 돌려 뒤를 바라보자.
“어.”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돌마래 동물병원의 원장이자, 설희의 외삼촌, 한재성이. 바닥에는 그가 들고 왔던 듯한 장바구니가 떨어져 있었다.
그가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설희와 은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희…….”
“……..”
“옥 선생…….”
손가락으로 설희를 한번 보고, 은우를 한번 보고. 그리고 그가 목이 졸린 듯 속삭였다.
“둘이……그런 사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