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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여기가 어디. (34/80)


34화. 여기가 어디.
2023.02.25.


안에서 어떠한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초조하게 채린은 병원 건물을 나와 진호 뒤에 섰다.

진호는 오늘 데리고 온 프레리독을 뒷좌석에 싣느라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른 채 차 뒷문을 닫았다. 떡 벌어진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운전석으로 가기 위해 돌아서기 직전, 채린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앞을 보고 있는 진호를 조심스레 불렀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것은 강남의 한 카페에서였다. 그를 못 본 지는 일주일을 훌쩍 넘겼다. 진호는 그사이에 간간이 연락을 해왔지만, 채린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메시지를 읽기만 했다.

채린의 목소리에 진호의 어깨가 움찔했다.


“어, 채린 씨.”

몸을 돌린 남자가 채린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채린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답고 단단한 몸, 단정한 얼굴, 까만 눈동자에는 채린을 만나 기쁘다는 희열이 떠올라 있었다.


“돌마래까지 왔는데도 못 만날 줄 알았어요. 바쁘신 것 같아서. 근데 만나게 됐네요.”

일주일 넘게 그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호의 얼굴에는 그동안 왜 연락이 없었냐는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기쁜 얼굴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린다. 그 사이로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러게요.”

그가 가기 전에 붙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가, 자신이 왜 밖으로 뛰쳐나와 그를 불렀는지 몰라 채린은 입술을 달싹였다.


“저…….”

왜 나는 뛰어나온 것일까.

채린은 어렸을 때부터 다소 무서운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왔다. 아버지가 하라 하면 무조건 해야 했다. 나라의 법보다도, 종교보다도 무서운 게 아버지의 말이었다.

처음 사귄 사람이자 오래 사귄 남자친구, 운규도 그랬다. 밥을 먹으러 가면 언제나 그가 먼저 메뉴를 골랐고, 채린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옷을 입고 나오면 옷집에 데려가서 새로운 옷을 사주더라도 갈아입혔다.

근데…….

진호는 달랐다.

운규였다면 메시지를 10분만 늦게 답장해도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같이 식당에 가면서 그가 자신의 옷을 받아주거나 의자를 뽑아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진호는 그 모든 게 너무 당연했다.

한 번도 부정적인 표정이나 표현은 하지 않았고, 두 번 만나는 동안 늘 따스하게 대해줬다.

그래서, 오히려 그가 어려웠다.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 수 없었고, 혹시 그 아래 저의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이상하게도 의심됐다.

그래서 채린은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솔직하게 자신을 막 대하는 남자가 낫겠다 싶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만나온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채린은 그가 버거웠다.

그런데.

그런데 왜 진호가 돌마래에 왔다는 이야기에 벌컥, 놀라 밖으로 뛰어나온 것일까. 지금까지 연락을 왜 받지 않은 걸까.


“채린 씨. 괜찮아요?”

채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자 진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아뇨, 저, 괜찮아요. 답장 안 해서 화나셨죠.”

“아뇨, 바쁘실 것 같아서 오히려 미안했어요. 괜히 연락을 자주 했죠?”

“…….”

채린의 일상은 늘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병원에 오고, 7시에는 집에 돌아간다. 바쁠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

입술이 바싹 말랐다. 진호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려고 하지. 그냥 연락을 씹으면 되는 건데. 왜 굳이 상처를 주는 걸까.


“저, 진호 씨에게 앞으로 연락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조금 전까지 따스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

짧은 대답. 채린은 다시 한번 어렵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게 돼서…… 죄송합니다.”

진호가 실망한 모습을 보자, 당연한 결과인데도 채린의 가슴이 콕콕 찔려왔다. 너무 좋은 사람이라 그런 걸까.

채린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진호는 곤란하다는 듯 손을 들어 턱을 쓸어내렸다. 가슬가슬한 턱을 몇 번이나 쓸어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예상할 수 없던 말을 내뱉은 것은 자신이었는데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무슨 생각을 하던 남자가 입에 담은 말은 예상외의 말이었다.


“채린 씨, 너무 좋은 사람이네요.”

“네? 갑자기 무슨…….”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는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굳이 말할 필요 없었는데. 와서 굳이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 아뇨.”

잔인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오히려 다정하게 감사를 표했다.


“내가 기다릴까 봐 그런 거죠?”

그렇다기보단, 왠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가 혹시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진 않을까, 그래서 더 오래 고민하진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음, 아쉽지만. 알겠습니다. 더 연락하거나 하지 않을게요.”

“……네.”

이걸 바랐다. 그가 연락하거나 하는 걸 바라지 않았는데도 그의 말에 이상하게 가슴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진호가 말을 이었다. 손을 턱에서 떼고 눈썹을 추어올렸다.


“하지만, 채린 씨는 나에게 연락해도 됩니다. 혹시 내가 필요해지면 아무 때나 연락하도록 해요. 알았죠?”

“…….”

채린이 입을 다물자, 그가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전시회 가고, 그러고 싶으면 부르라는 이야기예요.”

“…….”

“아, 물론, 친구가 많겠지만. 혹시라도 친구가 다 시간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

“걱정 말아요. 저 스토커 같은 놈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저는 연락 다신 안 할게요.”

혹시라도, 자신의 말이 무겁게 느껴질까 봐 진호가 손을 들고는 물러서는 척을 해 보였다. 그리고는 사람 좋게 웃고 “그럼.”하고 차에 탔다.

그가 차를 타고 가버리고, 채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 친구 없어요. 진호 씨.”

채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애견관리사 학원을 6개월 다니고 바로 이 돌마래 동물병원에 취업했다. 옥죄는 집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집에서도 나오고 자취를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어린 나이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만 그러니 자연히 또래의 삶과는 달라졌다.

친한 친구도 없었고, 가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매니저님과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을 제외하면 외출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할 필요 없다는 것을 채린은 잘 알았다. 오늘 대화해보니 더욱 뚜렷했다. 진호가 자신을 보면서 환히 웃을 때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을 때, 심장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성적 호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이 낯설어서 어색했다. 그래서 결국 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병원으로 들어갔다.

***


 
점심시간 동안 병원은 한차례 뒤집어졌다. 채린이 대화를 하고 들어온 것을 보고는 다들 궁금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야기 잘하고 왔어?”

“뭐래, 뭐래?”

돌마래 동물병원은 다들 오래 일한 사람들이라 가족처럼 친하고, 서로를 끈끈하게 챙겨줬다.

하지만 이럴 때는 좀 곤란했다. 채린이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앞으로는 안 만나기로 했어요.”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괜히 물어봤나 봐. 일부러 막 쫓아가길래 잘될 줄 알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은우가 입을 열었다.


“우리 병원 사람들은 너무 사생활에 참견을 합니다. 조금 내버려두세요.”

“…….”

“채린 씨 걱정돼서 그런 것은 알지만.”

채린은 너무 어릴 때 돌마래에 들어와서 직원들에게 동생같이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여기는 직장이고, 사생활이다.

그 말에, “그건 그래. 괜히 물어봤네.”하고 매니저와 부원장이 속삭이고 반성했다. 다른 직원들이 나가자, 설희도 휴게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오후 진료 10분 전. 대충 정리를 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당연히 나갈 줄 알았던 은우가 나가지 않고 휴게실 문가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어, 나 나가야 하는데.

그러나 그는 비켜주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 선 채 설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필요하신 것 있어요?”

“생각은, 좀 해봤어요?”

생각?

갑자기?

지난번에 그의 고백에 대한 대답 말인가.

목적어가 정확하지 않은 질문에 설희는 당황했다.

병원에서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어서 방심하다 당한 설희는 입술이 바싹 말랐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미간을 좁히자 그가 다시 물었다.


“내일 어떻게 할지. 시간 12시인데 괜찮아요? 아까 아침에 연락했는데 답장이 없어서.”

“아.”

놀라 설희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의 전원이 꺼져 있었다. 어젯밤 충전을 하고 나오지 않아 방전된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핸드폰이 꺼져 있었네요.”

“괜찮아요. 물어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없는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아서.”

그건 그렇다. 사람들 앞에서 그의 할머니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할 수는 없는 법. 설희가 재차 핸드폰을 못 봤다고 하자, 그가 괜찮다며 다시 손을 저었다. 팔랑팔랑.


“내일 12시에 할머님댁으로 찾아뵈면 되는 거죠? 그럼 여기서 어떻게 출발하면 될까요.”

“같이 출발하죠. 10시 반쯤.”

“댁이 머세요?”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괜찮을 거예요. 밀리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내일은 하루 종일 일정을 다 빼놔서.”

은우가 고맙다고, 고개를 까닥했다.

***

화창한 토요일.

설희는 오늘, 저답지 않게 원피스를 입었다. 핑크빛이 도는 원피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단정했다. 언젠가 어머니가 좋은 자리에 갈 일이 있으면 입으라고 사주신, 좋은 옷이었다. 그 옷을 오늘 처음 입고 나왔다.

좋은 자리.


“좋은 자리…… 맞나.”

설희는 지금 은우의 차에 타 있었다. 오늘은 은우의 할머님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전에 찬정이랑 사귀었을 때는 찬정은 설희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막상 설희는 찬정의 어머니조차 뵌 적이 없다. 근데 사귄 적도 없는 남자의 할머니에게 인사드리러 가야 한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그것을 은우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 해요?”

“오늘 괜찮을까요? 할머니가 절 싫어하시면.”

“좋아하실 거예요. 저랑 할머니는 취향이 비슷하시거든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하고 묻기도 전에 설희와 은우를 태운 차가 부드럽게 한 집 앞에 멈추어 섰다.


“도착했어요.”

“아, 네.”

그렇게 설희가 대답하고 내리려는데. 눈이 크게 떠졌다.


“아니 여기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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