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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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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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바람이 분다
2023.02.21.
바람은 휘이휘이 불고, 밖에 내어놓았던 안내 입간판은 날아가서 잡으러 가고, 오늘따라 정신이 없었다. 무슨 태풍이라도 분 건지 입간판을 도저히 밖에 세워 놓을 수 없어, 설희는 안쪽으로 들여놓았다.
그리고 병원으로 들어오는 설희를 보고 매니저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설희 씨, 입간판 부서지진 않았어?”
“네. 부서지진 않았더라고요. 작게 긁힌 상처는 모르겠네.”
“다행이네.”
“그러게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설희는 자리에 툭 주저앉았다. 이상하게 이번 주는 힘이 없었다.
은우가 그녀에게 고백을 한 지 꼭 5일이 지났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강렬한 사건이었던 지라 설희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고백한 날, 그리고 그다음 날 추가로 다시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옥 선생의 호감 표현이 뚝 끊겼다. 정말 그런 일이 있긴 있었던 것일까 의심이 될 정도로.
연애가 너무 어려워…….
은우와 손끝이 마주칠 때마다, 좁은 통로에서 그와 스쳐 지날 때마다, 설희는 긴장되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혈압이 오르는데, 막상 고백한 옥 선생은 너무나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쯤 되면 옥 선생이 날 좋아해서 고백한 건지, 아니면 날 놀리려고 고백한 건지 모르겠어.
이래서는 큰일이다. 내일은 옥 선생님의 할머님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가서 자연스러운 연인을 연기할 수 있을까.
설희가 잠시 생각하는데, 문이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덩치가 큰 남자가 커다란 케이지를 들고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설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원더풀랜드의 수의사이자 은우의 친구, 진호였다. 진호는 설희를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했다. 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진호와 설희는 원더풀랜드에 갔을 때 만난 사이였다. 그는 은우와 설희가 직장 내 비밀연애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설희를 보고 입꼬리가 씰룩였다.
도대체 얼마나 꼬이고 꼬인 거야.
“네. 오늘은 어떻게 된 일로…….”
“아, 저희 프레리독 한 마리가 아파서요.”
그가 커다란 케이지를 들어 보였다.
***
옥은우는 대학에 다닐 때 내과 연구실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교수님이 설치류를 전문으로 하셨던 분이었다. 그래서 졸업하고 나서도 몇 가지 연구를 교수님을 도와 함께 하고 있었기에 은우도 자연스레 설치류에 빠삭했다.
현재 교수님은 안식년에 들어가 계신다. 그래서 진호는 자기가 보기 어려운 설치류를 가끔 은우에게 데려왔다. 동물원의 동물들도 때로는 이렇게 외부 진료를 받기도 했다.
오늘도 프레리독 한 마리가 며칠 전부터 식음전폐를 하길래 말했더니 은우가 데려오란다. 그래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프레리독은 희귀 동물 중에서도 개체가 적은지라 제대로 볼 수 있는 수의사가 한국에 몇 없었다.
진호가 케이지를 들고 진료실 안에 들어갔다. 그러자 진료가운을 입은 은우가 케이지를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상태가 괜찮네?”
은우의 말에 진호는 저 멀리 세면대 쪽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힐끗, 제 모습을 확인했다.
은우를 만나러 온다는 것은, 돌마래 동물병원에 있는 채린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진호는 아침부터 신경을 썼다. 신경을 너무 쓰면 이상해 보이니, 머리를 살짝 쓸어올리고 옷은 깔끔한 셔츠에, 잘 입지 않던 구두까지 신었다.
채린과는 두 번 만난 게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호는 그녀가 좋았다. 차분하게 눈을 내리깔고 살짝 웃는 미소라든지,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라든지.
“그래? 티가 나?”
진호의 말에 은우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그러자 진호가 말을 덧붙였다.
“참, 티 안 나게 꾸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티가 났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오늘 상태가 괜찮다며.”
은우가 여전히 미간을 좁히고 진호를 바라보다가, 케이지 내의 프레리독을 쳐다보았다.
“프레리독 말이야. 어젯밤에만 해도 식음전폐하고 꼼짝도 안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은 훨씬 활력이 있어 보이는데.”
은우의 말대로 케이지 안에 들어있는 프레리독은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스락바스락,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복슬복슬한 프레리독이 까만 눈을 반짝 빛냈다.
“아, 프레리독 말이구나.”
“그럼 프레리독 말이지, 뭘 말한 거겠어.”
그것도 그렇다. 은우가 자신의 행색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진호의 말에 은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혹시 얘 안 아픈데 데리고 온 건 아니지?”
은우의 의심에 진호가 펄쩍 뛰었다.
“아냐. 정말이야.”
“뭔가 이상한데.”
그리고 은우는 케이지를 진찰대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프레리독을 꺼내 들었다. 오늘 데리고 온 프레리독은 원더풀랜드에서 키우는 프레리독 중에서도 사람을 잘 안 따르는 아이 중에 하나였다.
프레리독은 만져지는 걸 좋아해서 사람을 좋아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저 녀석은 다르다. 진호는 은우가 드는 것을 보고 바싹 긴장했다.
“조심해. 걔 언제나 깨물려고 하거든.”
“그래?”
얌전해 보이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은우가 이리저리 보았다.
그런데 정말, 은우의 말처럼 얌전했다. 평소에는 진호가 잡으려고 하면 이부터 드러내던 녀석이 어떻게 저렇게 순해졌을까.
“쟤도 얼굴을 보나.”
은우는 학교 다닐 때도 워낙에 미남으로 유명했다. 축제에 억지로 끌려 나온 날이면 다른 과에서 구경을 왔다. 실험견들도 은우를 잘 따랐다. 케이지에 있어서 예민해진 녀석들도 은우의 품에 가면 조용하게 안정을 되찾곤 했다.
진호의 말에 은우가 픽 웃었다. 보기 좋은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린다.
“그럴 리가. 뭔 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
“원더풀랜드에서는 진짜 정신없거든.”
평소에는 진호도 이렇게 기가 죽어 있는 편은 아니었다. 은우만큼은 아니어도 남자답고, 덩치도 좋아서 진호를 좋아하는 여자도 꽤 있었다.
하지만 채린은 아니었다.
두 번 만나서 적당히 즐거운 시간을 즐겼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진호는 한참 긴장을 했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알면 알수록 채린을 더 알고 싶어졌다.
그런데, 채린에게 연락을 해도 잘 닿지 않았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은우는 여전히 그런 진호의 고민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프레리독을 이리저리 살폈다. 검사 결과도 확인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구루병 같은데. 전해 들었던 것보다 상태가 괜찮은 것 같긴 하지만.”
구루병.
비타민 D가 부족하면 자주 오는 병으로, 병이 오면 움직임이 둔해지고 주변 사물에 반응을 잘 하지 않는다. 섭취하는 음식의 균형이 불균형이어서 생기는 병이었다.
“아, 그럼 약 안 써도 되나?”
“응. 약은 굳이. 영양제나 좀 주고, 그리고 가서 다른 녀석들에게 사료 뺏기지 않나 좀 확인해줘.”
그리고 은우는 큰 손을 들어 프레리독의 머리를 쓱쓱 쓸어내렸다.
별일 아니라서 다행이네, 조심해서 들어가.”
그리고 그가 다시 케이지 안에 프레리독을 집어넣었다. 케이지를 닫을 때까지 프레리독은 귀엽게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병원을 구경하다가, 들어가고 나서는 또 신난다는 듯 안을 누볐다.
“됐지?”
은우가 손에 꼈던 장갑을 벗어 던지고, 소독 좀 부탁한다고 밖에 말했다. 소독을 하러 들어온 테크니션이 채린이 아니고 설희인 것을 확인한 진호의 얼굴에 실망의 흔적이 지나갔다.
설희가 나가고 나자, 은우가 팔짱을 끼었다. 단단한 근육이 압박에 의해 튀어나온다.
“이진호.”
“응?”
“돌마래까지 온 목적이 뭐야.”
“뭐긴 뭐야. 프레리독이 아파서…….”
“날 바보로 생각해?”
은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진호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너도 판단할 수 있었을 텐데. 특수한 병도 아니고. 구루병도 모를 네가 아니잖아.”
“아니, 정말 몰랐어.”
“정말?”
정말 몰랐을까.
구루병은 프레리독에서 자주 일어나는 병이었다. 녀석이 워낙 진호만 보면 놀라서 도망가서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고, 오늘도 어찌어찌 겨우 잡아와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대충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채린 씨 때문이야?”
은우가 피곤하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니야. 정말 몰랐어. 근데…… 조금은 그런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진호의 솔직한 말이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놈 아니잖아. 왜 이래.”
“그러게.”
“다음엔 다들 고생시키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놀러 와. 그리고, 채린 씨가 싫다고 하면 물러나기로 했잖아. 그게 내가 소개시켜준 조건인 걸로 아는데.”
“……그랬지. 그래.”
맞는 말이다.
그래, 이제는 이런 바보짓 하지 말아야지.
은우의 말대로 진호는 이런 녀석이 아니었다. 질척거리는 자신의 행동이 신기하기만 했다. 결국, 채린과 만나지 못하고 병원을 나섰다. 차 뒷좌석에 프레리독이 실린 케이지를 올리고, 뒷좌석 문을 닫는데.
“저, 진호 씨.”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진호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채린이었다.
***
“남의 연애 구경이 제일 재밌다니까.”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채린이 다른 업무 보조를 마치고 돌아오자, 매니저가 그녀에게 진호가 병원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서 은우의 진찰실로 들어갔으나, 채린이 그곳에 갔을 땐 이미 진호는 밖으로 나간 이후였다.
“잠깐 매니저님, 저 나갔다 와도 될까요?”
“응, 그래요. 지금 환자도 없고 곧 점심시간이니까.”
“죄송합니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그리고 채린은 급하게 나갔다.
진호가 채린을 마음에 들어 해서 은우를 통해서 전화번호를 알아낸 것도, 두 사람이 두 번 정도 데이트를 한 것도 동물병원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 좁은 직장에서 비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채린과 진호가 어떻게 되는지 다들 궁금해했다. 진호의 차가 세워져 있는 뒤쪽 주차장은 안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휴게실에 있는 작은 창으로 다들 기웃기웃하면서 바라보았다.
“잘 되겠죠.”
“그렇겠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런 매니저나 부원장님의 말과는 달리, 은우는 한쪽에 서서 평온한 표정으로 뜨거운 물에 커피를 타 휘이휘이 저었다.
“어머, 채린 씨가 제대로 안 보여. 차에 가려서.”
“둘이 잘돼가는 것 같아요?”
매니저가 고개를 돌려 은우에게 묻자 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옥 선생님 역시 입이 무거워.”
“무거운 게 아니라 정말로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내 연애 문제에 코가 석 자라서.”
“…….”
“남에게 신경 쓸 시간은 없네요.”
그의 시선이 설희에게 닿았다. 조금 전 물을 마신 직후인데도 입술이 바싹 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