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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흘러넘치다 (32/80)


32화. 흘러넘치다
2023.02.18.


감정이 흘러넘친다.

설희가 자신의 감정을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은우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연애가 귀찮았다. 연애를 해본 적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푹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진 적은 없었다. 친구와 같은 사이. 그저 데이트를 하고, 시간을 보내고.

그러다가 별로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고 지쳐서 상대가 떠나곤 했다. 최근에는 그런 일조차 하는 게 귀찮아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유설희만은 달랐다.

뭐든 이 악물고 최선을 다하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그래서 같은 병원 내에서 연애하는 것이 안 될 일일 줄 알면서도, 그녀가 제게 마음이 열리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신이 너무 좋아.”

이렇게 마음이 쏟아져 내렸다.

설희는 은우의 생각대로 놀란 듯했다. 귀여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올려다본다. 더 로맨틱한 고백이었으면 좋았을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손을 뻗어 동그랗게 된 그녀의 눈두덩을 쓸어내리고 싶다. 전에 한번 겹쳤던 입술을 다시 한번 겹치고, 그녀와 깊어지고 싶었다.

은우는 이제, 멈출 수가 없었다.

***


 
콩. 콩. 콩.

설희는 케이지에 머리를 세 번 가져다 박았다. 곰곰이를 만나서 산책하고 놀기 위해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했다. 하지만 정신은 콩밭에 가 있었다. 어제 옥 선생님과의 마지막 대화가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다시 한번 머리를 부딪쳤다. 이마가 케이지에 부딪치며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충격이 모자라 다시 한번 머리를 가져다 댔다.

콩. 콩. 콩.

전날 자신이 했던 행동이 뇌리에 떠올랐다. 설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연신 케이지에 머리를 가져다 대는 설희의 행동이 이상한지 곰곰이가 걱정스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끼잉.”

“괜찮아, 곰곰아. 누나가 머리가 쪼오금 아파서 그래.”

손을 뻗어 곰곰이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내렸다.


“곰곰아 넌 좋겠다. 연애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돼서.”

어제 있던 일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싫어도 하루 종일 그 생각뿐이다.
 


“유설희 씨. 당신이 너무 좋아.”

 
은우가 속삭이던 그 말이 뇌리를 꽉 채웠다.

내가 너무 좋다고?

갑자기 훅 들어온 고백에 순간, ‘좋다’에 다른 의미가 있나 생각했다. 설마, 여자로서 좋다는 건 아니겠지? ‘직원으로서’ 좋다. ‘세입자로서’ 좋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러나 아무리 둔하고 둔한 설희라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촉촉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우의 표정은, 누가 보아도 진심이었다.

오피스텔 복도의 형광등이 깜박일 때마다, 그의 눈에서 빛이 쏟아졌다.

옥 선생이 날 좋아한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키스도 하고, 밥도 먹으러 갔다. 데이트라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런데 왜 이렇게 당황하냐면.

설희는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은 게 처음이었다.

전 남자친구인 찬정과는 술자리에서 돌아가는 때, 찬정이 “야, 유설희, 우리 사귀자.”한 것이 사귀는 계기가 되었다.

멋없는 교제 신청.

그 외에는 누군가에게 고백받은 적이 없었다.

저렇게 부드럽고 뜨거운 눈길로 좋아한다고 말은 들은 적은 더더욱 없다. 상대는 심지어, 옥 선생이다.

그에게서 쏟아진 너무나 진지한 말에 설희는 그만 얼음이 되어 버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너무 갑작스러웠나?”

 
멍하게 그만 바라보는 설희를 보고 은우가 살짝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
 


“저, 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움직였다. 그리고 설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녀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좋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날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설희는 머리를 콩콩콩 케이지에 가져다 박았다.


“나는 바보냐고.”

아무리 당황하고 아무리 급작스러워도 ‘정말 감사합니다’가 뭐니?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설희의 말에 은우는 당황하기는커녕, 쿡, 하고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래요, 그럼.”


“…….”


“오늘은 여기까지. 피곤할 텐데 잘 자요.”

 
그리고 은우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 탁, 닫히고 나서 설희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혹시라도 소리를 질렀다간 은우에게 들릴까 봐서.

죽어야지. 죽어야지!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니, 최악의 답변이야.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리지. 아니, 차라리 기절을 해버리지, 그게 뭐냐고!

아무리 자신에게 화가 나도, 모든 상황을 돌이키고 싶어도 그는 사라진 이후였다. 창피함 때문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오늘도 옥 선생을 만날 텐데…… 뭐라고 하지? 설희는 걱정이 되어 자꾸만 시계를 바라보았다. 곧 그가 오면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은 걸까. 그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

설희의 걱정과 달리 은우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설희와 마주쳤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빨리 왔네요?”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설희는 그를 바라볼 때마다 얼굴이 불타오르듯 빨개졌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차분하게 그를 보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침착해, 침착하자.

오늘은 옥 선생 담당의 강아지 3마리의 중성화 수술이 있었다.

수술의 조수로 들어간 설희는 살짝 안도했다. 수술 도중에는 마스크를 하고 있으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도,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것도 그에게 들키지 않을 터였다.

수술이 시작되자, 옥 선생이 메스를 쥐고 아주 작게 상처를 냈다. 안에 기구를 넣어 고환을 적출한다. 그리고 재빠르게 상처를 봉합했다. 5분도 되지 않아 수술은 끝이 났다.

수술 시간 내내, 설희는 옥 선생의 빠르고 예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길고 예쁜 손가락. 수술 장갑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하얀 피부에 섬세한 손이 옥 선생은 참 예뻐. 그러고 보니 예전에 키스했을 때, 그의 손가락이 내 뺨을 쓸어내려……

유설희. 정신 차려.

설희는 숨을 들이쉬며 눈을 크게 떴다.

눈동자가 양옆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수술 중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옥 선생은 너무나 멀쩡한데, 설희는 어째야 할 줄을 몰랐다. 좋아한다는 것은 옥 선생인데, 왜 내가 이렇게 난리람.

진료를 보는 와중에도 설희의 동요는 멈추지 않았다. 재키라고 하는 커다랗게 예쁜 3살의 독일 셰퍼드가 내원해 옥 선생님과 함께 진료실에 들어갔다. 상담을 받는 도중, 은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희 씨, 미안한데 혈액검사 결과 좀 가져다줄래요?”

옥 선생이 설희에게 너무나 차분히 오더를 내리고 보호자에게 시선을 돌려 상냥하게 말했다.


“보호자님. 재키가 밥을 많이 먹는데도 체중이 급격히 줄어 걱정이라고 하셨었는데, 검사 결과 췌장 분비 부전증인 것 같습니다. 셰퍼드에게서 자주 일어나는 유전성 질환인데, 확실하게 검사하기 위해서는 tli테스트라고 해서 혈청 중에 트립신 면역활성 물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있나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췌장 분비 부전증이요?”

“네. 췌장에서 소화효소들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아서, 많이 먹는데도 소화를 시키지 못해 살이 찌지 않아요.”

“위험한가요?”

“목숨이 위험한 병은 아니지만, 만약 확진이 되면 평생 소화 효소를 먹이셔야 합니다.”

“계속 먹여야 한다니 걱정이네요.”

“재키가 약을 잘 안 먹는 걸로 아는데, 잘 먹이는 방법을 한번 같이 연구해보죠.”

그가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목소리는 참 나긋나긋하고 듣기가 좋다. 잘생기고 예쁜 입술이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면서, 가끔 보호자를 향해 짓는 미소가 너무 예뻤다.

그렇게 옥 선생이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 보니, 그가 설희를 바라보았다.


“설희 씨.”

“네?”

“혈액검사 결과 부탁했는데?”

옥 선생의 질문에 설희는 눈을 크게 떴다. 은우가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목소리를 멍하니 듣다가 옥 선생이 시킨 일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었던 걸 깨달은 설희는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죄송합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보호자가 돌아가고 나서, 옥 선생이 인상을 찌푸리고 설희를 보았다.


“유설희 씨.”

혼날 게 틀림없다. 설희는 고개를 숙이고 떨어질 불호령을 기다렸다.

사적 감정과 공적인 일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어제 물론 생각지도 못한 고백을 듣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인인데, 온종일 실수를 하다니.

그러나 옥 선생은 화가 아니라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 한숨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설희의 마음에 콕콕콕 박혔다.

옥 선생님…… 실망했구나.

고백 같은 거 별것도 아닌데, 그것에 이렇게 심란해하고 기분이 붕붕 떠서 일도 못 하는 나 같은 여자는 옥 선생님 같은 완벽주의자에게 너무 실망스러운 존재겠지.

이제 싫어졌을지도 몰라. 아니, 원래 좋아한 것 자체가 실수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설희가 입술을 깨문 채 가만히 이어질 옥 선생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설희의 예상과는 달리, 옥 선생의 말투는 따스했다.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럽니까?”

그의 말에 설희가 눈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 있었다.


“내가 한 말이 부담돼서, 병원에서 집중이 안 됩니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행동을 멈추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프라이빗한 일을 직장으로 끌고 들어오는 사람으로 그가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대신 용기를 내 목을 쥐어짰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부담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조심조심 이야기하며 옥 선생의 안색을 살피자,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설희에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뭐가요?”

“내가 유설희 씨를 너무 좋아해서, 설희 씨가 당황해서 오늘 실수하는 줄 알았거든요.”

설희를 좋아한다는 옥 선생의 말에 설희의 얼굴이 불타오르듯 빨개졌다. 귀와 목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설희를 보자, 옥 선생이 미안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미안합니다. 병원에서 하기엔 부적절한 말이었나.”

“아, 아, 아……. 아니에요.”

겨우 대답하자 옥 선생이 싱긋 웃었다.


“앞으로는 조절해 보겠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좋아해본 게 처음인지라 조절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은우의 반듯한 이마에는 살짝 주름이 져 있고, 입술은 느른하게 호를 그리고 있다. 저런 엄숙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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