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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밤의 고백 (31/80)


31화. 밤의 고백
2023.02.14.


그럼 이게, 데이트라는 뜻인가.

설희가 은우의 말을 채 이해하기 전,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당연한 듯, 그녀의 의자를 빼주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의자를 뺐는데도 설희가 그만 바라보자 그가 뭐하냐는 듯, 자신을 내려다본다.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때문일까. 반듯한 얼굴에 길게 그림자가 졌다. 그가 툭, 던진 말에 패닉 상태인 설희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했다.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레스토랑요?”

그가 고개를 까닥였다.


“아뇨, 마음에 들어요. 그, 네. 와보고 싶던 곳이었어요.”

레스토랑 때문에 멍해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조심스레 그가 뽑아준 의자에 앉으며 설희는 고개를 숙였다. 은우도 그녀의 반대편에 마주 앉았지만 얼굴을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머릿속에는 데이트라는 단어가 둥실둥실 떠다닌다.

그의 앞에 서면 자신은 늘 이런 식이었다.

모르겠다. 나는 포기야.

설희는 남자와 이렇게 식사하는 것이 당연히도, 처음이 아니었다. 원래 고등학교도 남녀공학, 대학도 남자 반, 여자 반인 과를 나왔다. 연애 해본 적도 있고.

그런데.

왜 옥 선생 앞에만 서면 이렇게 되는 걸까?

생각해 보면, 병원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은우 앞에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제게 닿을 때면 잘하던 것도 잘 못한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늦은 햇살이 길게 비쳐 오뚝한 그의 콧날에 닿아 길게 비쳤다. 얄브스름한 눈매가 마치 요즘 티브이에 나오는 배우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잘생겨서 그런가? 나도 어쩔 수 없는 우리 엄마 딸이라서 얼굴을 밝히는가.

아니면, 처음에 옥 선생이 무서웠던 것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설희의 퍼져나가는 생각을, 은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막았다.


“설희 씨. 괜찮습니까?”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에 가슴이 쿵, 떨어진다. 괜스레 목이 말라 입술을 달싹였다. 손을 뻗어 물을 꼴깍 마시고 설희는 답했다.


“괜찮아요.”

“무슨 생각 해요?”

“아, 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왜 당신 앞에서는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데이트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 중이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참 설희가 입술을 달싹이자, 은우가 메뉴를 흘깃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먹을까 고민돼요?”

평소 먹을 거에 대해 꽤나 집착하는 설희가 멍하니 있자, 메뉴 생각을 하는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무슨 그렇게 온종일 먹는 생각만 하는 줄 아나.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이사하는 통에 바빠서 아침부터 먹은 게 없었지만, 아까 옥 선생이 말한 발언 때문인지 식욕은 영 없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레스토랑 오면 메뉴판을 다 외울 듯 정독했겠지만.


“전 그냥 추천메뉴 먹을래요. 여기 이거.”

설희는 대충 보이는 걸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래요, 그럼 여기 게살파스타 하나랑 카르보나라 하나 주세요.”

주문을 마치자, 어색한 시간이 찾아왔다. 설희는 잔뜩 긴장을 한 상태로 바닥만 보고 있었고, 그런 설희의 긴장이 옮았는지, 은우도 말이 없었다.

얼른 메뉴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럼 먹는 데 집중해서 이 분위기가 좀 날아갈 텐데.

처음 은우가 설희에게 연애하자고 했을 때는 그는 진심이 아니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이번에는 설희 씨를 보고 싶어 하시네요.”

 
할머니 앞에서의 연극을 도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은우는 이것저것 자신을 많이 도와줬다. 아까 데이트하자고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난번에는 키스도 했고.

부드러운 입술이 저에게 닿았던 것을 생각하니 또 입술이 마른다. 설희는 손을 뻗어 컵을 가져와 다시 입술을 축였다.

역시, 옥 선생님은 나를 좋아하는 걸까?


“저어.”

“네?”

설희의 말에 은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희는 눈을 내리깔고 용기를 쥐어 짜내어 입을 열었다.


“옥 선생님은…….”

저를 좋아하시는 건가요?

왜 제가 좋으세요?

맨날 일도 못 하고 어리바리한데.

혹시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이건 뭔가요.

그렇게 말을 꺼내기 직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설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다물었다. 점원이 주문한 두 개의 파스타를 들고 와, 둘에게 물었다.


“게살파스타 어느 분이시죠?”

방해받아 다행인 것 같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겨우 쥐어짠 용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직원의 질문에 설희가 작은 손을 들었다.


“저요.”

“그럼 이쪽 분이 카르보나라시군요.”

직원이 음식을 놓자,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근사한 목 근육이 드러났다.


“설희 씨, 아까 하려던 말 뭐였습니까?”

은우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희가 어색하게 웃고는 또 입을 다물었다. 그런 질문을 할 용기는 그녀에게는 없었다.

***


 
원래 두 사람이 만날 때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설희였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은우였다. 하지만 오늘은 설희가 할 말이 없었다. “음식이 맛있다.” “레스토랑이 근사하다.”정도의 이야기뿐.

식사하는 동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은우가 틀어놓은 라디오만이 울려 퍼질 뿐, 둘 사이에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같은 오피스텔 입구를 지나,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이라는 버튼을 눌러, 같은 층에서 내린다.

일련의 행동이 두 사람이 같은 건물, 옆옆 집에 산다는 것을 뼈저리게 떠오르게 했다. 가구점에서 산 작은 화분이 달랑달랑 은우의 손에 들려 있었다.

설희의 집 앞에 도착하자, 옥 선생이 화분을 내밀었다.


“여기, 가지고 들어가요.”

“감사합니다.”

은우가 설희에게 화분을 건네줄 때, 둘의 손이 살짝 스쳤다. 작고 얇은 설희의 손과는 달리 그의 손은 마디마디 단단하고 긴 손이었다.

하지만 투박하지는 않다.

수술을 할 때는 다소 까다로운 작업도 섬세하게 처리했다. 그의 손을 바라보자, 은우 역시 시선을 내려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병원에서 다쳐 상처가 생긴 곳이 보인다. 그가 손끝을 세워 상처 주변을 훑었다.


“아직, 아파요?”

그의 손가락이 지나치는 곳에 짜르르, 울림이 울렸다. 아프다기보다는, 그렇다기보다는. 지금은 긴장이 되고 어지럽다.

걱정하는 말투에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곧 아물 거예요. 아직 약은 먹고 있어요?”

“네. 상처가 좀 깊다 해서.”

“큰일이네. 오늘 이것저것 움직여서 더 상처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다행일 텐데.”

상처 따윈 어째도 좋았다. 지금은 제 손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이 문제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괜찮을 거예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설희는 어색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은우가 뒤에서 말했다.


“가구 오면 조립해 주겠습니다. 그 손으로 무리하지 말고.”

그 말에 집으로 가던 설희의 발이 문득 멈췄다.

며칠 전부터,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곰곰이 때문이건, 설희가 못 미더워서건,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건 그는 설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월세도 싸게 방을 빌려줬고, 가구도 알아봐 줬고, 이사까지 도왔다. 심지어, 찬정에게서 여러 번 설희를 구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난.

싫다고 말해버렸다.

설희는 눈을 들어 옥 선생을 바라보았다. 날카롭고 조금 예민한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좋은 사람이었다.


“저어……”

“네?”

괜한 소리를 했다가 핀잔을 받을까 봐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설희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뭐가요?”

“이사 도와주신 것도, 집 빌려주신 것도…… 모든 것 다.”

설희의 말에 은우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가끔 저러던데, 화날 때마다 저러는 걸까?

예전엔 그에 대해 궁금한 게 없었는데, 점점 더 알고 싶어진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은우는 붉게 달아오를 때 즈음, 말을 뱉었다.


“집세 안 낼 겁니까?”

“네? 물론 내야죠.”

“그러니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집주인이 집 빌려주고 돈 받는 건 당연한 영리활동이니까.”

지난번 찬정에게서 그가 자신을 구해줬을 때가 생각이 난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다행히 찬정이 그놈도 납득한 것 같고, 친구들도 즐거워했어요.”

 
그렇게 말했던 설희에게 은우는 가볍게 답했다.
 


“잊었나 보네요. 이걸 먼저 시작하자고 한 사람은 나예요.”

 
옥 선생님은 고맙다는 말을 어색해하시는구나. 은우의 핀잔 섞인 말에 설희가 그만, 웃어버렸다. 은우가 미간을 좁혔다.


“왜 웃어요?”

“옥 선생님은 안 그런 척하시지만 좋은 분이세요.”

“…….”

“예전에는 모르지만, 전 지금은. 옥 선생님이 정말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날 말했던 걸 혹시 들었다면, 오해라고 알아주길 바랐다. 설희의 말에 은우가 순간, 말을 잃었다. 언제나 톡톡 쏴대던 옥 선생이 말을 잃는 것을 보는 것은 의외로 즐거웠다. 설희는 더욱 밝게 웃고는 허리를 숙였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제가 다음에는 밥 살게요. 꼭요.”

오늘은 자기가 내겠다고 우겨 결국 은우가 식사까지 냈다. 밥이든, 선물이든 뭐든 간에 보답을 해야겠다.


“그래요, 들어가요.”

“그럼.”

인사를 하고, 집 문을 닫았다.

텅 빈 방에 아까 던져 놓은 짐만 덩그러니 있었다. 아직 곰곰이는 병원에서 데려오지 않아 이 집에는 오늘 혼자였다.

설희는 신발을 벗고 캐리어 옆에 쪼그려 앉아 벽에 몸을 대었다.

단단한 벽이 등 뒤로 느껴진다.

이 벽 하나,

그리고 그 뒤에 벽 하나 더.

그렇게 벽 두 개만 지나면 옥 선생의 방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희는 쪼그려 앉은 채로 머리를 뒤로 젖혔다. 콩, 콩. 머리로 벽을 쳤다.

옆집도 아니고, 옆옆 집인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뭘까.


“오늘 이사 와서 괜히 감성적이 됐네.”

중얼거리고 마저 정리하려 일어서는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옥은우입니다.”

얇은 현관문 사이로 익숙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뭘 놓고 가기라도 한 걸까.

문을 벌컥 열자, 은우가 서 있었다. 조금 전 헤어진 그 상태 그대로. 아니, 살짝 굳은 표정으로 설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그녀에게 오롯이 쏟아져 내린다.


“뭐 잊으셨어요?”

“할 말이 있습니다.”

“뭐요?”

내일 병원에서 만날 건데 무슨 급한 일일까.

살짝 입꼬리를 비틀은 은우는 속삭였다.


“설희 씨가 오해한 겁니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뜬금없는 소리에 설희가 눈을 깜빡였다.


“네?”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 그냥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에게 잘해주고, 도와주고,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은우가 고개를 숙인 탓에 흘러내린 머리를 왼손으로 쓸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유설희 씨.”

이상하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심장의 고동 소리가 커졌다.

심장이 얼마나 크게 뛰는지, 그에게도 이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옥 선생은 여전히 웃음기가 없는 진지한 얼굴로 설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그에게 되물었다.


“네?”

설희의 질문에 천천히 느릿느릿 은우의 입술이 열렸다.


“좋아합니다.”

나지막하고 단호한 목소리.

설희가 눈을 크게 떴다. 떨리던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설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바라만 보자, 은우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아까보다 더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유설희 씨, 당신이 너무 좋아.”

그리고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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