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단단히 닿는
(30/80)
30화. 단단히 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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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단단히 닿는
2023.02.11.
이 집의 옆옆집에 산다고? 같은 아파트? 같은 층?
자신의 집에서 벽이 두 개 더 가면 그가 사는 집이라는 이야기다. 이사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왜 말해주시지 않았어요, 옆집에 산다고?”
설희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그녀의 질문에 은우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화가 난 것처럼도 보였지만, 곤란해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은우가 입을 열었다.
“집에 대해서는 설명 빼놓은 것이 없는데.”
“……전 너무 당황스러워서요.”
“같은 집에 사는 것도 아닌데.”
그, 그건 아니지.
지금 옆옆집에 그가 산다는 생각만 해도 심장이 이리 쿵, 저리 쿵 하는데 같은 집에 살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지경이었다.
은우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을 느리게 깜빡, 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싫으면, 계약 취소해도 됩니다. 계약금 다 돌려주겠습니다. 비용도 제가 다 처리하죠.”
“아니, 계약 취소하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계약 취소 하고싶 다는 게 아니라 당황해서 물었을 뿐인데.
옆집에 산다고 은우가 말을 안 한 건데, 계약 취소 언급에 갑자기 설희가 을이 된 기분이었다.
안 돼, 옥 선생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지 말자.
“왜 말을 안 하신 거예요? 그게 궁금해요.”
“아니 옆집에, 혹은 옆옆집에 누가 사는지 꼭 알아야 합니까?”
하긴, 요즘 세상에 옆집 왕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쉐어하우스도 아니고. 옆옆집에 일반적인 집주인이 산다고 하면 문제 될 게 없다.
문제는 옆에 사는 게 옥 선생이란 게 문제다.
설희는 고개를 들어 은우를 바라보았다. 느른한 눈이 단단하게 굳은 입술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나, 그렇게 이상한 이웃 아닙니다.”
“……물론 이상하지 않겠죠.”
이상한 게 문제가 아니라.
뭐가 문제일까……. 설희는 왜 이렇게 불안한지 알 수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은우가 훅, 그녀에게로 가깝게 다가왔다.
반듯한 얼굴이 고작 20cm의 간격을 두고 가까이 왔다. 붉은 입술이 눈앞을 꽉 채운다. 은우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속삭였다.
“동료끼리 같은 오피스텔 살면 좋죠. 곰곰이가 아프면 내가 봐줄 수 있고, 뭐 서로 필요한 거 있으면 도와줄 수도 있고. 그리고…….”
그리고 그 뒤에 뭐라고 옥 선생이 속삭였지만, 너무 작은 소리로 속삭여서 들리지 않았다. 더 다가가서 들으려고 하니
“그리고 뭐요?”
설희가 되묻자, 옥 선생이 인상을 찌푸리고 설희에게 툭 뱉었다. 조금 더 다가갔다가는 그와 너무 가까워질 것 같아 마음이 달았다. 그러자, 은우가 몸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여러모로 같은 오피스텔 살면 나쁠 게 없잖아요.”
그건 그랬다.
설희는 개를 키워본 적이 없다. 아무리 동물병원에서 일하고 배웠다고는 해도 한계가 있다.
안 그래도 설희가 키우려고 하는 곰곰이는 나이도 적지 않고, 디스크도 가지고 있으니 바로 옥 선생이 바로 옆에 있으면 나쁠 게 없었다.
하지만 옥 선생은?
설희가 방 계약을 하고 나서 주변 시세를 알아보니, 그녀가 계약한 것은 평균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다.
방은 관리도 잘 되어 있고 깨끗했다. 설희가 여기서 살면 설희야 저렴하게 살 수 있었고, 곰곰이도 기를 수 있고, 병원도 가까웠다.
그러나 옥 선생은 이런 내가 옆에 살아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뭘까? 적은 월세, 개 기르는 세입자,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직장 동료.
“저는 그렇다치고, 옥 선생님은 불편하지 않으세요? 저랑 이렇게 가까이 사시면 좋을 게 없을 텐데.”
설희의 말에 은우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따끔따끔, 날카로운 눈길이 부드러운 살결을 스친다. 이상하게 저릿한 감정에 설희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유설희 씨,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
“그런 거라면 진짜 심각한데.”
그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설희를 울렸다. 은우가 입술을 비틀었다.
“난 유설희 씨랑 가까이 사는 게 좋아요.”
“아.”
“그걸로 이유가 충분하다고 보는데.”
설희는 말을 못 하고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타는 것만 같았다.
***
하늘이 파랗고 햇살이 환했다.
화창한 날이었다.
오늘 이사하기 잘했다. 그러다가 다시 운전하는 옥 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구점에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옥 선생을 잠시 훔쳐보다를 계속하다가 가구점에 도착했다.
“와, 크다.”
태어나서 처음 간 가구점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도 사람이 많았다. 은우와 함께 전시장에 들어가자, 와글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주말이니까요. 그리고 워낙 여긴 사람이 많아요.”
“와보신 적 있으세요?”
설희의 질문에 옥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에 있는 가구들 중에도 여기서 사 온 것들이 있거든요.”
처음 전시장을 헤매는데, 가족들과 커플들로 넘쳐났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옥 선생과 함께 가구들을 구경했는데, 침대며 소파에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신혼부부들을 보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옥 선생과 가구점에 와서 구경하는 왠지 이 그림이……. 커플 같아.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여긴 같이 왜 온 걸까?
미워하지 말라면서 속삭이고 키스까지 했다. 그럼 날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키스하고 나서 좋아한다는 말도 없었다.
혹시 그냥 술김에 키스한 것이 아닐까? 오늘 이사 도와주는 것도 그냥 집주인이니까 도와주는 거고.
그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생각해 봤자 알 수 없는데, 그냥 이사에만 집중하자.
큰 가구점을 돌아다니다 보니 가구들이 예쁜 게 많았다. 가구를 보며, 옥 선생에게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이 침대 너무 예쁜 것 같아요.”
“설희 씨가 좋아할 디자인이네요.”
은우의 말에 설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좋아하는 디자인이 뭔데요?”
“설희 씨 흰색에 깔끔한 디자인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포인트는 무채색으로 주는 거 좋아하고. 컬러풀한 건 싫어하죠?”
그의 말 그대로 설희는 컬러가 많은 디자인은 싫어했다. 가장 좋아하는 색은 흰색. 포인트는 거의 안 주지만 준다고 해도 무채색으로만 줬다.
“어떻게 알았어요?”
“보면 알죠, 뭐.”
역시 눈치는 대한민국 최고야.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오면서 어색하기는 했지만, 가구점을 돌아보면서 은우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구 쇼핑이 처음인 설희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이 장식장 어때요? 귀엽다.”
설희가 한 장식장을 보며 눈을 빛내자, 옥 선생이 그녀가 가리킨 장식장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사실 써봤거든요. 저 책장은 어때요? 저 장식장은 의외로 수납이 안 좋아서 별로인데. 저 책장에 중간 칸은 장식장으로 쓰고, 아래위에 책 꽂으면 될 것 같은데.”
가구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뿐만 아니라 옥 선생은 집주인이라 집 구조에 대해 이해가 높았다.
“예전에 이 밥상 산 적 있는데, 생각보다 편해요. 한번 들어볼래요? 가벼워서 좋은데, 설희 씨한테도 가벼운지 모르겠네.”
옥 선생이 건네준 상을 손에 들었다.
정말 그의 말처럼 상당히 가벼웠다.
접었다 폈다 쓰면 좋을 것 같아 주문표에 번호를 적어 넣었다. 접었다 펴는 상뿐만 아니라 옥 선생이 해주는 말에 설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자취를 해서인지 필요한 물건과 아닌 물건을 정확히 구별했다. 그녀의 취향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그가 고르는 물건은 하나같이 다 설희의 마음에 들었다.
결국 그녀가 산 것들은 거의 다 그가 골라준 물건들이었다.
고개를 들어 은우를 바라다본다. 고개를 숙여서 물건을 확인하는 은우의 얼굴이 조각 같아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다.
옥 선생은 손에 작은 전구를 들고 소비전력을 확인 중이었다. 알면 알수록 괜찮은 남자 같기도 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이 팔려서인지, 사람들의 붐비는 가운데 어떤 덩치 큰 남자가 지나가며 설희를 밀쳤다. 작은 체구의 설희는 거의 날듯이 바로 옆에 있는 소파로 엎어졌다.
“꺅!”
이 소동에 옥 선생이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유설희 씨. 괜찮아요?”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다행히 소파 위에 엎어져 상처는 없었다. 옥 선생이 그녀를 내려다보자, 설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옥 선생은 손을 내밀었다. 걱정스러워하는 표정. 설희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이때쯤 옥 선생 잔소리가 터져줘야 하는데?”
‘앞은 제대로 보고 다니는 거예요?’라든지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사람 많으니 잘 봐야죠.’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그 대신 그는 따뜻하게 속삭였다.
“혼자 두면 안 되겠다. 내 옆에 붙어 있어요.”
그리고 설희의 팔을 당겨 바로 옆으로 그녀를 끌어왔다.
단단한 남자의 몸이 설희의 몸에 닿는다.
그가 설희의 팔뚝 위에 손을 얹은 채로 계산대로 갔다. 그가 손을 얹은 곳의 피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침대 등 도저히 실을 수 없는 큰 물건이 많아 배달은 다음 주에 받기로 하고 거의 맨손으로 둘은 가구점에서 나왔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설희의 팔 위에 얹어져 있는 옥 선생의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살결이 그대로 닿아 있는 것도 아닌데 몸이 화끈거린다.
이제 사람 없는데…… 어쩌지.
멀어져도 됐지만, 왠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그럼 집에 갈까요?”
설희의 말에 옥 선생이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밥 먹고 가서 짐 풀어요.”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은 3시를 넘었다. 아침에 만나서 밥도 한 끼 안 먹다니. 설희야 가구를 보다가 음식 먹는 것을 잊었지만, 옥 선생은 자기 물건도 아닌 것들을 보면서 밥도 못 먹었다.
그런 옥 선생에게 미안해 설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배고프시죠?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살 테니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어디 갈까요?”
“글쎄, 뭐 드시고 싶으세요?”
“집 근처에 괜찮은 데 있는데 이탈리안 괜찮아요?”
옥 선생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옥 선생의 차를 타고 달렸다. 한참을 달려 집 근처로 돌아와 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냥 편한 파스타 식당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세련된 분위기에 설희가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설희는 그냥 아주 편한 면원피스 차림이었다.
이런 옷 입고 들어가도 되나?
약간 꺼려지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생각지도 못한 느낌에 옥 선생에게 설희가 물었다.
“여기 자주 오세요? 되게 분위기가 좋네요. 전에 간 레스토랑도 좋았는데, 좋은 곳을 많이 아시네요.”
그러자 은우가 설희를 물끄러미 보았다.
“처음 왔습니다. 알아봤어요.”
그리고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데이트할 때 오려고.”
“…….”
“남에게 보여주기식 데이트가 아니라, 진짜 데이트를 하러.”
은우의 그 말에 설희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