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미치겠다, 너 때문에.
(29/80)
29화. 미치겠다, 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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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미치겠다, 너 때문에.
2023.02.07.
“정말 미쳤구나, 유설희.”
집에 들어와 부모님께 인사도 하지 않고 뛰어 들어가 설희는 침대에 뛰어들었다.
지금 누군가에게 이 빨갛게 익은 얼굴을 들키면, 그러면…….
마지막으로 바라본, 은우의 모습으로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이 드러날 것만 같아서.
자신을 바라보던 은우의 얼굴. 긴 속눈썹 밑에 젖은 눈동자. 그리고…….
설희는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차갑게 보이지만, 사실은 돌마래 동물병원의 옥은우 선생은 말은 뭐라고 뭐라고 해도,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양이 소리가 아픈데도 구해줄 수 없던 것에 그렇게 풀이 죽어서는.
평소처럼 당당하게 굴지 말이야. 그랬으면 이렇게 마음 쓸 필요도 없었을 텐데.
설희는 침대 위에서 뒹굴 구르며 저 멀리 세워둔 전신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하아. 지금 옥 선생님은 무슨 생각하고 있을까.”
혹시 이미 잘까?
아픈 고양이 소리 생각?
아니면…….
거울 안의 자신의 부푼 입술을 보고 설희는 숨을 꼴깍 삼켰다.
나랑 같은 생각 중일까.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 키스 때문에 흥분해 붉게 달아오른 입술, 자신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곡선으로 휘던 눈꼬리. 맨날 땍땍거려서 연애 못 할 줄 알았는데, 키스를 왜 이렇게 잘한담.
사람 간 떨리게.
설희는 날도 더운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잠들 수 없는 밤이 깊어져만 갔다.
***
고통의 하룻밤이 지났다.
“으, 머리 아파.”
설희가 숙취와 수면 부족 때문에 퀭한 얼굴로 병원 출근을 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언제나의 평온한 일상이 흘러갔다.
어제의 일은 꿈이었던가.
오늘 병원으로 와서 도대체 옥 선생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했던 것이 바보 같기만 했다.
물론 아직 진료 시간이기는 했지만.
어제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듯 너무나 평온하게 보이는 옥 선생을 보고 설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설희는 민망해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데 은우는 너무 멀쩡해 보여. 화가 난다.
화가 난다기보단, 당혹스럽달까.
설희가 손에 거즈를 든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런 설희의 귓가를 뾰족한 목소리가 흔들었다.
“설희 씨.”
“…….”
“혹시 눈뜨고 잠들었습니까?”
“네?”
눈을 들어보니, 삐딱하게 은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새겨져 있다.
“……뭐, 뭐라 하셨어요?”
“프렌치불도그 행복이 혈액검사 결과 나왔는지 기계 가서 확인해달라고 했습니다만.”
어제의 술자리에서 부드러웠던 목소리와 달리 오늘 병원에서는 한결 날카로운 소리였다.
어젯밤 술자리에 나왔던 남자는 혹시 숨겨둔 일란성 쌍둥이 아니야? 어떻게 저렇게 다를 수 있지?
미워하지 말라고 하던 그,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남자는 어디 갔냐고.
“아, 네. 죄송해요.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그가 10살 먹은 프렌치 불도그를 잡고 신체검사를 할 동안, 설희는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는지 확인하러 갔다. 결과지가 나와 있어, 팔랑팔랑 종이를 든 채 그에게 돌아왔다.
“결과 나왔습니다. 여기.”
“고마워요.”
혈액검사 결과지를 은우에게 전해 줄 때, 손끝이 잠깐 그의 손에 닿았다.
길고 단단한 손.
“아.”
찌릿, 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퍼진다.
평소 같으면 아무 생각 안 들었을 텐데, 오늘은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일하면서 수십 번을 스쳤을 피부. 그러나 지금은 그 전과는 매우 달랐다.
따끔할 정도로 짜릿한 전기가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무심결에 낸 소리에 은우의 새까만 눈동자가 설희를 향했다.
왜, 손끝 닿은 거 가지고 왜 난리냐고 그러려고?
아니면, 키스 가지고 왜 그렇게 민감하게 구냐고 그러는 거 아니야?
술 취하면 사람들한테 뽀뽀하는 게 자기 습관인데, 설희 씨처럼 구는 사람 처음 봤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옥은우 씨.
설희와 스쳤던 단단하고 긴 손가락 끝을 잠시 은우가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설희 씨가 들어갈 방의 세입자가 방을 뺐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시간 되면 같이 방 상태 보러 가지 않겠습니까?”
“아.”
“도배는 다시 할 건데,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알아둬야 하니까.”
은우의 제안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 드디어 나갔다니 반가운 소리다. 귀엽고 귀여운 곰곰이는 매일 병원에서 있는 게 서러운 모양이었다. 드디어 같이 집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은우랑 휴일에 둘이 만난다니. 지금까지 일요일에 옥 선생과 만난 적이 없었다. 오늘 일이 있어서 창피하기도 했고.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집주인이시니까.
“몇 시가 좋으세요?”
설희의 말에 은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다음 날, 약속 장소 앞.
병원 근처의 역에서 보기로 했다. 그와 약속 시간을 정해서 밖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라, 왠지 은우를 발견하곤 오묘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평소, 가운 안에 입는 셔츠에 바지 차림과 달리 오늘 그는 좀 더 편한 복장이었다. 평소보다 더 몸이 드러난달까. 떡 벌어진 가슴, 너른 어깨, 탄탄한 체구가 그대로 보였다.
날씬한 줄만 알았는데.
얼굴까지 조각같이 잘생긴 그가 가만히 손목시계를 보고 있더라니, 주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확실히, 멀리서 보면 잘생겼단 말야.”
감탄하는데, 남자가 눈을 딱 들었다.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기다리게 한 게 미안해 그를 발견하고 뛰어가는데, 은우는 천천히 오라며 손을 저었다. 속에서 무언가 간질간질한 게 피어올랐다.
데이트 같아.
약속해서 만나고. 만나고 나서 뭔가 설레고.
문득 든 쓸데없는 아이디어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지금 왔어요.”
쓸데없는 생각에 설희의 얼굴에 어색함이 퍼졌다.
병원 근처의 역에서 집까지는 5분 거리였는데, 얼마나 어색한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바닥만 보고 걸었다.
자박자박. 걸어가면서도 갑자기 침묵이 어색해져 설희가 고개를 들었다.
“옥 선생님은…… 대단하시네요. 아직 나이가 많지 않으신데 오피스텔도 가지고 계시고.”
“병원만 왔다 갔다 하니 돈 쓸 데도 별로 없고. 그냥 저축 개념이죠.”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설희의 눈은 바닥만 보고 그에게서는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대화 내용도 키스한 날의 이야기나, 둘 사이의 감정과는 아무 상관 없는 별거 아닌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한가한 말을 하며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텅 빈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불이 없어 캄캄한 방 안으로 들어가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둡고 닫힌 방에 옥 선생과 둘이.
“아.”
설희가 자세를 고쳐 잡고 은우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나 왜 이러지? 옥 선생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나만 하나하나 신경 쓰는 느낌.
그런 자신이 싫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사이, 은우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밝은 햇빛 아래서 보는 방도 상당히 깨끗했다. 도배만 하면 거의 새집 느낌이었다.
“어때요?”
“좋아요. 그때 봤을 때보다 훨씬 넓네요.”
“가구가 빠졌으니까.”
여기가 내 집이구나.
내 첫 집.
설희는 작은 방을 대학교도 부모님 집에서 다녀서 그 흔한 자취 한 번 못 해봤다. 방을 꾸미고 싶어도 엄마 잔소리에 꾸밀 수가 없었다.
어떻게 꾸밀까? 뭘 사면 좋을까?
한참 구경을 하던 설희에게 은우가 말을 건넸다.
“이미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기본 가전은 빌트인이니까, 다른 것만 사면 되겠네요.”
“웬만한 건 다 오피스텔에 있어서, 침대랑 서랍장이랑 책상 의자 정도만 사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애견용품도 구입해야겠네요.”
“병원에서 남는 것도 많이 가져와요.”
“그래도 될까요?”
“남는 건데요, 뭘.”
여기에 침대를 놓고. 서랍장을 놓고. 아, 스탠드도 하나 사고.
방을 어떻게 꾸며야 할지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니 그나마 은우를 덜 신경 쓸 수 있었다. 사야 할 목록을 핸드폰에 적으며, 방의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가구는 어디서 살 거예요?”
“그…… 조립하는 그 큰 가구점 있잖아요. 거기서 사서 해보게요.”
사실 이사하는 게 정해지고 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많이 해봤는데 그 가구점이 예쁘기도 예쁘고 가격도 저렴해서 혼자 살기 시작할 때 딱 좋을 것 같았다. 너무 좋은 거 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혼자 처음 산다고 하니 욕심이 얼마나 생기는지. 벌써 사고 싶어서 모델명을 적어 놓은 것이 있었다. 설희의 말에 은우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가구 조립 해봤어요? 혼자 하기 쉽지 않을 텐데.”
옥 선생의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해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 블로그 보니 다 혼자 하던데. 나도 할 수 있겠지, 뭐.
“본인이 만들 거예요?”
옥 선생의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려고요.”
“언제 사러 갈 거예요?”
“다음 주 일요일 날 아침에 이사하니까……. 사실 짐도 별로 없고 그래서 가방 몇 개만 가져오고 오후에 가게요.”
“흠.”
옥 선생이 설희의 말에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저 자세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왠지 불안했다. 생각에 빠졌던 은우는 잠시 그렇게 멈춰 있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일요일 날 이사 내가 도와줄게요. 같이 그 가구점 가서 사 오죠. 우리 집에 전동 드릴도 있으니 내가 하면 금방 조립이 끝날 거예요.”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설희가 펄쩍 뛰었다. 안 그래도 옥 선생이랑 함께 있는 게 어색했는데, 일요일 날 이사며 가구 조립이며,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러나 은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설희 씨 차 없잖아요.”
“네? 어, 없지만.”
“이사할 때 내 차로 짐 옮기면 되니까 그렇게 하고, 가구도 차로 사 오죠. 못 옮기는 것들은 배달시켜야겠지만.”
“아니에요, 옥 선생님도 주말에 바쁘시고 저, 그리고…….”
설희가 놀라 손을 젓자, 은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내가 도와주는 게 싫습니까?”
“네, 아…….”
싫은 건 아닌데,
싫은 건 정말 아니지만, 긴장이 되어 어쩔 수가 없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그 앞에 있다 보면 초조하고 불안했다.
아까 역 앞에서 그의 잘생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두근거렸던 것처럼, 자꾸만 자신이 은우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까 봐 그게 싫었다.
“싫은 건 아닌데…….”
“아니면 다른 사람이 와서 도와주기로 했습니까?”
“아니요, 절대 그건 아닌데.”
“그럼 내가 도와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설희가 멈칫했다.
당신만 보면, 내가 너무 긴장하니까? 우리가 키스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도대체 이게 뭔 사인지 모르겠으니까?
그렇게는 말 못하지. 설희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못 하자 은우가 씩 웃었다. 보기 좋게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를 보고 설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왜 웃지? 떨리게.
“그럼 내가 오면 되겠네요. 미안해서 그러는 거면 괜찮습니다. 집주인이기도 하고, 그날 원래 이사 오는 거 보려고 했으니까 겸사겸사.”
“정,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설희의 집에는 차가 없었다. 용달을 부를 만큼 짐이 많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택시 타고 올 생각이었다. 사실 은우가 차가 있어서 도와준다고 하면 편하기는 편했다.
몸은 편해지겠지만,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겠지.
“괜찮다니까요.”
“옥 선생님 멀리서 오시는 거 아니세요? 집이 머신데 일부러 오시는 거면 죄송하니까.”
그렇게 설희가 말하자 은우가 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요?”
“음.”
옥 선생이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웃었다.
“설희 씨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뭐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에 저렇게 말했을 때는 그가 이 집 주인이었지. 뭘 또 속였길래. 불안했다.
“저도 사실 이 건물 삽니다. 이 집의 옆옆집 오피스텔.”
옥 선생의 깜짝 발언에, 설희의 입이 딱 벌어졌다.
“우리 옆옆집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