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단 둘이, 술 한잔. (27/80)


27화. 단 둘이, 술 한잔.
2023.01.31.



“이거라도 좀 드세요.”

매니저가 곧 쫓아와 보호자에게 따뜻한 물을 건넸지만 괜찮다며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진찰실에서 은우가 나오자, 보호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리는 어떤가요?”

“보호자님,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심장이 비대해진 것이 너무 심해서, 폐에 물이 찼어요. 지금 약물치료 중입니다.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집에서 기다리시면 어떨까요.”

“전 괜찮은데.”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지금 비에도 젖으셨고…… 상황이 변하면 연락드릴게요.”

“아니, 저…… 여기서 기다리면 안 될까요?”

보호자의 말에 은우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하게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리고 다시 은우는 치료실로 들어갔다.

바삐 치료를 했다. 주사를 놓고, 다시 포화도를 재고. 링거도 끊임없이 맞췄다.

그러나 치료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지런히 물주머니를 바꿔가며 몸을 데우는 데도 체온은 점점 떨어져, 34.5도까지 떨어졌다.

점점 숨이 가빠졌고, 사람들이 만지면 눈을 가늘게 뜨던 고양이 ‘소리’는 나중에는 설희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도 눈썹을 파르르 떨 뿐 미동조차 없었다.

그뿐이었다.

***


 
한참을 지켜보던 은우의 표정이 나아질 일은 없었다. 결국 마음을 정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호자님, 아직 밖에 계시나요?”

설희가 은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젖은 채로 보호자는 대기실에서 떨고 있었다. 옥 선생이 대기실로 나갔다. 걸어 나오는 그를 보고 보호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 소리는?”

“죄송한데 지금,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네요.”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보호자의 젖은 목소리에 천하의 옥 선생 입술도 일그러졌다.


“약물치료를 더 하고 산소실에 넣어 두면 조금 더 연장할 수 있습니다만…….”

탁.

은우의 말에 보호자가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내가 좀 더 빨리 데려올걸. 다리 아플 때 바로 데려왔으면…… 그랬으면, 아니 자주 건강검진 올걸.”

결국 눈물이 흘러나왔다. 가녀린 어깨가 한동안 흔들렸다. 텅 빈 병원에 그녀의 울음만 울려 퍼졌다.


“고양이의 비대성 심근증은 초기에는 알기가 힘드니까, 보호자님 잘못이 아닙니다.”

은우의 위로에도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고운 얼굴에 눈물이 얼룩진다.

얼마나 울었을까.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던 보호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어차피…… 완치는 어렵다는 말씀이시죠?”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보호자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어 옥 선생에 묻자,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집으로 데려가도 될까요? 집에 있는 게 소리도 편할 것 같아서……”

“네, 그렇게 하시죠. 약 조제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은우가 서둘러 약을 조제했고, 설희가 소리에게 다가가 산소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깐 소리가 눈을 떴으나, 다시 힘이 없는 듯 눈을 감았다.

고양이, 소리를 설희가 잘못하면 깨질 듯 조심히 안아 대기실로 가 보호자에게 건네자, 보호자가 고양이를 받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우산을 꼭 쥐고 병원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씁쓸했다.

***

비가 그치지 않는다. 천둥 번개까지 몰아쳤다. 날씨 탓인지 오늘의 마지막 환자는 그 고양이, 소리가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수술을 끝내고 나온 최 선생님도 이야기를 듣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뭐……. 털고 넘겨 버려요.”

하지만 최 선생의 위로에도 은우의 표정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다.

누가 봐도 옥 선생은 평소 같지 않았다.


“퇴근하겠습니다. 설희 씨도 퇴근해요.”

“앗, 네. 그, 옥 선생님은?”

설희의 질문에 매니저가 진찰실을 가리켰다.


“오늘 세미나 취소돼서 안 간대.”

“아…….”

“이런 날은 차라리 세미나 같은 거 참여하는 게 좋은데. 아직 저러고 있네. 옥 선생님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일 마음이 약하다니까. 걱정 말고 설희 씨도 퇴근해요.”

“네에.”

대답은 했지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시선이 그쪽으로 자꾸만 향한다.

다른 직원들이 다 돌아가고도 은우는 진찰실에 남아 있었다.

설희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아 끝까지 청소하며 남아 있다가, 겨우 마음을 정해 짐을 챙기고 진찰실 문을 열었다.

지금 둘은 더없이 어색한 사이였다. 옥 선생이 싫다고 말한 걸 은우가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들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변명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모른 척하고 집에 가는 게 자신의 마음이 제일 편하겠지만.

그렇겠지만.

설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리고는 마음을 다잡고 진찰실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옥 선생님, 저…….”

설희의 말에 옥 선생이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에 윤기가 돈다.


“옥 선생님. 벌써 8시인데…… 퇴근 안 하세요? 업무 아직이세요?”

혹시 우는 건 아니죠?

물론 아니겠지만, 마음이 쓰였다.


“일은 끝났습니다. 조금 아까 케이스를 보고 있었어요. 마음에 걸려서.”

왜 약한 모습 보이고 그래.

180을 넘는 옥 선생은 얼핏 보면 말랐지만 다부진 체격이었다. 날카롭지만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낮은 목소리.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왜 약해지구 난리야.

설희는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옥 선생님, 집에 가시면서 맥주 한잔하실래요?”

계약연애와 상관없이 설희가 사적으로 그를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술자리다. 은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괜한 말을 했나? 혼자 있고 싶은 거 아닐까. 괜히 끼어들어서 더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그러나 설희의 예상과는 달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망부석처럼 앉아 있던 그는 자리에서 쉽게 일어났다.


“맥주는 됐고, 소주나 마시러 갑시다. 소주, 마시죠?”

 

***

소주 못 마신다고 할걸.

설희는 실내포차로 들어가면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냥 집에 가면서 위로 겸 가볍게 맥주 한잔 걸칠 셈이었는데 뭔가 일이 커져 버렸다. 그냥 치맥이나 하지. 이놈의 오지랖.

그러나 그냥 내버려두기엔 마음에 걸렸다.


“앉아요.”

“네.”

둘이 앉아 중간에 서비스로 나온 홍합탕을 두고 어색하게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부를 걸 그랬나. 매니저님이나. 단둘이 와서 그런지 더더욱 분위기가 숨이 막혔다.

설희가 결국 침묵을 참다 못해 메뉴판을 들어 옥 선생을 보여줬다.


“뭐 좋아하세요?”

“설희 씨 먹고 싶은 거 시켜요.”

먹고 싶은 거 시키라는 게 제일 어렵던데. 오늘 온 집은 꽤 맛있는 음식점이었다. 메뉴들이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뭘 시킬까 망설여졌다.

이 상황에서도 음식 고민을 하다니, 내 식욕도 정말 못 말릴 일이다.


“몇 개나 시킬까요?”

설희의 조심스러운 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옥 선생이 작게 웃었다.


“하하. 설희 씨 먹고 싶은 만큼 시켜요.”

왜 웃지? 설희는 메뉴를 펼치며 입술을 삐죽였다.


“소주니까 어묵탕? 그리고 계란말이? 아, 밥도 안 먹었으니 오돌뼈 주먹밥도 시킬까요?”

“그래요. 그렇게 시키면 되겠네.”

점원을 불러 주문하자 소주 한 병과 그녀가 말한 어묵탕, 계란말이, 오돌뼈 주먹밥이 순서대로 나왔다.

밥 위에 김 가루가 솔솔 뿌려져 있는 오돌뼈 주먹밥이 나오자마자, 은우는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조물조물 밥을 주무른 다음 동글동글하게 주먹밥을 말았다.

다른 사람 시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솔선하는 타입이네.


“자,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동글동글한 주먹밥. 남이 해줘서 그런지 더 맛있다.

오물오물거리며 설희는 소주의 뚜껑을 따서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투명한 액체가 콸콸 쏟아진다.


“술 잘 마셔요?”

옥 선생의 질문에 설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그럭저럭요. 소주 한 병 정도?”

설희의 대답에 옥 선생의 눈썹이 찡긋거렸다.


“생각보다 많이 마시네?”

“왜 생각보다예요?”

“체구가 작으니…… 주량도 적은가 했죠.”

설희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잘 마시고, 먹기도 많이 먹죠?”

설희의 질문에 옥 선생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런 이야기는 안 했는데.”

“이야기는 안 했어도 생각했잖아요.”

설희의 핀잔에 옥 선생이 소주를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다시 웃었다.


“들켰습니까?”

그가 웃을 때,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서 더 빛이 났다. 아까 낮의 일이 신경 쓰였던지 힘이 빠진 느른한 눈, 붉은 입술, 그리고 날렵한 턱선까지.

술 때문인지, 아니면 어두운 조명 때문인지.

매일 보는 얼굴인데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은우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웃는 모습이 신선해서.”

“나도 인간이에요, 웃는 일도 있죠.”

“병원에서도 평소에도 그렇게 잘 웃으시면 좋을 텐데요.”

그 말에 은우는 또 웃었다. 부드럽게 입술이 호를 그렸다.

어색할 줄 알았던 둘의 대화는 소주 덕분인지 의외로 술술 풀렸다. 그래서 딱 한 병만 나눠 마셔야지 했던 자리에, 소주 한 병이 추가되었다. 병원을 나올 때만 해도 어두워 보였던 옥 선생의 표정이 많이 밝아져 있었다.


“옥 선생님은 왜 수의사가 된 거예요?”

“궁금해요?”

“조금.”

은우가 머리를 기울였다. 삐죽 드러난 목 근육이 단단해 보였다.


“계약 때문에 물어보는 거예요? 할머니 방문 때문에?”

은우의 말에 설희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화난 표정도 아니고 슬픈 표정도 아닌 무표정에 가까웠다.

계약이나, 할머니께 방문하는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계약 때문이라기보단……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요.”

설희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은우가 고개를 까닥했다.


“이상한 질문을 했네요.”

“아뇨, 그, 하실 수 있는 질문이죠.”

그러고 보니, 그에게 연애를 위장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질문은 한 적 없었다. 은우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수의대는 성적 맞춰 들어간 거예요. 시시하죠?”

“시시하긴요. 공부 잘해서 들어가신 건데. 근데…… 그런 거치고 되게 열심히셔서, 어렸을 때부터 수의사가 되고 싶으신 줄 알았어요.”

어쩌다가 그냥 수의사가 된 것 치곤 그는 열정적이었다. 설희에게 엄격한 것만큼이나 그 자신에게 엄격했다. 주변 다른 수의사 선생님들보다 공부도 많이 했다.


“정말 좋은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졸업하고 나서부터예요. 내가 노력해서 공부했다면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을 놓치는 게 싫어졌습니다.”

“…….”

“마치, 오늘처럼.”

그리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은우의 입맛이 쓰디써 보였다. 설희가 얼른 한잔 더 그에게 따르려 소주병에 손을 뻗었는데, 병이 텅 비어 있었다.


“어.”

벌써 두 병이나 먹었네.

설희가 은우를 보았다.


“한 병 더 마실까요?”

아까까지만 해도 대충 그를 위로하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귀찮고도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은 왜인지 이대로 그를 돌려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 마시죠.”

“…….”

“더 마시면, 선을 넘어버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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