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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마음까지 젖은 날 (26/80)


26화. 마음까지 젖은 날
2023.01.28.


올해는 내내 가뭄이 져서 농가가 어렵다고 그랬는데, 마치 미뤄뒀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처럼 오늘은 폭우가 내렸다.

마치 하늘이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온다.


“이래 가지고는 집에 가는 것도 큰일이네.”

지난번, 매니저님의 질문에 ‘옥 선생님 싫어해요.’라고 선을 그은 이후 둘 사이는 어려워졌다.

들은 걸까. 듣지 못한 걸까. 그 이후로도 미묘한 날들이 이어졌다. 몇 번인가 같이 출퇴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딱히 깊은 대화는 없었다.
 


“오늘 피곤하신가 봐요.”

 
그렇게 설희가 말할 정도로 은우는 말수가 유난히도 적어졌다. 그마저도 설희의 말에 ‘네, 조금.’이라고 답한 게 다였다.

어색했다. 그래서 함께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또 아쉬웠다.

이상한 감정이다.

설희는 접수대에 서서 비가 주룩주룩 오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궂어서인지 오늘은 환자가 거의 없었다.

최 선생님과 테크니션 채린은 수술에 들어갔고, 원장 선생님은 오늘도 쉬시는 날이어서 병원 안은 한가했다. 대기실에는 매니저와 설희 둘뿐이었다.


“오늘은 사람이 진짜 없네요.”

“비 오면 그래요. 뭐 급한 일 아니면 이런 날은 병원에 잘 안 오려고 하죠. 내 친구가 사람병원에서 일하는데, 사람병원에서도 비가 오면 사람이 적게 온대요. 동물병원은 더 심하지. 비가 오는데 개 데리고 산책하기도 힘들고, 이동장 들고 우산 들기도 번거롭고 말이야.”

“그렇구나…….”

“그래도 이런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늘 바빴으니까, 쉬어 갈 겸. 재고 정리도 하고 그동안 못했던 서류 일도 하고.”

빗방울은 그칠 줄 몰랐다. 정기적으로 예약하고 오는 성실한 보호자들도 예약을 취소할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

오늘쯤 오리라 생각했던 병원의 단골, 요크셔테리어 ‘삐삐’조차 비 때문에 오지 않았다.

오후 내내 비가 오다가 빗줄기가 더 세질 때쯤 저 밖에서, 굵은 빗방울 사이로 한 젊은 아가씨가 우산을 한 손에 들고, 한 손에는 이동장을 들고 병원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기, 환자 오셨는데.”

매니저가 고개를 쭉 뺐다.


“오늘 예약환자도 없는데. 음…….”

석연치 않은 목소리에 설희가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왜요?”

“아니,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 예약 없이 오는 환자들은 심각한 상태일 때가 많거든요. 봐요, 표정도 안 좋고.”

정말 병원에 오는 게 맞는 걸까?

잠시 병원 앞에서 서성이는 그녀를 보고 그냥 혹시 지나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곧 그녀가 병원 문손잡이를 잡았다. 설희가 서둘러 뛰어나가 문을 열어 주자, 상대방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여성은 우산을 쓰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비바람이 몰아쳐 온몸이 푹 젖은 상태였다.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오늘 예약 안 했는데, 진료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그러자 매니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옥 선생님 약품 정리 중이셨는데, 불러올게요.”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도 파리했고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춥지 않으세요?”

여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동장에서 고양이를 꺼내 들었다. 물에 푹 젖은 그녀와 달리, 이동장은 우산 속에 잘 넣고 다녔는지, 털에 물방울 하나 맺히지 않은 귀여운 페르시안 고양이가 나왔다.


“어머, 귀여워라. 근데…….”

보통 고양이들은 처음 보는 사람의 품에 잘 안기지 않고 도망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고양이는 힘없이 설희의 몸에 안겼다.

무언가가 이상하다. 아직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르는 설희였지만,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고양이는 숨을 할딱거리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초보자인 설희가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진찰실로 가실까요?”

진찰실로 들어가서 고양이를 진찰대 위에 살짝 올려놓자, 고양이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설희는 한 손으로 고양이 머리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우리 병원 오신 적 있나요?”

“네, 예전에 백신 맞으러 한 번.”

“아이 이름을 좀 여쭤봐도 될까요?”

“네, 소리예요.”

곧, 문이 달칵 열리고 하얀색 가운을 입은 은우가 진찰실 안으로 들어왔다. 설희는 고양이를 그에게 맡기고 관련 차트를 옥 선생의 컴퓨터에 띄웠다. 그리고 직원용 화장실에서 깨끗한 수건을 가져다가 보호자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물기 좀 닦으세요, 감기 걸리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보호자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했지만, 수건으로 얼굴을 닦지 않고 그저 꼭 쥐고만 있었다.


 
은우가 고양이의 털을 쓸어내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어떻게 오셨나요?”

옥 선생의 질문에 보호자가 여전히 입술을 덜덜 떨면서 말을 했다.


“며칠 전부터 다리를 아파하는 것처럼 절뚝절뚝하길래, 다리를 다친 줄 알고 토요일에 병원에 데려가려 했는데…… 저…… 오늘 아침부터는 숨을 헉헉대고, 제대로 자리에서 못 일어나서…….”

횡설수설하는 말은 울음 때문에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보호자의 말에 옥 선생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몸 상태 좀 볼게요. 어디, 입 좀 벌리자.”

그리고 헉헉대는 고양이의 입을 열어보았다. 혀와 잇몸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렇게 하얀 고양이의 잇몸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동물병원의 고양이들은 늘 핑크색이었는데.


“다리를 아파한다고 하는 게, 뒷다리였죠? 다리를 좀 끌면서 걷는 느낌이었나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발바닥이 보라색이네…….”

은우의 말에 옅은 한숨이 스며들어 있었다. 심장음을 듣고 체온을 재고 나서 부드럽게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엑스레이 찍고 심장 초음파 해봐야 알겠지만, 우선 지금 상태에서는 심근증에 의한 합병증으로 보입니다.”

“심근증……? 우리 소리가 심장이 안 좋단 말인가요?”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보호자의 질문에 옥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장의 근육이 두꺼워져서 제대로 심장이 뛰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피가 온몸에 돌아야 하는데 제대로 돌지 못해서 이렇게 합병증이 생깁니다.”

“전 다리가 아픈 줄…… 알았는데. 다리가 아파서 숨을 헐떡이는 줄 알았어요. 아프니까, 그래서.”

옥 선생이 안쓰러운 듯 울먹이는 보호자에게 조심스럽고 천천히 설명했다.


“심장이 비대해져서 제대로 기능을 못 하면, 피가 고여서 핏덩이가 생겨요. 고양이의 경우 뒷다리에 혈전이 가서 막혀서 다리가 제 기능을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우답지 않게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얇게 뜬 눈에 근심이 서린다. 매일 옥 선생을 가장 가까운 데서 봐왔지만, 이런 표정을 한 것은 처음 봤다.

많이 안 좋은 것이다. 그 막말하는 옥 선생이 이럴 정도면. 옆에 서 있는 설희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은우가 고양이 소리를 한 번, 그리고 보호자를 한 번 보고는 아주 어려운 말을 하는 것처럼, 몇 번이고 말을 골랐다.


“그런데, 지금 상태가 심각해요. 폐동맥 혈압이 상승해서 폐수종이 생겨 제대로 숨을 못 쉬고 있어서…….”

“…….”

“검사를 더 해봐야 할 텐데, 괜찮으실까요?”

보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는 간절함이 어려있었다.

정말 자식처럼 키운 고양이인 것 같았다. 저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하긴, 설희도 곰곰이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곰곰이가 아프다고 하면 정말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뭐든 소리가 안 아프게만 해주세요……. 돈이 많이 들어도 좋아요. 뭐든 좋아요.”

“잠시 대기실에 계시죠. 제가 상황 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옥 선생의 눈을 바라보고 물었다.


“많이 위험한 상태인가요?”

옥 선생이 잠시 말을 잃었다.

뭐라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설희는 그런 옥 선생의 조심스러운 표정에서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웬만큼 상태가 나쁘지 않고서야, 옥 선생은 자신을 믿어달라고 굳건히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보호자님이 힘내셔야죠.”

그렇게 보호자에게 말하는 게 옥 선생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설희는 은우만 봐도 무서워 벌벌 떨 정도로 무섭지만 환자들에게만은 다정한 수의사로 유명한 은우였는데.

그런데 지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런 모습을 설희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후가 많이 좋지 못할 수도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네.”

조심스럽게 대답한 옥 선생의 말에 보호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선 대기실에서 잠시 대기해주세요.”

슬픔에 흔들리는 보호자를 매니저가 서둘러 쫓아와 부축하고 데리고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옥 선생은 재빨리 고양이를 안아 심장 초음파를 보고, 산소포화도를 재었다. 고양이 소리는 계속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소리 체온이랑 호흡수 좀 재주세요.”

“네, 선생님.”

은우의 지시에 따라 설희는 얼마 전에 배운 대로 소리의 체온을 재었다.

35도.

잘못 쟀나 싶어 다시 한번 측정했다.

34.9도.

같은 수준이었다. 지금까지 설희가 고양이의 체온을 재서 37도 밑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양이의 평균 체온은 37.5도에서 39도 사이.

내가 잘못 잰 거겠지.

이렇게 바쁜 때에 무슨 실수냐고, 은우에게 눈물 쏙 빠지도록 혼나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틀렸기를 바랐다.


“옥 선생님, 죄송한데. 체온이 이상한데요.”

설희의 말에 고양이 소리에게 주사를 놓던 옥 선생이 눈을 들었다. 그러나 은우는 놀라지 않았다.


“낮죠?”

예상했다는 듯한 말에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마비된 뒷다리뿐 아니라 몸 전체가 차가우니까 낮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얼마나 낮아요?”

“35도요.”

“큰일 났네. 호흡수는?”

“60입니다.”

“몸 따뜻해질 수 있도록 뜨거운 물주머니와 함께, 소리, 산소실에 넣어주실래요?”

“네, 알겠습니다.”

옥 선생의 지시대로 얼른 뛰어서 물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넣어 소리와 함께 산소실에 넣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작게 눈을 뜨고 있던 소리는, 힘에 부쳤는지, 졸린 건지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옥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그의 잔소리인 줄 알았는데, 한숨 소리가 더 설희의 가슴을 찔렀다.


“그렇게 안 좋나요?”

설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너무 비대해져서 어려워요. 거의 기능을 못 하는 수준이야. 대사 기능도 너무 많이 떨어졌고. 지금 이 고비는 넘긴다고 해도…….”

오래 버티기는 힘들다.

차마 다 하지 못한 그의 뒷말을 설희는 감지했다.


“보호자랑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네요.”

대기실로 나가는 옥 선생 뒤를 설희도 쫓았다.

비가 와서 아무도 없는 환자 대기실에는 보호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비 맞은 고양이처럼 처량하게 어깨를 구부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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