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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Falling in love (25/80)


25화. Falling in love
2023.01.24.


10시가 다 된 시간.

무슨 일일까.

아쉬운 마음으로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핸드폰을 집었다. 친하게 지내는 요크셔테리어 ‘삐삐’의 보호자로부터 온 문자였다.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 지금 병원 아니시죠? 삐삐 일 때문에 연락드립니다.]

삐삐는 어제 병원에 왔었다. 워낙 자주 오는 삐삐이니 큰 병이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은우는 그녀가 싫지 않았다. 죽은 딸의 반려견을 소중히 기르는 그녀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부인은 좋은 사람이었다.

지난 추석에 혼자 사시는 분이 제대로 추석은 쇠셨겠냐며, 직접 담근 식혜를 자신에게 선물해준 그녀를 떠올렸다.


[급한 일이 있으시면 나가보겠습니다.]

보호자에게 연락하자마자, 전화가 왔다. 핸드폰 화면에 ‘삐삐.’라고 떴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 반대쪽에서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선생님, 죄송해요. 쉬시는데. 지금 집이시죠?

“괜찮습니다. 삐삐 무슨 일 있나요?”

- 삐삐가 장난감 가지고 장난치다가 뾰족한 곳에 부딪혔는지, 피부가 찢어졌어요.

부인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얼마나 큰 상처인가요?”

- 엄지손톱만 해요. 깊지는 않은데…….

“피는 많이 나나요?”

- 아니요, 피는 신기하게 거의 안 나더라고요. 근데 삐삐가 신경을 쓰면서 계속 핥으려 하네요. 어쩌죠?

필시 피부만 조금 찢어진 것이겠구나. 소독약을 좀 바르고 내일 진찰해도 될 터였다. 하지만…….

은우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별 할 일도 없는 걸 뭐.

은우의 집에서 병원까지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가서 잠깐 소독해주고 다독이고 오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안 그러면 오늘 밤 내내 부인은 끙끙 앓으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한 본인을 자책하겠지.


“병원으로 오세요. 제가 지금 나갈게요.”

- 저, 정말 그래도 되나요?

“네. 걱정하지 마시고 오세요.”

옷을 챙겨 입고 서둘러 나왔다. 10시가 넘었으니 병원에는 아무도 없겠지. ‘삐삐’가 오기 전에 문을 열고 불도 켜놓고 싶었다. 병원이 시야에 들어오자 간판은 꺼져 있지만, 안의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누구지. 최 선생님인가.”

아니면 가끔 밤에 심심해서 순찰을 하는 원장님일 수도 있었다.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가니 자신의 진료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진찰대 위에 놓고 머리를 책 위에 올린 채 코를 골며 자는 여자. 작은 체구에 동그랗게 말아 올린 머리.


“유설희 씨.”

왜 여기서 자고 있지?

펼쳐져 있는 책은 추간판 헤르니아(디스크)관련 서적이었다. 꽤 열심히 공부한 걸까. 그녀의 손에 잡혀 있는 메모장에 빼곡히 관련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녀의 앞까지 다가가도 그녀는 전혀 눈치도 못 챈 채 잠에 푹 빠져 있었다. 그녀가 무언가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하는 거지?

궁금해서 허리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옥 선생님……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웃음이 삐져나올 것 같아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게, 혼나도 아주 단단히 혼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꿈속에서도 나한테 혼나고 있나?

내가 너무한가?

설희는 잘하다가도 긴장하면 실수하는 버릇이 있어서 은우는 때로 딱 부러지게 지적했는데, 그게 그녀에게는 부담이 되었던 걸까.

은우는 그렇게 잔뜩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


 
자신의 손바닥만큼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눈코입이 들어 있다. 꿈에서 무엇을 보는지, 꼭 감긴 눈꺼풀이 잠시 파르르 떨리다가, 다시 움직임을 멈추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이렇게 자세히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다.


“우응.”

은우에게 뭔가 반박하는 걸까? 분홍의 도톰한 입술이 오물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은우의 입에서 스르륵 말이 흘러나왔다.


“귀엽네.”

갑자기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놀라 은우는 몸을 멀찍이 뗐다.

귀여워? 아니야, 아니야.

그때, 설희가 쭉 뻗어 베개처럼 이용하던 팔을 위로 들며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아웅…….”

그녀는 제 앞의 은우를 발견하고는 두 팔을 하늘에 쭉 만세 자세로 편 채로 굳었다. 그리고 눈을 껌벅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옥 선생님?”

이 자세도 귀엽네.

은우는 웃음이 배시시 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았다. 예의 엄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우리 집에 옥 선생님이?”

잠이 덜 깼는지, 멍하니 은우를 바라보며 한참 눈을 깜빡였다.


“병원이에요. 정신 차리세요.”

“병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제야 자신이 병원에서 잠이 든 것을 알아챘다. 그녀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그랬구나. 잠들었구나. 죄송합니다. 어……. 근데…… 아까 퇴근하셨잖아요.”

그리고 설희는 눈을 크게 뜨며 소리 질렀다.


“벌써 아침인 거야?”

무슨 드라마 보는 것도 아니고, 시트콤 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앞에서 표정이 휙휙 바뀌는 설희를 보는 것은 꽤 재밌었다. 하지만 곧 ‘삐삐’가 올 게 분명했다.


“아직 밤입니다. 응급 환자가 있다길래 온 거예요. 그러니까 정신 차리세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서둘러 설희가 진찰대 위의 책을 치웠다. 그녀가 책을 치우자마자 은우는 소독약을 칙칙 진찰대 위에 뿌렸다.

수건으로 재빨리 진찰대 위를 닦고, 강아지용 상처 소독약과 혹시 몰라 다른 도구들도 준비해 놓았다. 설희가 책을 다 정리하고 진찰대 쪽으로 와서 은우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그렇게 무섭나?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이 겁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다른 테크니션, 채린도 자신의 눈치를 많이 보긴 했지만, 채린의 경우 한참 어렸고, 자신뿐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 눈치도 많이 봤다.

근데 유독, 유독 설희는 자신만 어려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휴게실 같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면, 은우가 등장하는 순간에 조잘조잘 잘도 움직이던 설희의 입이 뚝 멈췄다.


“저, 어떤 환자가 오나요?”

눈치를 살피던 설희가 조심스럽게 묻자, 은우가 말했다.


“요크셔테리어 삐삐요. 상처가 났다는데, 어머님 걱정이 많으시니까.”

“아…… 삐삐요.”

워낙 자주 오는 개여서 그녀도 금방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입구에서 딸랑이는 종소리가 났다. 설희가 진찰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밤이라 조용해서 대기실에서 부인과 이야기하는 설희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어머! 간호사 선생님도 오셨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에요, 저는 아직 퇴근 안 하고 있었어요.”

보호자와 다정스레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인정하기 싫었지만, 설희는 보호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모자란 면이 많고 아직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은데. 보호자들은 설희에게 말을 곧잘 시키며 설희가 없는 자리에서 은우에게 그녀의 칭찬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삐삐’의 보호자가 그랬다.

삐삐와 보호자, 설희가 진찰실로 들어오자, 은우가 미소를 지었다.


“오셨어요?”

“죄송해요, 선생님. 정말 이제 밤에 선생님께 연락 안 드리려고 했는데, 삐삐가 다쳐서 여기가 찢어졌지 뭐예요.”

복슬복슬한 갈색 털의 삐삐는 병원에 워낙 자주 와서인지 긴장도 하지 않고 늘어진 상태로 은우를 바라보았다. 은우는 삐삐의 머리를 살살 긁으며, 다쳤다는 다리 부위의 털을 갈라보았다.

그 안에는 1센티 남짓한 작은 상처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털이 긴 개의 경우, 이 정도 상처를 이렇게 빨리 발견하기 어려웠다. 어머님이 얼마나 열심히 삐삐를 돌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소독만 하면 되겠네요. 별문제 없을 겁니다.”

“그래요? 아휴…… 내가 또 별일 아닌데 왔네요.”

“아니에요, 저도 어차피 할 일 없이 그냥 있었습니다.”

상처를 소독하고 상처를 핥지 못하도록 하는 엘리자베스 칼라(깔대기)를 씌우려 가지러 가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설희가 칼라를 들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걸 찾는 줄 어떻게 알았지.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입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사이즈 맞게 들고 왔어요?”

“네. 제일 작은 걸로 가져왔어요.”

그녀의 말처럼, 칼라는 삐삐의 목에 딱 들어맞았다. 엘리자베스 칼라를 씌우자 삐삐는 귀찮다는 듯 몸을 조금 배배 꼬았다. 그러나 곧 은우의 손이 삐삐의 배를 긁자, 삐삐는 불쾌함을 잊고 기분 좋은지 눈이 가늘어졌다.


“항생제를 지어드릴게요. 안 먹어도 되겠지만, 혹시나 해서.”

“고맙습니다.”

들어올 때 초조했던 얼굴과 달리 한결 밝아진 상태로 삐삐와 보호자가 돌아갔다.
나오길 잘했다. 괜히 내일 진찰하자고 했다면, 은우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설희 씨도 집에 갈 거죠?”

“네? 네.”

설희가 서둘러 자신의 물건을 챙겨 나오자, 병원의 불을 껐다. 밖으로 나와 열쇠를 잠그고 돌아서자, 시원한 밤바람이 은우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이었을까, 은우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설희 씨, 맥주 한잔 마시고 갈래요?”

맥주? 미쳤나?

은우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자신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왜 저런 말을 했지? 병원에서 회식하는 일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난 적은 없었다. 고작해야 점심시간에 근처로 밥 먹으러 가는 것이 다였다.

근데 왜 이런 말을 한 거지? 귀찮아서 병원 사람들과 어울리려 한 적 없었는데. 자신의 말에 자신만큼이나 설희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거절하겠지, 나 싫어하잖아.

거절당할 줄 알면서도 은우는 자신도 모르게 발로 바닥을 툭툭 쳤다.

설희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한데, 전 내일 출근이라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선생님도 안녕히 들어가세요!”

하고 몸을 휙 돌려서 가 버렸다.


“하.”

은우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올렸다.


“나도 내일 출근이에요. 유설희 씨.”

무언가 답답한 마음으로, 말을 툭 허공에 내뱉었다.

***


 
예전 일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던 그때와 지금,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렇게, 설희를 태운 은우의 차가 부드럽게 설희의 집 앞에 멈추어 섰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그녀의 감사 인사에 은우가 눈썹을 쓱 끌어올린다.


“네.”

입술을 열면, 불퉁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은우는 말을 잠시 멈췄다.


“이제 이렇게 데려다주시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얼마 지나지않아 두 사람은, 은우의 할머니를 보러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이 얕은 관계도 끝이다. 시원섭섭한 듯한, 아니 시원한 듯한 설희의 말에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오늘 낮의 내용을 들킨 게 아닐까 불안해하는 눈동자가 제게 비친다.

유설희는, 옥은우를 싫어한다.

지금은.

하지만 곧 바뀔 것이다. 이미 마음을 자각한 이상, 은우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니, 멈출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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