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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나쁜 남자 (21/80)


21화 나쁜 남자
2023.01.10.



“보고 싶었어, 설희야.”

그 짧은 시간. 네가 여기 오는 동안에도 나는 널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은우는 말했다.

설희의 입술이 반쯤 벌어졌다.

물론, 은우는 업무적으로는 냉정하고 깐깐했어도 원래부터 업무 외의 일에서는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남자였다. 하지만, 이렇게 다정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로 사랑이 넘치지는 않았다.

누구도 이렇게 자신을 바라본 남자는 없었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 오롯이 설희만이 비쳤다.


“어, 어…….”

너무나도 평소와 다른 모습에, 설희가 순간 당황하자 은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나 먼저 와 있었어. 같이 못 온다고 헤맨 거 아니지?”

“…….”

“걱정하지 마. 이렇게 잘 만났잖아.”

그리고 은우는 길고 단단한 팔을 뻗어 설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상황 파악이 다 되기 전에 은우가 찬정을 바라보았다.


“아, 이분은 누구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듯 무시하며 차갑게 떨어지는 목소리. 조금 전 설희를 다정하게 쳐다봤던 것과는 달리, 베일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찬정을 향했다.

찬정은 진짜 은우가 올 줄 몰랐던 모양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왔네?”

“그럼, 내가 같이 온댔잖아.”

설희의 말에 찬정이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하지만 거짓말인 줄 알았지. 말도 안 돼. 진짜 벌써 사귄다고?’라고 몇 번이고 말을 반복했다. 찬정이 그러든 말든 은우는 설희만 바라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결국, 찬정이 마음이 정리된 듯 한숨을 탁, 쉬더니 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또 보네요. 이찬정입니다.”

“…….”

“기억 안 나나 봐요? 설희 전 남자친구입니다.”

뻔뻔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찬정의 말에 설희가 펄쩍 뛰었다.


“뭔 소리야.”

물론, 찬정이 자신의 전 남자친구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였다.

무슨 직업을 이야기하듯, 뻔뻔하게 말하는 찬정이 어이없었다. 설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러나 은우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옥은우입니다.”

은우는 찬정의 손을 가볍게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찬정처럼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찬정과 악수했던 손으로 은우는 곧 다시 설희를 바싹 끌어당겼다.


“설희야. 들어갈까? 자기 친구들이 기다리던데.”

녹을 듯한 목소리. 은우의 붉은 입술이 설희의 귓바퀴를 쓸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든지 ‘현재 남자친구입니다.’라는 구구절절한 말은 꺼낼 필요도 없었다

설희의 어깨를 감싼 팔, 바싹 다가온 거리, 그리고 ‘자기’라는 호칭까지. 유설희를 차지한 것은 누가 봐도 옥은우였다.

찬정이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 은우는 설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


 
이찬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설희는 언제나 ‘제 것’이어야만 했다.

처음, 설희와 사귄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도 지금도 설희는 귀염성이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뭐, 그다지 타오르는 연애도 아니었고, 미지근한 연애였다. 팀장과 바람을 피운 이유는 그것이었다.

너무 모든 게 평이했다.

설희와는 대학교 때부터 사귀었다. 이대로라면 아마 별일 없이 설희와 결혼할 게 뻔했다.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 불만 없었지만, 어쩐지 아쉬움이 남고 답답해졌다. 그때 제게 말을 건 여자가 팀장이었다.
 


“찬정 씨, 오늘 밤에 시간 있어요?”

 
그렇게 다가온 순간, 찬정은 밀어낼 수가 없었다.

사실 팀장은 딱히 찬정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같이 있으면 좋은 점도…….

하, 아니다. 사실 다 거짓말이다. 상대는 아마 누구여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설희 몰래 하는 바람이 스릴 있었다. 설희가 퇴근하고, 사내에서 팀장과 함께 있다 보면 마치 놀이공원 가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짜릿했다.

하지만, 그게 결코 설희와 헤어지고 싶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건, 전혀 다른 거잖아. 단 한 번의 실수로, 어떻게 이렇게 변해.

설희는 제게 바람을 피웠다고 손가락질했지만, 헤어지자마자 다른 남자를 만난 그녀도 떳떳하지는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

찬정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친구들과의 술자리.

찬정과 설희가 나온 대학의 과는 40명이 조금 안 되는 소수과였다. 4년간 지지고 볶고 한 사이라 반기에 한번, 이렇게 술자리를 열었다.

출장을 가거나, 아프거나 하는 정도의 큰일이 있지 않는 이상 꼭 모이는 자리였다. 그만큼 중요했다.


“다들 적셔, 마셔!”

다 같이 모여 회포도 풀고 결혼이라든지, 이직이라든지 새로운 정보도 공유하고.

오늘도 결혼할 상대를 데려온 애들이 몇 있었다. 하지만, 단연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은 설희가 데려온 남자였다. 이름이, 옥은우였던가.


 


“미치겠네.”

찬정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샜다.

설희와 찬정의 이별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꽤나 후폭풍을 불러왔다.

오래 사귀었던 커플이 깨져서도 있고, 찬정이 바람피운 게 들켜서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화제가 올라오지도 않을 정도로 모두 다 남자에게만 집중했다.

양옆으로 길게 쭉 뻗은 눈매, 날카로운 콧날, 하얀 피부에 붉게 떠오른 입술까지. 로맨스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 같은 외모였다. 손가락까지 길다.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잔을 쥐고 마시는 모습까지 그럴싸했다.

평소부터 남자 얼굴 따지기로 유명했던 친구, 희진이 몸을 배배 꼬며 은우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머, 그래서, 뭐 하시는 분이시라고 했죠?”

희진은 예전에는 찬정을 보고 ‘황소개구리’라고 별명 지었던 녀석이었다. 자신에게는 못생겼다고 ‘황소개구리’라고 이름 붙인 녀석이 어깨를 들썩이면서 은우에게는 아양을 떠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설희와 친한 인경이 대신 희진의 질문에 답했다


“설희 남자친구분은 수의사시래.”

“어머, 수의사 선생님. 나도 강아지 키우는데.”

“네가 강아지 키우는 게 무슨 상관이야. 설희 남자친구인데.”

“내가 뭘 한대? 그냥 잘 부탁드린다고 한 거지. 나중에 그, 병원 한번 가봐도 돼요?”

희진의 말에 은우가 눈썹을 끌어올려 자애롭게 웃는다.


“네, 그러세요. 설희 씨 친구분이면 잘해드려야죠.”

어디까지나 잘해주겠지만, 설희의 친구이기 때문에 잘해준다는 의미. 선을 맺고 끊는 것도 정확했다.

찬정은 아까부터 찬물만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데, 옆에 앉은 길훈이 녀석이 깐족였다.


“너, 속 좀 타겠다?”

“뭐가.”

“너 원래 설희랑 헤어질 생각 없었잖아.”

“꺼져, 새끼야.”

“그러게 왜 바람을 피워서 그러냐. 싹싹 빌지 그랬어.”

빌었다. 하지만 설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봐줄 만도 한데. 팀장 때문에 퇴사했던 상처가 아직 남아 있나보다.


“저 남자 괜찮은데…….”

“괜찮은 정도야? 내가 봐도 장난 아닌데.”

친구들이 낄낄거렸다. 내 친구가 맞긴 한가. 하긴, 찬정 혼자만의 친구라기보다는 설희랑도 오랜 친구이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찬정이 고개를 흔들며 조용히 읊조렸다.


“사귀는 거 다 쇼야.”

“뭐?”

“쇼라고.”

애초에, 설희가 자신과 이렇게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설희는, 찬정이 바람피운 팀장에게 오랫동안 괴롭힘을 받았다. 물론 그건 설희 생각이고 찬정의 입장에서는 괴롭힘이라기보단, 약간의 텃세랄까. 이놈의 인기가 문제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찬정이 말을 이었다.


“설희가 그 팀장이랑 바람피운 나한테 보여주려고 한 거야. 저 남자랑 상사랑 직원 사이고, 둘이 사귈 리가 없어.”

“왜?”

“왜긴.”

짜증이 났지만, 남자는 확실히 탈인간계였다. 그런 남자가 평범한 설희를 만날 리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설희가 날 잊을 리 없잖아.”

그 말에 길훈이 손을 들어 찬정의 이마를 짚었다.


“야, 이찬정. 머리에 열 있냐? 감기라도 걸린 거야? 얘 왜 이렇게 대단한 자신감이야.”

“꺼져, 새꺄.”

찬정이 그의 손을 밀어내고 턱을 추어올렸다.


“두고 봐. 내가 보여줄 테니.”

 

***

동기 모임의 분위기는 설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순조로웠다. 사귀던 찬정과 헤어지고 은우를 데려왔을 때, 친구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찬정이 바람을 피운 탓일까. 친구들은 은우에게 더없이 따뜻하게 대해줬고, 은우 역시 잘 녹아 들어갔다.

근데, 저 자식은 왜 저러지.

설희는 한쪽 구석에서 팔뚝을 꽉 조인 채로 말도 없이 눈만 부릅뜨고 있는 찬정이 거슬렸다.

찬정이가 예전에도 저런 얼굴이었나?

자신이 알고 있던 찬정은 조금 더 순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는 얼굴이 아주 험악해 보인다.

내가 그를 싫어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인상이 그렇게 바뀐 것인지.

어쨌든, 이 모든 연극이 티가 날까 봐 설희는 초조해졌다.


“괜찮아?”

설희가 힐로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딱, 딱, 두들기자 은우가 자신을 불렀다. 상냥하게 웃으면서도 한쪽 눈꼬리는 날카롭게 솟아서 한쪽에 처박힌 찬정과 자신을 바라본다.


“네. 처음이라 조금 떨리나 봐요.”

“응,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손을 뻗어 그가 자신의 손을 쥐어준다. 놀랍게도, 은우의 손이 자신에게 닿자마자 눈앞의 찬정이 거슬리는 것도 다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불안해서 허공 위에 붕 뜬 것 같던 발끝도 차분하게 안정됐다.

두 사람이 손을 잡는 것을 보고 희진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어머, 둘이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손잡고 말이야.”

“냅둬라, 사귄 지 몇 달 안 됐다는데 얼마나 좋을 때니.”

“은우 씨, 혹시 친구는 없어요? 은우 씨 비슷한 분으로.”

와글와글 떠드는 와중에, 찬정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사귄 지 얼마나 됐어요?”

그걸 왜 니가 물어.

설희가 뾰족하게 그렇게 말하려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들이 손바닥을 쳤다.


“그래그래, 들어보자. 둘이서 언제부터 사귀었어?”

“2달 정도 됐어요.”

“어머, 그럼 찬정이랑 헤어지고 바로네.”

속닥속닥, 친구들이 속삭였다. 2달이라 함은, 찬정과 헤어진 직후를 치밀하게 계산해서 은우와 짠 계산이었다. 찬정처럼 바람이라고 오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 오해할까 봐 서둘러 말을 이었다.


“찬정이랑 헤어지고 나서 만났어.”

설희의 말에 은우가 덧붙였다.


“설희 씨를 늘 좋아했거든요.”

느른한 말투.

그냥 감정을 담지 않고 말하는 것일 텐데도 심장이 빠르게 뛴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있다길래 그저 보고만 있었는데.”

“…….”

“헤어지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 그래서.”

은우가 그렇게 말하고는 설희를 바라보았다. ‘그렇지?’하고 묻는 듯한 다정한 눈빛.

가짜인데도 이 정도면, 도대체 진짜 연애를 할 때 이 남자는 얼마나 바뀔까.


“그래서 고백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그래서, 괜찮으면 빈자리 내가 들어가도 되겠냐고.”

옥은우는 해롭다.

심장에 너무 해로운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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