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폭풍전야
(18/80)
18화. 폭풍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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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폭풍전야
2022.12.31.
“그런데 선생님은 결혼하셨어요?”
설희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
“얘, 귀청 떨어지겠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습격에 놀라 그녀는 입을 벌리고 엄마와 은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린 그녀와 달리 어머니의 얼굴은 환해서 광채가 다 나올 정도였다.
우리 엄마 오늘 아침밥을 잘못 드셨나.
속이 뻔히 보였다. 어머니의 남은 인생의 목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설희의 결혼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옥 선생은 너무나 매력적인 상대리라.
잘생겼지, 직업 좋지, 그리고 또 잘생겼지.
남자는 얼굴이 최고라는 엄마에게는 물러설 수 없는 기회였다.
“엄마, 도대체 왜 그래?”
설희는 당장이라도 엄마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옥 선생은 개의치 않아 하며 빙그레 미소까지 띠면서 엄마의 말에 대답했다.
“결혼은 아직입니다.”
혹시라도, 부모님께 위장연애 사실을 말씀드리는 건 아니겠지.
설희는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선생님, 그 위장연애,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선생님, 진짜 우리 엄마가 지옥까지 선생님을 쫓아다닐 가능성도 있어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선생님을 위해서 숨기셔야 합니다.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설희의 다급한 텔레파시를 이해하기라도 한 걸까.
무언가 말을 이으려던 은우는 입을 닫고, 씩 웃기만 했다. 은우의 짧고 간명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엄마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래요? 아시겠지만 우리 설희도 아직 결혼을 안 했어요.”
“…….”
“심지어, 지금은 남자친구도 없답니다.”
아예 결혼식장을 잡지, 잡아.
설희가 남자친구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옥 선생이 잘 알고 있었다. 이 대화를 참아주기가 힘들다. 설희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중개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장님, 오늘 할 일은 이걸로 끝인 거죠? 계약, 잘 된 거죠?”
“네에. 아주 잘 됐습니다. 입주일은 24일로 괜찮으시죠?”
“네.”
바쁜 일정이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친구들과의 만남. 곧 이사에, 옥 선생님의 할머님도 뵈러 가야 하고. 하지만 곰곰이가 병원에 더 있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 가자. 옥 선생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사장님도 감사했어요.”
다다다다, 랩퍼처럼 말을 빨리 잇는다. 설희의 말에 엄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벌써 가자구? 선생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드려야지.”
오늘 혹시 엄마가 더위를 먹은 걸까? 도대체 우리 부모님이랑 옥 선생이 왜 밥을 먹어?
“엄마, 무슨 소리야. 선생님 오후에 일정 있으시대.”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런 걸로 했다.
“아쉬워라.”
누가 보면 집에 놀러 온 줄 알겠다. 서운해하는 어머니의 표정이 기가 막혔다.
“그럼, 옥 선생님, 한번 우리 식사라도 같이해요.”
“감사합니다. 그날을 기대하고 있을게요.”
옥 선생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설희는 우선, 부모님을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나 잠깐 선생님이랑 이야기할 테니 차 타고 있어.”
“알았다, 얘는 성격도 급해서.”
엄마 아빠는 건물 밖에 세워둔 차에 타고는 은우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사위를 배웅하는 처갓집의 모습이었다.
설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내가 미친다. 오늘 무슨 생각으로 부모님과 함께 온 걸까. 부동산이 아무리 처음이어서 긴장돼도 어차피 집주인 상대는 옥 선생님인데 그냥 믿고 할걸.
“좋은 분들이시네요.”
그러나 기겁하는 설희의 반응 과는 달리 은우는 그런 부모님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고 있었다. 쿡쿡, 기분 좋은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하지만 설희는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옥 선생을 사윗감으로 탐내는 듯한 엄마의 말 때문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희가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
“네?”
“그…… 있잖아요. 그…….”
“뭐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볼이 너무 달아올라 터질 듯 빨개졌다.
“엄마가 결혼 말씀하신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 남자한테나 그러시거든요.”
은우가 설희의 말에 눈썹을 쓱 올리고 낮게 읊조렸다.
“아무 남자…….”
오늘은 되는 게 없는 날이었다. 엄마가 창피해서 아무렇게나 던진 말에 옥 선생이 중얼거리자, 그 말에 설희가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혹 그를 낮추는 말로 들렸으면 안 되는데.
“아, 아무 남자라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니고, 나쁜 의미가 아니고 뭐라고 그래야지.”
너무 당황해서 그런지 변명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더듬더듬 말을 잇다 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입꼬리에 매달린 웃음을 보니 당황한 설희를 재밌어하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부모님들이 좀 결혼 문제에 예민하시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옥 선생의 말에 설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전 오늘 부모님이랑 와서 빨리 가봐야겠습니다. 선생님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그럼 내일 뵈어요.”
인사를 하고, 다시 부모님이 부동산으로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 무서운 설희는 부동산을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드르륵, 탁.
부모님이랑 은우가 함께 있는 게 부담스럽다는 듯, 빛보다도 빠르게 도망가는 설희를 보고, 그는 입술을 비틀었다.
아직도 거리감이 상당하군.
설희와 같이 식사를 하고, 데이트도 했고, 집까지 같이 보러 다닌 사이이건만 여전히 유설희는 은우의 앞에 서면 어려운지 표정이 휙휙 바뀌었다.
“수의사 선생님, 잘 아시는 분인가 봐요?”
은우는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돈을 모아 이 오피스텔 건물에 방을 몇 개 가지고 있었다.
늘 세를 주고 있어서 부동산과도 친한 사이였다. 넉살 좋은 부동산 사장님은 설희가 있는 쪽을 보며 목을 쑥 뺐다. 그의 질문에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병원 직원이라서요.”
“아, 그러셨구나!”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손뼉을 짝짝 쳤다.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인다.
“근데 정말 친하신가 봐요. 다른 분이랑 원래 계약했다가 파기까지 하신 거 보니.”
그의 말에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늘 설희가 계약한 오피스텔은 세입자가 나간 뒤, 원래 다음 달에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기로 한 곳이었다.
하지만.
“집은 알아보고 있어요?”
“영 쉽지가 않더라구요. 개 기른다니까 집주인들이 싫어하고.”
고민하던 설희가 자꾸 눈에 밟혔다. 결국, 은우는 세입자에게 계약금의 2배를 주고 계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상대방도 비슷한 물건을 금방 구해서 마음 좋게 승낙해줘서 다행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유설희 씨에게는 비밀.
안 그래도 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는데, 만약 이런 뒷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녀가 얼마나 학을 뗄지 안 봐도 뻔했다.
“세도 원래 보다 한참 적게 받으시고. 참 그 아가씨는 운도 좋네요. 이런 멋진 상사님을 만나다니.”
“…….”
“설마, 사귀시는 분은 아니죠?”
부동산 사장님의 말에 은우가 눈을 느른하게 떴다.
“그런 건 아닙니다.”
굳이 여기서까지 사귄다고 말해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데에는 다른 음흉한 꿍꿍이는 없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앞으로 좀 친하게 지내려고요.”
은우는 피식, 웃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오피스텔로 올라갔다.
유설희 씨, 아까 집 주인이 나라는 걸 알고 경악했는데.
바로 옆 옆방에 내가 살고 있다는 거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갑자기 은우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설희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일주일의 허리, 수요일.
이번 주에는 일이 많았다. 월요일 날 집 계약도 했고. 집에 갔더니 피곤이 쌓여서 설희의 몸은 처졌지만 오늘도 돌마래 동물병원은 평온했다.
입원실에서 테크니션 채린이 설희에게 개를 바로잡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돌마래에서는 수습기간 중에는 환견을 만지지 않고 주로 소독과 청소 등의 주변 정리업무를 했다.
‘어휴, 수습기간 영원히 안 끝나는 줄.’
드디어 길고 긴 수습기간이 끝나고 수습을 뗀 설희가 하는 첫 업무였다.
“보정이란 건 의료 행위나 미용 같은 걸 할 때, 개나 고양이가 움직이는 걸 막는 거예요. 개도 다치지 않게, 치료하는 사람도 무사하게, 또 제대로 치료행위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대요.”
예쁜 입술로 오물오물 이야기하는 채린이 귀여웠다. 조금 더운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사랑스럽다. 얼마 전, 진호가 왜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는지 설희도 이해가 갔다.
결국 한 번 만났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잘 됐으면 좋을 텐데. 오랜 시간 보진 않았지만 진호도 괜찮은 사람 같았다. 그 소개팅의 행방이 궁금했지만, 괜한 오지랖일까 봐 말을 삼켰다.
공개 연애를 해서 고통스러웠던 설희는 괜한 오지랖이 관계를 망칠 수도 있고,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뭔가 말할 만한 상황이 되면 알아서 하겠지. 그래서 설희는 입을 꽉 닫았다.
채린이 마저 설명을 시작했다.
“근데, 이게 개에 따라서 다른 게, 어떤 개들은 꽉 눌러서 아예 하나도 못 움직이게 하면 더 긴장해서 온몸을 비틀고 난리를 치거든요. 수의사 선생님들이 진료하실 때 잘 잡는 게 테크니션들 몫이니까 우리 연습 많이 해봐요.”
설희가 똘이를 안았다. 부드럽고 따사로운 갈색 털 뭉치가 품에 한가득 안긴다.
“우선 가슴을 이렇게 한쪽 팔로 감싸고, 얼굴이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안아주시면 돼요.”
채린의 설명대로 하려고 노력했지만, 똘이는 워낙 사람에게 익숙한 개인지라, 무슨 짓을 하든 가만히 있었다. 자신과 놀아주는 것이냐며 늘어진 채 사람 손에 몸을 맡겼다.
깜빡, 깜빡.
크고 까만 눈을 깜빡인다.
‘우리 뭐 하고 노는 고얌? 새로운 놀이얌?’
그렇게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떻게 해! 똘이는 너무 얌전해서 연습이 안 되네요.”
그런 귀여운 똘이의 얼굴을 보고 결국 두 사람은 웃음이 터졌다. 보드라운 털 뭉치 똘이는 설희가 세게 안든, 약하게 안든 간에 기분이 좋은 듯 축 처져 설희의 손을 할짝댔다.
결국, 실습은 다른 강아지로 마무리되었다.
***
그날 오후, 은우의 진료 보조는 설희가 맡았다.
“오늘 아침에 채린 씨한테 보정 하는 거 배웠다면서요? 이제 개랑 좀 친해졌어요?”
“이제 개라면 자신 있어요.”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못 미더운 걸까. 은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 그럴까.”
“믿어주세요, 선생님.”
“보정이 쉬워 보여도 생각보단 어려워요. 뭐, 잘해봅시다.”
내원한 작은 치와와를 진료실에서 귀 청소를 하러 데리고 들어왔다. 치와와의 이름은 솜털이. 옥 선생은 한번 해보라며 솜털이를 설희에게 맡겼다.
솜털이가 고개를 들어 설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용하고, 차분한 눈길.
폭풍 전야 같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