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결혼 어때요.
(17/80)
17화. 결혼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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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결혼 어때요.
2022.12.27.
“설희 씨?”
은우가 걸어오다가 발걸음을 우뚝 멈춘 설희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설희는 제 안에 요동치는 감각에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까 방탈출 한 게 너무 재밌어서 잠시 생각이 거기로 갔나 봐요.”
요즘 너무 외로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찬정과도 헤어지고, 병원 다니느라 친구도 못 만나고, 아침부터 저녁 퇴근 후까지 은우와 함께 있었으니.
그냥, 그래서 그런 거지.
은우가 싱긋 웃었다.
“그래요?”
“네.”
“재밌었다니 다행이네요.”
“네에, 엄청 재밌었어요.”
생경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설희는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감사해요, 옥 선생님. 같이 와줘서. 저 진짜 와보고 싶었거든요. 근데 생각만큼, 아니 생각보다 재밌었어요. 옥 선생님도 처음치고 엄청 잘하시고.”
“나도 즐거웠어요. 그러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시간이 좀 남았는데.”
은우가 손목시계를 들어 흘깃, 시간을 확인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제가 여기 정했으니, 남은 시간에는 옥 선생님 좋은 곳으로 가요.”
“어디든 괜찮아요?”
“네. 원하시는 것 무엇이든.”
그러자 그가 좀 더 설희에게 다가오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정말, 뭐든?”
“네.”
“정말 뭐든지 괜찮다는 말이죠?”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 무언가 속뜻이 숨어 있는 것 같았지만, 설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은우가 설희를 데려간 곳은, 설희의 예상을 한참 웃도는 곳이었다.
장소에 도착하기 전 산책처럼 천천히 거닐다가 그가 문득 물었다.
“이사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요?”
“……아직이에요.”
“그럼, 내 오피스텔 한번 보러 가요.”
그렇게 제안하는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고도 완만했다. 결코 강압적이지 않았다.
“한번 보는 것쯤은 괜찮지 않아요? 바로 세 들라는 것도 아니고.”
그 말도 맞다. 그가 들어와 살라는 것도 아니고 이 주변 시세도 알 겸,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그럼, 구경만 해봐도 될까요?”
“그럼요. 여기서 가까워요. 갑시다.”
그의 오피스텔로 가는 길. 살랑살랑, 바람이 분다. 그럴 때마다 은우의 앞머리가 한들거렸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 높은 콧날에 붉은 입술.
잘생기긴 참 잘생겼다.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이 갔다. 주변에 걸어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가끔, 그의 얼굴에 오랜 시간 머물렀다가 흩어졌다.
너무 빤히 바라본 탓일까.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자신을 향한 시선에 은우가 물었다. 얼른 설희가 시선을 돌렸다.
“뭐 타고 가면 될까 해서요.”
“걸어 가면 됩니다. 여기서 5분 정도 걸려요.”
“걸어서 5분 거리라고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자신들이 있는 곳은 병원에서 지근거리였다. 근처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울 줄이야.
“근데 예산이 어떻게 됩니까?”
역시 비쌀까. 돌마래 동물병원은 강남 한복판에 있었다. 요즘 한껏 비싸진 월세 때문에 마음에 드는 집은 예상 범위 밖이었다.
“2000에 70만 원까지는 어떻게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은우가 걷다 말고 설희를 바라보았다.
“70이요? 정말 낼 수 있어요?”
설희의 월급은 빤했다. 옥 선생도 설희의 월급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수습기간이라 더 적었지만, 수습이 끝나도 넉넉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 수습 끝나면 어떻게든.”
서늘한 눈으로 은우가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선 넘어갔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금세 도착한 오피스텔은 가까운 곳에 공원도 있고 좋은 위치였다.
설희가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심지어 신축이다.
“근데…… 여기 비싸지 않을까요?”
“지금 살라는 말 아니에요. 그냥 구경이나 해봐요.”
입구에도 도어락이 있어 안전해 보였고 1층에는 편의점도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807호라는 숫자 앞에 섰다. 은우가 비밀번호를 눌러 방문을 열었다.
“아, 대박.”
안에 들어간 방은 생각보다 컸다. 부엌에는 냉장고와 세탁기도 빌트인 되어 있었고, 이전 세입자가 집을 굉장히 깨끗하게 써서 그런지 넓고 밝았다. 설희와 곰곰이, 둘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대박이다. 집이 정말 좋네요.”
설희가 방을 보다가 옥 선생이 서 있는 뒤를 돌아보았다. 옥 선생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없이 가만히 웃고 있기만 한 남자. 시선이 부드럽고 따스했다.
왜…… 왜 웃고 있지?
은우가 입을 열었다.
“그냥 받아들여요, 설희 씨.”
“…….”
“내가 어려운 거 알고 있어요. 상사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가 뒤꿈치로 툭, 툭 바닥을 차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간섭 안 할게요. 집 더럽게 써도 돼.”
“…….”
“병원에서의 나랑, 밖에서의 나는 또 다르니까 한번 믿어봐요.”
물론 그랬다. 병원에서의 옥 선생은 더없이 까다롭고 무서웠지만, 밖에서의 은우는 상냥하면서도 다정했다. 여전히 쉬이 답하지 못하는 설희를 보고 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라서예요?”
“네?”
“내가 아닌, 최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이 빌려줬으면 들어왔을 거냐는 말입니다.”
그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그는 옥 선생이었다. 무섭기도 하고, 무엇보다…….
단둘이 이렇게 있다 보니, 수족관에서 그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감촉이 떠오른다. 손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심장까지 파르르 떨렸다.
이렇게 긴장하게 하는 집주인. 좋지 않아…….
설희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은우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2000에 50입니다.”
“네?”
“보증금 2000에 50이라고요.”
이거 뭐 귀신이라도 나오는 집인 거 아니야?
비슷한 곳을 갔었는데, 중심가에 위치한 병원 위치상 다른 곳들은 보통 월세가 80, 90은 했다. 애완동물 살면 안 되는 곳들도 그 정도의 가격이었는데.
아무래도 이거 뭔 덫 아닐까. 싸도, 너무 싸잖아.
“어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설희를 보고 그가 말했다.
“곰곰이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
“여기면 공원도 가깝고 병원도 가까우니, 곰곰이가 심심해하면 병원에 매일 데리고 출퇴근 할 수도 있고, 곰곰이랑 병원 개 똘이랑 사이가 좋으니 자주 만나게 해줄 수도 있어요.”
설희는 입을 다물었다. 은우가 때로 얄미운 건, 그가 정답만 말하기 때문이다. 맨날 헛소리만 하는 거면, 그냥 무시할 수 있을 텐데.
그의 말이 다 맞다.
곰곰이를 내가 책임지겠다고 한 건데…… 여기서 한 시간 넘는 거리로 이사 가게 되면 왕복 2시간. 병원에 곰곰이를 데려오는 것은 꿈도 못 꿀 것이다. 그리고 온종일 곰곰이는 집에 혼자 지내게 되겠지.
월세도 싸고, 환경도 좋고. 집도 자신이 오랫동안 꿈꾸던 그런 완벽한 자취방이었다.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는 날, 곰곰이와 창가에서 뒹굴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곰곰이를 생각해서 제안하는 거예요. 유설희 씨에게 다른 저의가 있는 게 아니라.”
설희는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는 오직 곰곰이에 대한 걱정만이 엿보였다.
괜찮…… 겠지?
“저…… 그럼 계약은 언제 하실까요?”
불안한 목소리가 오피스텔에 울려 퍼졌다.
***
사흘 뒤 저녁.
오피스텔 1층에 있는 부동산에서 계약을 하기로 했다.
설희는 자취가 처음이라, 집 계약하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그래서 부모님과 부동산에 동행했다. 그러나.
“어머, 잘 부탁 드려요오.”
계약이 끝나고 인사하는 시간. 엄마의 평소보다도 두 옥타브 정도 높은 목소리를 듣고는 설희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이걸 생각을 못 했지.
설희의 어머니는 지독한 얼빠였다.
비주얼에 죽고, 비주얼에 사는 여자.
잘생긴 남자를 유난히도 좋아하는 엄마는 잘생기고 능력 없는 아빠와 결혼했다. 텔레비전을 봐도 정석 미남들이 안 나오면 드라마를 보지 않을 정도. 동네의 잘생긴 청년들은 다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미남을 사랑했다.
찬정이랑 헤어졌을 때도 처음 말한 말은 얼굴에 대한 것이었다.
“그 오리너구리같이 생긴 놈이 어디 우리 설희를 차? 생긴 것도 듀공처럼 생겨놓고는.”
오리너구리랑 듀공을 닮았다니, 실연과 배신의 아픔 속에서도 엄마의 표현에 웃음을 터뜨렸다.
병원에 오는 환자에게도 인기가 많고 잘생긴 옥 선생을 보면 엄마 반응이 어떨지 상상이 가서, 둘이 부딪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그걸 까먹고 오늘 부모님을 모시고 부동산에 왔다.
엄마의 눈이 은우를 탐색하고 있었다.
“이분이 수의사 선생님이야? 네가 말했더언?”
어머니, 콧소리 좀…….
오늘 옥 선생은 평소보다도 더 잘생겼다. 모르는 남자였으면 설희조차 한눈에 반했을 것이다.
너무 잘생겨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체크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차림이었는데도 옷발이 좋은 건지, 아니면 얼굴의 문제인지 눈이 부셨다.
마음 같아서는 모르는 체하며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부동산에 엄마를 데려온 이상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 어어. 옥 선생님, 저……. 이쪽은 저희 부모님이세요.”
“옥 선생님. 성도 유니크 하시네.”
“설희 아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엄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고, 평소 무표정에 가까운 아버지까지 온화하게 웃는다.
“안녕하세요, 옥은우라고 합니다.”
“어머어머,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 좋은 집을 세놓아 주셔서. 얘가 자취한다 해서 물론 다 큰 자식이지만은 얼마나 걱정이 됐는지 몰라요.”
“그러실 만하죠.”
“근데 딱, 선생님처럼 인격자의 멋진 분의 집에 들어가게 돼서 가문의 영광입니다.”
엄마는 지금 아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자신도 모를 것 같았다.
엄마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뭘요. 설희 씨가 늘 저를 도와주는데요. 그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머, 말도 잘하셔.”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엉덩이를 들썩였다. 설희의 반응이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제가 설희 엄마입니다. 그리고 돌마래 원장이 저희 오빠여요.”
“그러셨군요, 늘 원장 선생님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엄마가 몸을 꽈배기처럼 비비 꼬고 있었다. 설희의 예상대로, 은우가 마음에 쏙 든 게 틀림없었다.
“설희야아.”
설희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한껏 달콤했다.
“선생님 잘생기셨다고 왜 말 안 했어? 계집애.”
‘엄마가 이런 반응 보일까 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겨우 꿀꺽 삼켰다. 심지어 아빠까지도 엄마를 거들었다.
“정말 훤칠하시네.”
부모님의 칭찬에 옥 선생이 웃었다.
“잘생기긴요.”
“남자인 내가 봐도 잘 생기셨는데.”
“그만해요, 엄마, 아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이렇게 창피할 수가. 설희의 말에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알았어. 얘는 이렇게 극성이야. 선생님, 기분 나쁘지는 않으시죠?”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결혼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