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우리 집으로 가자
(16/80)
16화. 우리 집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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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우리 집으로 가자
2022.12.24.
“내 집에 들어와요.”
간명한 제안. 하지만 충격적인 제안에 설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집이요? 옥 선생님 집 말씀하시는 건가요??”
지금, 나랑, 동거, 하자고, 하는 거야?
말도 나오지 않아 설희의 입술이 벙긋벙긋 움직였다. 그러나 엄청난 대사를 내뱉은 사람치고는 은우의 표정은 잔잔했다.
“네. 아마 마음에 들 겁니다. 강아지도 키울 수 있는 건물이고, 병원에서도 거리 가깝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물론 곰곰이를 당장 집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와 어떻게 같은 집에 살아. 설희의 눈동자가 당황에 살짝, 떨렸다.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아무리 급한 상황이어도.”
눈앞에 있는 옥은우라는 사람은 누가 봐도 남자였다. 아니, 그냥 남자던가. 너무 잘나서 그를 상사로서 무서워하는 설희가 봐도 잘나도 너무 잘난 남자였다. 그가 설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살피려 고개를 숙였다.
제 앞으로 얼굴이 바싹 다가온다. 아까 긴 진료를 보느라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빛나는 눈동자.
병원의 살풍경한 형광등 아래서도 자비 없는 미모였다.
저런 남자랑 같은 집에 살라고? 시집가기 전에 동거부터……?
당황해 얼굴이 붉어진 설희를 보고는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목 근육이 근사하게 떠오른다.
“왜 그래요? 그렇게 내가 싫어?”
은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읊조렸다.
“싫다기보단, 같이 사는 건 아무래도 세간의 눈도 있고.”
지금도 이렇게 심장이 펄떡이는데 24시간 그와 만나서 정말 버틸 수가 없을 것도 같고.
그러자, 이번에는 은우의 표정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하다가 하, 하고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조금 전까지 좁아 들었던 미간이 펴졌다.
“설희 씨.”
“네?”
“내가 아무리 미친놈이어도 유설희 씨한테 갑자기 동거하자고 말할 정도로 미친놈은 아닙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웃음을 참는 건지, 아니면 어이없음을 누르는 건지 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내 소유의 집에 들어오라고 한 거예요.”
“선생님 소유의 집이요?”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오피스텔을 가지고 있어요. 아까 말한 대로 강아지도 키울 수 있는 건물이고, 병원에서도 거리가 가깝습니다. 세도 곧 나갈 예정이고. 그래서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그 집에…….”
“난 안 삽니다. 빈집이에요.”
“아.”
아아. 아아아아아.
그런 말이었구나. 이제야 상황이 파악된다. 말도 안 되는 착각에 설희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아무리 옥 선생님과 지금 연인을 연기 중이라고 해도, 같이 살자고 할 리가 없잖아. 옥 선생님이 그렇게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입만 벙긋벙긋하다가 목을 쥐어짜는 소리로 속삭였다.
“죄, 죄송해요. 착각했어요.”
그가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라도 오는 걸까. 얼굴을 가리고는 한참 있다가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내가 말을 모호하게 했나 보군요. 설마, 내가 사는 집에 들어오라고 인식할 줄은 몰라서.”
그러니까, 옥 선생이 미친 줄 알았지 뭐야.
내가 미친 건데.
“그래서, 집 보러 갈래요?”
“아…….”
어떻게 하지.
조금 전 했던 착각의 충격에서 벗어나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았다.
옥 선생이 오피스텔을 가지고 있다. 강아지도 기를 수 있고, 병원에서도 가깝고. 아직 월세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옥 선생네 집.
물론, 그가 같이 산다는 건 아니었지만 집주인은 옥은우 선생이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 그와는 이미 여러 가지, 유쾌하지 않은 건으로 얽혀 있었다. 거기다가 집주인과 세입자라니.
아무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상사가 집주인인 건 영 내키지 않았다. 설희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좀 더 찾아볼게요. 그렇게까지 신세 지고 싶지 않아서요. 아마 찾아질 거예요. 시간이 걸리는 거겠죠.”
“그래요, 그럼.”
그가 선선하게 답했다.
***
“좀 더 찾아볼게요. 그렇게까지 신세 지고 싶지 않아서요. 아마 찾아질 거예요. 시간이 걸리는 거겠죠.”
그렇게 당당하게 말했거늘. 설희가 필사적으로 여러 군데 알아보고, 발품을 팔았는데도 결국 집은 찾아지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걱정하다가 주말 데이트의 시간이 돌아왔다.
이번이 친구 모임 가기 전, 마지막 데이트였다. 지난번에는 은우가 데이트 장소를 정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설희가 장소를 정하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 늘 그렇듯 사소한 대화를 나눈다.
“뭐 하고 싶습니까?”
“으음.”
“다음 주 토요일은 친구 모임이니, 그 전에 많이 친해져야 할 텐데.”
데이트에 뭘 해야 할까 딱히 생각해 본 적이 평생 없었다. 거기다가 지난번 데이트가 너무 좋았다. 그가 데리고 간 동물원은 굉장히 즐거워서 그 정도로 재밌는 일이 있을까. 떠오르지가 않았다.
“뭐가 좋을까요.”
“보통 과거에 데이트에는 뭘 하는 편이었습니까?”
과거 데이트라.
그의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지난 일들을 되짚어보았다. 뭘 했더라.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냥 번화가에서 맛있는 거 사 먹고, 영화나 한번 보고. 게임을 좋아하는 찬정을 따라 피시방에 가고.
지난번 데이트가 동물원 탐방이었는데, 이런 건 너무 시시하다. 망설이는 그녀를 보고 그가 재차 물었다.
“좋아하는 것,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이라고 해도…… 정말 내 마음대로 골라도 괜찮을까.
설희는 사실 조금은 유치한 것을 좋아했다. 놀이공원, 보드게임방, 이런 10대들이 좋아할 법한 것들. 문득 전에 본 기사에서 나온, 방탈출 게임 이야기가 뇌리에 남았다.
각종 미스터리를 풀어 방에서 시간 내에 나가야 하는 방탈출 카페가 커플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고 했다.
“와, 퀴즈 풀기나 수수께끼 풀기 같아서 너무 재밌겠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설희에게는 더욱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기회가 있다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
그러나 몇 명이서 하는 방탈출 카페를 혼자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친구들은 주말에 다들 데이트며, 업무 등으로 바빴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찬정에게 말했을 때는 단칼에 거절당했다.
“무슨 직장인이 방 탈출이야. 유치하게. 아직도 그런 거 졸업을 못 했어? 설희 너는 그래서 좀 취향을 배워야 해.”
비웃듯 말한 그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울린다.
은우는 어떨까.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련된 옷을 입고 완벽한 자세로 핸들을 쥐며 앉은 그가 방탈출 같은 것을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찬정보다 더욱 어른스러운 그가 방탈출 카페 같은 곳을 가자는 말에 응할 리가 없었다.
그에게 유치하다는 비난을 들으면, 정말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흔들리던 마음을 정했다.
“음, 영화나 볼까요?”
무난하게 가자. 그렇게 생각하여 한 말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영화?”
“네. 보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
은우는 신호가 바뀐 사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설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민하는 듯, 작게 소리를 낸 다음 고개를 기울인다. 그저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긴 속눈썹 아래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 마른침을 꼴깍 삼킨다.
옥 선생님이 저렇게 쳐다볼 때면, 마치 영혼 깊숙이서부터 꿰뚫리는 것 같아서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정말 영화가 보고 싶습니까?”
“네?”
은우가 묻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설희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왜 물을까. 영화가 싫은 걸까.
“정말로 영화가 좋은 거 맞냐는 말입니다.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했잖아요. 서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속아 넘기는 거니 그냥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진짜 서로를 알 수 있을 그런 걸로 했으면 좋겠어요.”
“아…….”
은우가 말을 이었다.
“영화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설희 씨는 좀 더 역동적인 걸 하자고 할 줄 알았습니다. 의외여서 다시 물은 거였어요.”
그의 말 대로였다. 설희는 영화를 막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싫어하지도 않아서, 가끔 흥행한 영화가 있으면 가서 보기는 했지만 그의 말대로 이야기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역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것도 그의 말 그대로였다.
“아…… 보통 많이들 데이트 때 보러 가니까 영화가 어떤가 하고. 근데 제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아세요?”
그 질문에 은우가 살짝, 입술을 비튼다. 신호에 차를 다시 출발시키며 엑셀에 발을 얹었다.
“당신이 병원에서 영화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 없으니까.”
놀라운 기억력이었다.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는 편이신가 봐요.”
“글쎄, 모든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는 편은 아니고.”
그렇게 말하고는 남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난 생각보다 설희 씨에 대해 잘 알아요.”
“……저에 대해서요?”
“설희 씨가 나에 대해 아는 것보다는.”
그러고 보니 은우에 대해서는 매일 놀라운 일뿐이었다. 이렇게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화 내용을 기억하는 남자라고 생각은 안 했는데.
“보통 말고, 정말 설희 씨가 하고 싶은 것 없어요? 친구들 만나기 전 마지막 데이트인데,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죠.”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그냥, 대충 의향을 물어서 시간을 때우겠다는 심산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녀의 의향을 살피는 것 같았다.
결국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설희가 속삭였다.
“……저, 방탈출 해보고 싶어요.”
“방탈출?”
설희의 말에 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퀴즈 같은 거를 풀어서, 방을 탈출하는 거래요. 그, 저도 안 가봤는데.”
“처음이에요?”
“네.”
은우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설희가 먼저 선수를 쳤다.
“좀 유치하죠?”
설희의 말에 그가 웃었다.
“재밌겠는데요, 왜.”
“…….”
“그리고 연애할 때는 원래 조금 유치해지는 거예요.”
마치, 진짜 연애를 하는 사람처럼 그는 말했다.
“갈까요? 방탈출.”
“옥 선생님만 좋으시다면.”
“조금 오래 걸릴 지도 모르지만, 같이 탈출해요.”
그리고 그는 웃었다.
조금 오래 걸리다니, 처음 한 사람들치고는 정말 좋은 성적이라며 직원이 놀랄 정도로 빠른 탈출을 했다. 직관적으로 퀴즈를 풀어낸 은우 때문이었다.
드디어 돌아온 토요일, 그와 방탈출을 했다. 나와서 같이 성공기념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 설희가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너무 재밌었네요, 와 진짜 이렇게 재밌는 건 처음 해봤어요.”
너무 재밌어서 흥분이 가시지가 않을 정도로 재밌었다.
“재밌었어요?”
“무척. 다음에…….”
또 오고 싶다.
그렇게 말하려던 설희의 입술이 멈췄다.
다음은 없었다. 이게 마지막 연습이다.
그 모든 약속이 끝나면 둘이 하기로 한 이 위장연애도 끝. 더 이상의 데이트는 없었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럽기만 했다. 무서운 옥 선생과 얽힌 것도 놀랐고, 또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데이트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앞서 걸어가던 은우가, 말하다가 멈춘 설희를 돌아보았다.
“설희 씨?”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즐거웠다.
즐거워서 그런가, 다음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휑했다. 자신을 이상한 듯 바라보는 은우의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