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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책임져주세요. (15/80)


15화 책임져주세요.
2022.12.20.



“상처요?”

무슨 상처를 말하는 거지.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으려는 순간, 뒤에서 다른 직원이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직원이 은우와 설희를 보고 입을 열었다.


“쉬는 도중에 미안한데, 부원장님이 곰곰이 때문에 회의 좀 하자고 하시니까 잠깐 모일 수 있을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지. 곰곰이를 케이지에 다시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곰곰이, 어떻게 하죠?”

스태프 회의 시간, 부원장인 최 선생의 말에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맡긴 지 열흘이 넘었는데 안 온다는 건, 유기한 거겠죠?”

왜 유기를 한 것일까. 저렇게 귀여운데. 곰곰이는 건강해지고 나서는 기분이 좋은 듯 신나서 병원 안을 돌아다녔다. 뽈뽈거리는 짧은 다리가 더없이 사랑스럽다.


“너무 귀여운데, 왜 도대체 버렸을까요?”

설희의 말에 최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는 별의별 이유로 개를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생각보다 너무 크게 자랐다고 버리는 사람도 봤고.”

“곰곰이는 그중에서도 전형적인 케이스죠. 병에 걸려 버려지는.”

“하지만, 곰곰이는 디스크 초기라서 거의 다 나았잖아요. 죽는 병도 아닌데.”

“앞으로 계속 관리해야 하는 게 싫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병 아니더라도 그 핑계로 병원 와서 버리려던 거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간에, 어떻게 하지?”

최 선생님의 말씀에 옥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유기견 보호소로 보내야죠.”

“보호소 보내서 공지도 내보고…….”

입을 다물고만 있던 원장이 입을 열었다.


“병원에서 새 주인 한번 찾아보고 보내지?”

“근데, 곰곰이는 이제 8살이잖아요. 데려가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기견 보호소로 보내면 10일 뒤에 안락사되잖아요.”

채린의 말에 설희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안락사. 그랬다. 유기견 보호소를 가면, 주인을 조금 찾아본 다음에 안락사를 당했다. 1살 미만의 강아지는 새로운 보호자를 찾기도 힘드니, 곰곰이는 아마.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직 너무 건강한데. 8살이면 아직 살날이 한참 남았는데, 안락사를 당한다고? 아침에 출근해서 밥을 주자, 반가워하며 기쁜 듯 그녀의 손을 할짝할짝 핥던 곰곰이를 떠올렸다.

곰곰이가 죽는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급한 마음에 차분히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말이 먼저 나왔다.


“제, 제가 입양할게요!”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설희를 쳐다보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그녀는 강아지를 입양할 처지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짠 동물병원 월급인데, 지금은 수습 기간이라 20만 원이나 덜 받는다. 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었고, 엄마는 천식이라 집에서도 거두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죽는다잖아.

곰곰이가…… 죽는다잖아. 그것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제가 입양하겠습니다.”

떨리는 입술로 활짝 웃어 보였다. 말을 하고 보니 그게 맞는 일 같았다. 뒷일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나 밝아진 설희의 표정과 달리 부원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설희 씨, 정말 입양할 생각이에요?”

“네에.”

설희가 조심스럽게 답하자, 원장이 고개를 기울였다.


“설희야, 너 강아지 키운 적 없잖아.”

원장은 설희의 외삼촌이라 그녀의 상황에 대해 잘 알았다.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돼?”

“하지만 안락사를 당하면, 어떻게 해요.”

“맞아요, 설희 씨. 개 키우는 게 쉬운 것도 아닌데. 몰라서 그래요.”

“그래, 설희야.”

원장이 말을 이었다.


“곰곰이는 이제 8살이야. 앞으로 관리만 잘하면 10년도 넘게 살 텐데. 앞으로 10년 넘게 관리할 자신 있니?”

10년. 그렇게 생각하니 아득했다. 10년 전 자신은 고등학생이었다. 10년 뒤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설희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불쌍해서 바로 입양하면 되겠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일 년에 버려지는 개들이 몇만 마리야. 다 불쌍하다고 입양할 수 있겠어? 병원에서도, 다른 사람들도 구해주고 싶어요. 그런데 그 많은 개를 다 우리가 구할 순 없는 거야, 설희야.”

“하지만 곰곰이는 여기 있잖아요. 다른 개들은 제가 구할 수 없어도, 곰곰이는 제가 구할 수 있는 거잖아요.”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곰곰이가 안락사를 당하게 된다. 늘 조곤조곤하게 속삭이는 설희의 말투에도 힘이 들어갔다.


“너, 집에서 강아지 기를 수 없잖아.”

설희의 어머니는 강아지 알레르기와 천식이 있었다. 그렇기에 엄마 때문에 집에서는 기를 수 없다. 그러나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지난 회사 퇴직금 받은 거랑 적금 이것저것 하면 1,500만 원 정도 있었다. 이걸로 월세방을 구하면 된다.

에잇,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몰라. 애초에 독립하고 싶으면서도 꾸물꾸물 결정을 미루기만 했는데, 이제 취직했으니 월세도 낼 수 있다. 이번을 기회로 독립하는 거야.


“못, 못 기르지만 개 키울 수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 됩니다.”

갑자기 결정한 것이긴 했지만, 결코 그냥 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몇 달간 병원에서 일하면서 동물과 산다는 것을 얕게나마 배웠다.


“제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희야.”

“곰곰이를 제가 안 키우면 다른 대안이 있나요? 원장 선생님, 죽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제가 데려가서 오순도순 사는 게 좋을까요?”

“…….”

“제가 기른다니까요. 곰곰이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 때까지 제가 책임질게요.”

저질러 버렸다.

병원 안에 침묵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늘 목소리가 작은 설희가 단호하게 의견을 내자, 스태프들이 다들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태어나서 이렇게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적 있던가.

그러자,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은우가 입을 열었다. 반듯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설희 씨를 믿어보죠.”

“…….”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은우의 말에 모두 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희가 곰곰이를 입양한다고 하면, 가장 반대를 할 것 같은 사람은 다름 아닌 옥 선생이었다. 평소에 그가 얼마나 동물입양에 까다로운지 누구보다 돌마래 동물병원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선선히, 믿자고 하다니.


“물론, 설희 씨가 부족한 건 사실이고, 갑자기 정한 결정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제가 서포트할게요.”

“옥 선생이?”

“네.”

은우의 입꼬리에 미소가 얹어졌다. 그 말에 스태프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조금은 납득하는 모양새. 설희는 지금이 기회인 것을 알았다.


“그래요, 옥 선생님이 알려주세요. 어떻게 길러야 개를 잘 키울 수 있는지, 하나하나 다 알려주시면 되겠네요. 병원 끝나고도 오오오오랫동안.”

은우의 말에 혹해서 말한 건데, 순간 너무 오버를 했나 싶어 멈칫했다.

내 말을 뭔가 오해하진 않겠지?

막 병원 끝나고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식으로?

아니, 그런 거 아닌데.

두 사람의 지금까지의 미묘한 관계를 생각하면 조금은 너무 나간 발언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설희는 절박했다.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의 날카로운 눈길이 설희를 스쳤다. 반듯한 입술이 비틀려 얄밉고 심술궂게 호를 그렸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그가 톡톡, 테이블을 두들기며 말을 했다. 판사가 봉을 휘두르는 것처럼 땅땅, 결론을 내린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설희 씨가 곰곰이를 그렇게까지 입양해야 하겠다면, 제가 아주 철저히 알려드리면 되죠. 하나도 빠짐없이. 24시간 체제로 아주 꼼꼼하게.”

마치 천둥소리처럼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기대되네요. 병원 끝나고 오오오오오랫동안 설희 씨를 교육할 것을 생각하니.”

그렇게 설희는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갔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설희는 입원실에 들어갔다.

설희가 입양하기로 한 퍼그 곰곰이가 설희를 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동글동글 말린 꼬리가 마치 물결치듯 거세게 흔들리는 것만 보아도, 곰곰이가 얼마나 자신을 따르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


“곰곰아, 엄마 왔어. 밤중에 잘 있었어?”

곰곰이를 케이지에서 꺼내자, 설희의 발 주변을 신난다는 듯 맴돌았다. 까만 털뭉치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 같다. 그러다가 설희의 발목에 머리를 문질렀다. 보들보들한 감각이 기분 좋다.


“그래그래, 엄마도 보고 싶었어.”

설희가 집을 찾는 동안 곰곰이는 병원생활 중. 곰곰이를 얼른 데리고 가고 싶은데. 천식 걸린 엄마가 있는 집에 데리고 갈 수는 없으니 집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급하게 구해서인지, 아니면 예산이 부족해서인지, 영 집이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 설희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테크니션, 진영이 설희에게 물었다.


“집은 알아보고 있어요?”

설희는 한숨을 쉬며 미소 지었다.


“영 쉽지가 않더라구요.”

“개 키운다니까 집주인들이 싫어하죠?”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산도 넉넉지 않고, 위치도 중요했다. 병원에서 있는 시간이 기니 웬만하면 병원에서 가까운 곳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가까운 곳은 비싸고. 싸고 가까운 곳은 애완동물을 키울 수 없고. 그것도 아니면 입주 시기가 한참 뒤였다.

꼬박 일주일을 주변 동네는 물론, 30분 이상 떨어진 동네까지 찾아봤으나 적당한 곳이 없었다.


“과천 쪽도 좀 알아봐야 할까 봐요.”

“근데 그쪽은 작은 평수가 없을걸? 1인 가구를 위한 곳이 적은 걸로 아는데.”

“그렇구나.”

점점 설희의 한숨이 짙어져 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무리를 해서 대출을 받아서라도 집을 빌리는 것이 좋을까. 걱정이 많았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한숨을 쉬며 휴게실을 나서는데, 은우가 설희를 붙잡았다.


“설희 씨.”

“네?”

“잠깐, 둘이 이야기 좀 하죠.”

둘이? 무슨 이야기일까.

은우가 설희를 잡고, 아무도 없는 비품실로 들어갔다. 좁디좁은 공간에 둘만이 섰다.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일 관련은 아닐 터였다.

비스듬히 선 채, 은우가 설희를 바라본다. 말할까 말까,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을 보고 불안해졌다.


“집 구하기 많이 힘들어요?”

“아, 네.”

“큰일이네요.”

“네, 큰일이죠. 하지만 잘 될 거예요. 괜찮습니다.”

혹시, 곰곰이를 입양하는 걸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지는 않을까,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집을 못 구하면, 2시간 통근을 해서라도, 아니 대출을 받아서라도 곰곰이와 함께 살고 싶다. 그 외의 선택지는 설희에게는 없었다.

두 손을 불끈 쥔 설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은우가 입을 열었다.


“집 그렇게 구하기 힘들면…….”

어깨를 으쓱하며 은우가 말을 이었다.


“설희 씨, 내 집에 들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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