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진도가 너무 빨라요, 선생님.
(14/80)
14화. 진도가 너무 빨라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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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진도가 너무 빨라요, 선생님.
2022.12.17.
대답을 해야 하는데,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은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들었던가.
“이거 제대로 했나요, 유설희 씨.”
“집중하세요, 유설희 씨!”
“문진 기록은 자세히 적어주기 바랍니다, 유설희 씨.”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가끔은 자면서도 그가 자신을 딱딱거리며 “유설희 씨!”라고 부르는 악몽에 시달릴 정도였다. 언제나 딱딱하고 엄하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설희야.”
지금 그가 자신을 부르는 것은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말랑말랑하고 녹진했다. 익숙한 목소리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멈춰 있어. 괜찮아?”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한지, 은우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춥지도 않건만, 얼어버려서 눈을 동그랗게 뜬 설희의 뺨을 그가 손등으로 톡톡 쳤다. 그제야, 마법이 풀린 것처럼 설희의 입이 움직였다.
“아, 네.”
“갑자기 말이 없어서. 반말해서 기분 나빠?”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 거 치고 말이 너무 딱딱한데.”
그의 지적대로, 설희는 갑자기 자세도 말도 딱딱하게 굳어 로봇처럼 움직였다.
“……아뇨, 저. 어, 네.”
“반말해도 돼. 설희도.”
반말해도 된다니. 그리고 설희도, 라니.
그녀가 쫓아가기엔 은우의 진도가 너무 빨랐다.
물론 반말하라고 한 건 설희였고, 그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기분 나쁜 거랑은 다르게 도저히 그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눈앞이 어질거렸다.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할게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그는 늘 훅 들어왔다가 훅 빠져나갔다. 설희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그가 까닥,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준비되면 말해요.”
설희가 너무 긴장해서인가. 어느새, 다시 존댓말로 돌아왔다.
“나도 그때, 말 놓을 테니까.”
“선생님은 계속 반말하셔도 돼요.”
“공평하지 않잖아요. 천천히 해요.”
피식 웃는 모습이 상쾌했다. 뭔가 쑥스러워져,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럼, 선생님. 오늘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설희는 재빠르게 은우의 차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탁탁탁,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급했다.
***
유난히도 햇살이 강한 오후.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귀여운 퍼그를 데리고 왔다. 눈알이 땡그랗고 귀가 축 처진 귀여운 수컷 강아지였다.
“이름은 곰곰이고요, 8살이에요.”
오늘 처음 병원에 온 개였다. 설희는 컴퓨터에 여성이 불러주는 정보를 쳤다.
“제 이름은 김혜연이고, 010-3324-XXXX이고요.”
여성이 개인정보를 불러주는 사이, 곰곰이는 병원이 신기한지 연신 크고 까만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주변을 구경했다.
코가 앙증맞게 짓눌려 있었고, 축 늘어진 귀에 동글동글 말려 있는 꼬리가 너무 귀여워 깨물어 주고 싶다. 기분이 퍽 좋은지 복슬복슬한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설희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곰곰이가 참 귀엽네요.”
보통 강아지를 귀엽다고 칭찬하면, 보호자들은 기뻐서 웃곤 했는데, 이 보호자는 조금 달랐다. 여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그래요?” 대답하고는 진찰실로 들어갔다. 오늘의 곰곰이 담당은, 은우였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떠한 일로 오셨나요?”
은우가 오로지 진찰 때만 보여주는 ‘영업스마일’을 지으며 곰곰이와 여성을 맞이했다.
“아, 그게요.”
여성이 곰곰이를 진찰대 위에 올려놓고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얘가 힘이 없더라고요. 집에 들어가서 몸을 벌벌 떨질 않나, 산책도 좋아하는 편인데 잘 안 가려 하고, 안 걸으려 해요.”
“화장실은 잘 가나요?”
“그 화장실도요…….”
잠시 여성이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엔 잘 가렸는데, 이제는 자는 침대 주변에서 싸요.”
은우가 통통하고 짧은 몸을 꼼꼼히 만졌다. 그의 손이 곰곰이의 다리로 간 순간, 얌전히 가만히 있던 곰곰이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깨갱!”
뒷골에 삐죽, 솜털이 설 정도로 소름 끼치는 소리.
병원에 와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평온하던 곰곰이였다. 그런 아이가 큰 소리를 내자, 설희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어디가 안 좋긴 안 좋은가 봐. 소리가 너무 날카로웠다.
곰곰이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몸을 떠는 것을 보고 은우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언제부터 이랬죠?”
“한 일주일 전부터요.”
“집에서도 이렇게 가끔 소리를 지르던가요?”
보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가 개를 여러모로 관찰해보고, 입을 열었다.
“검사해 봐야 알겠지만, 반응을 봐서는 디스크 같습니다.”
“디스크요?”
“네, 엑스레이 찍어보고, 필요하면 척추 조영검사도 하는 게 좋겠습니다만, 반응만 봐서는 디스크, 추간판 탈출증 같습니다.”
그 말에 보호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스크라 하면…… 사람도 걸리는 그 디스크요? 허리 아픈?”
“네.”
그리고 옥 선생이 뼈가 그려져 있는 샘플을 들고 보호자에게 설명했다.
“여기 이곳이 추간판이란 곳인데, 나이가 들거나 비만이거나, 몸을 너무 격렬하게 움직였을 때, 추간판에 부담이 실려서 밖으로 돌출하면서 척수를 압박하는 병이에요.”
보호자의 표정이 한결 밝아지며 곰곰이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저희 아버지도 디스크 셨어요. 그럼 그냥 좀 조심하면 되는 거겠네요?”
그러자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 디스크랑 달리 애견 디스크는 치료를 해주시는 게 좋아요. 사람의 경우 디스크로 아예 하지마비가 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개들의 경우는 최악의 경우 하반신 마비나 그 뒤에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수도 있거든요.”
은우의 말에 보호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 곰곰이가 하반신 마비가 된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곰곰이는 지금 뒷다리 반응도 좋고, 아직 초기 상태이니 초반에 약물치료를 좀 하면 나아질 거예요.”
그래도 보호자의 얼굴은 썩 밝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죠?”
“우선 엑스레이를 찍어보고 말씀드려야겠지만, 입원치료를 삼사 일 정도 하시든지, 그게 싫으시면 통원치료를 좀 하시면서 약물치료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보호자가 옥 선생과 곰곰이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곰곰이는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보호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꼬리가 휘익 말린다.
“그럼 입원시킬게요.”
보호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곰곰이를 놔두고 휙, 대기실로 나가버렸다. 그녀의 반응이 놀라워 옥 선생을 바라보았다. 그도 당황했는지 잠시 멍하게 보호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곧 어깨를 으쓱했다.
“키우는 강아지가 병에 걸렸다고 하면 사람들 반응이 가지가지니까.”
보호자가 진찰실을 나가자, 혼자 남겨진 곰곰이는 불안한 듯 울었다.
“끼잉.”
‘엄마, 돌아와.’라는 듯.
그러나 보호자는 그런 곰곰이를 다시 돌아보지도 않고 퇴원하는 4일 뒤 데리러 오겠다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끄응…….”
입원실에 혼자 남겨진 곰곰이는 작게 울었다. 불안한 눈동자가 촉촉했다.
“괜찮아, 곰곰아. 4일만 있음 엄마 오실 거야. 잘 먹고 잘 치료받아서 건강하게 엄마 만나야지.”
그렇게 따스하게 설희가 말을 걸어도 곰곰이는 불안한 듯 흐느끼기만 했다.
끄응.
그 소리가 구슬프게 병원을 울렸다.
***
귀여운 곰곰이와 나흘간.
곰곰이는 처음 하루는 계속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다행히 이틀째, 사흘째가 되니 병원 생활이 익숙해졌는지 불안해 보이던 얼굴도 많이 평온해졌고, 우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꾹 눌린 코가 얼마나 귀여운지.
곰곰이를 들고 이곳저곳 진찰하던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염증이 많이 가라앉았나 보네요.”
“정말요?”
아팠던 동물이 몸을 회복하는 것은 언제나 좋긴 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더 기뻤다.
설희가 활짝 웃으며 곰곰이의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었다. 설희가 만지는 것이 기분 좋은지, 곰곰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얼굴을 손바닥에 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그래요. 통증도 없고, 반응도 좋고 하니 앞으로 조심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오늘 퇴원하는 날이죠?”
“네. 언제쯤 오시려나?”
“지난번에 오후 늦게 오셨으니, 오늘도 오후쯤 오시는 거 아닐까요?”
그러나 그날 저녁, 병원을 닫을 시간이 넘도록 보호자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연락이 없이 보호자는 곰곰이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날짜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전화 한번 해볼까요?”
설희의 말에 매니저가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곧, 핸드폰을 든 그녀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왜 그러세요?”
“없는 번호라는데.”
그 소리에 대기실로 걸어 나오던 옥 선생의 발이 멈췄다. 매니저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곰곰이 보호자요?”
“네.”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튀었네.”
“튀…… 튀다뇨?”
매니저가 난감한 듯 자신의 턱을 쓸어내리며 혀를 찼다.
“동물병원에 개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가끔 있거든요. 입원했다가 안 찾아가기도 하고. 길에 버리는 것보다 동물병원에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곰곰이는 시간이 지나 많이 안정되긴 했지만, 아직도 입원실에 누가 들어가면 그것이 엄마인지 아닌지 고개를 쭉 빼고 보곤 했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이 엄마가 아니면 다시 시무룩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바닥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설마요. 제가 전화번호를 잘못 적은 건 아닐까요?”
곰곰이가 온 첫날, 귀여운 곰곰이의 매력에 빠져 자신이 정신을 놓고 전화번호를 잘못 적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퇴원일인데 안 왔고…… 소개로 오신 분도 아니죠? 큰일 났네. 곰곰이는 반려견 등록도 안 되어 있던데. 찾을 방법이 없어. 혹시 정말 전화번호를 잘못 적은 게 아닐까요?”
“튄 거 맞아요. 분위기가 그랬어.”
은우의 말에 매니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랬어요?”
“보통 아프다고 하면 어떻게 치료하냐, 얼마나 걸리냐,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 물어보는 게 일반적인데 치료 방법도 안 물어보고 그냥 입원시켜달라고 하고 나가버리는 게 뭔가 그때 이상했어요. 아,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혹시 날짜 착각하신 거일 수도 있잖아요. 며칠만 기다려봐요.”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 설희는 긴장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야죠. 근데, 아마 안 올 거예요.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요.”
마치 이날, 옥 선생의 말이 예언된 것처럼, 일주일이 지나도 보호자는 끝내 곰곰이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
곰곰이는 병원에서 키우는 똘이나, 환자로 오는 강아지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사람도 잘 따라서, 특히 곰곰이를 좋아하는 설희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설희가 간식을 손에 얹어서 줄 때는 동글동글 말린 꼬리가 기분 좋은 듯 살랑살랑 움직였다.
설희가 쪼그려 앉아 곰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곰곰아. 오늘도 밥 많이 먹었네. 착한 우리 곰곰이.”
은우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유설희 씨.”
“네?”
설희의 작은 어깨가 떨렸다. 뭐 또 잘못했나?
그가 뭐라고 할지 무서웠지만, 곰곰이를 계속 쓰다듬는 설희의 작은 손은 쉬지 않았다. 부드러운 털이 손에 감겼다.
“곰곰이한테 너무 그렇게 붙어 있지 말아요.”
“지금은 휴식 시간인데요.”
불퉁한 설희의 말에 은우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보기 좋은 입술이 비틀린다.
“아, 그게 아니라.”
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상처받을까 그래요, 유설희 씨 상처받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