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딱딱하고 단단한. (11/80)


#11화 딱딱하고 단단한.
2022.12.06.


정신을 차려보니 은우의 몸 위에 설희는 올라가 있었다.


‘원래 남자 몸이 이렇던가? 이게 같은 인간의 신체가 맞는가.’

엎어진 충격보다, 무심코 몸 아래의 그의 육체가 가장 먼저 느껴질 정도로 단단하고 딱딱했다.

예전에 흘러가던 잡담 중에 매니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옥은우 선생은 아침 6시에 일어나 오피스텔에서 가까운 강가 산책길을 5km 정도 뛰고 집으로 돌아온 뒤 30분간 다시 가벼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대. 장난 아니지?”

병원 생활을 끝내고 뒹굴거리다 잠든 다음, 아침에 눈 뜨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어떻게 새벽부터 운동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매일.

저질 체력인 설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었는데, 그렇게 운동한 보람이 있었구나.

손 아래로는 떡 벌어진 가슴이 느껴졌다. 제 몸과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의 복근이 갈라진 게 그대로 전해져 온다. 설희의 여린 다리는 근육으로 단련된 허벅지 사이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스친다.

얼굴은 또 얼마나 가까운지. 조금만 움직이면 제 코끝이 그의 턱에 스칠 것만 같았다. 시선이 흐트러진다. 멍하니 있는 그녀를 은우가 바라보았다.


“어디 다쳤어요? 쓰러지면서.”

그에게서 시선을 받자 저절로, 귓가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아뇨.”

“얼굴이 창백해. 아무래도 다친 것 같은데. 어디 봐요.”

그의 단정한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앗.”

은우가 설희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입술이 저절로 반쯤 벌어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가만히 은우가 하는 대로 두고 보았다.

그는 혹시 설희의 동공에 문제는 없는지 확인한 다음, 온몸을 훑어보았다. 상처는 없는지, 멍은 들지 않았는지.


 
은우의 손가락이 귓등부터 목선, 그리고 쇄골까지 훑어 내려갔다. 딱히 음흉한 의도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꼼꼼히 스쳐 내려갔다. 마치 지난번에 똘이가 다쳤을 때 상처가 어디 있는지 살펴보는 것처럼.

저의는 없는 손길이지만 간지럽고 쑥스럽다. 살결이 붉게 달아오르고 발끝이 곱았다.


“하아.”

설희가 깊은숨을 내쉬자, 은우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왜 그래요? 어디가 아파요?”

“아뇨, 아픈 게 아니라, 기분이 좀 이상해서.”

은우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린다.


“긴장돼서요. 선생님이 이곳저곳 만지니까.”

어두운 창고 안, 설희의 말을 듣고 은우의 표정이 묘하게 바뀐다.


“설희 씨, 그 말…….”

그가 그리고 뒷말을 이으려고 한 순간,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은우야, 나 왔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나타난 사람은 진호였다. 문을 벌컥 열고는 멀뚱멀뚱, 은우의 위에 올라간 설희를 바라보았다.

어색한 시선이 설희와 은우를 부지런히 왕복했다.


“엄마야.”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설희는 제 눈앞에서 허리를 수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은우의 어깨를 밀어냈다. 설희의 목소리에 진호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 어,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나.”

“…….”

어색한 분위기가 가득 차고, 모두 다 말이 없었다.


“아까 그 은우 녀석이 문이 잠겼다고 안에 못 들어간다고 그래가지고 제가 지금 열쇠를 가지고 왔는데. 하여튼 이유가 어찌 됐건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 저, 다시 올게요.”

진호는 마치 래퍼처럼 말을 다다다다 내뱉고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 설희가 벌떡 일어섰다.


“아, 하, 왜 그러시지. 그…… 방해 아닌데. 그렇죠? 지금 우리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는데.”

아하하, 하고 웃으면서 설희 역시 말을 횡설수설하자, 은우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아무것도 안 하긴 했죠.”

“…….”

“아직은.”

아직은? ‘아직은’이 무슨 의미인가.

설희가 정신을 다시 차리기도 전, 은우 역시 손을 탁탁 털며 일어섰다.


“정말 몸 괜찮습니까? 아직도 멍한데.”

엎어져서 그런 게 아니라 당신 때문에 멍한 건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기는 해요. 근데, 저…….”

아무래도 긴장이 차올랐다. 지금 여기서 밝은 곳으로 나갔다간 붉어진 얼굴이 다 보일 터였다.

집에 가야겠다. 우선 잠깐 집에 가서 정신을 다듬어야겠다.

서둘러 설희는 말을 이었다.


“선생님. 아무래도 오늘은 그만 돌아가도 될까요? 넘어져서 옷에 먼지도 묻었고.”

“그렇게 해요.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한두 번으론 끝나지 않을 거라는 그의 선언 같은 말에 설희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지난주 금요일, 원더풀랜드에 옥 선생과 가서 동물원 구경을 했다.

바다사자, 펭귄, 돌고래까지. 은우와 둘이서 마치 동물원을 세낸 것처럼 돌아다녔다. 그러면 당연히 신나고 즐거웠던 동물들 생각만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현실은.


“하…….”

설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작고 가느다란 손이 형광등 아래 빛났다.


“미치겠네.”

손바닥에 와 닿던 단단하고 딱딱한 근육이 자꾸 떠오른다. 자신을 바라보던 까맣고 깊은 눈동자. 그리고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이던 목소리.


“설희 씨. 유설희 씨.”

 
그렇게 속삭이던 은우의 목소리. 그게 자꾸만 귓가를 스친다. 병원에 가봐야 할까. 쓸데없는 소리가 자꾸 들렸다.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이 감정이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쑥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미쳤나 봐. 상대는 옥 선생님인데.”

왜 쑥스럽고 그래? 그 깐깐한 옥 선생이잖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쓱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가 미쳤어?”

“앗.”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설희가 펄쩍 뛰었다. 혹시 옥 선생님? 당사자가 이야기를 들었을까 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다행히도 뒤에서 들려오는 킥킥거리는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놀라?”

“아. 매니저님. 오셨어요?”

“응, 설희 씨 좋은 아침.”

갈색 머리를 뒤로 질끈 넘기고 있는 여자. 그녀는 병원 전체의 회계와 홍보, 안내 등을 책임지는 매니저, 미진이었다.

들어와서 인사를 하자마자, 그녀는 뒤에 숨겨두었던 봉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 오도독오도독 갈색 알갱이들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 설희 씨 빨리 왔네?”

“네, 잠이 안 와서요.”

“어머, 잠을 못 잤어? 피곤해서 어떻게 해. 불면증이야?”

“아, 아뇨.”

그냥 좀 심란해서.

그렇게 덧붙이려다가 그냥 입을 닫고 그녀는 씩 웃었다.

설희가 처음 동물병원에 취업했을 당시부터, 유독 깐깐한 옥 선생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설희에게 한없이 잘 대해줬다. 원장인 외삼촌과 은우를 제외하면 병원의 모든 직원이 여자여서 걱정했었다.

팀장이 자신을 괴롭혔던 트라우마가 남았던 것일까. 전에 있던 직장은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여자가 많은 직장은 왠지 파벌도 심하고, 기 싸움도 심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다들 잘해주던지. 그 재미로 옥 선생의 일장 연설도 참아낼 수 있었다. 심란하다고 말하면 혹시 다정한 미진이 걱정할까 봐 설희는 화제를 미진의 손에 들려있는 봉투로 옮겨갔다.


“그런데 뭐 드시는 거예요? 아침 식사? 과자 드세요? 시리얼?”

설희가 매니저에게 묻자,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봉지를 보여주었다.

‘전 연령용 램 프리미엄 유기농 사료.’

강아지가 그려져 있는 봉투는 누가 봐도 사료였다. 설희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사료를 드시는 거예요, 지금?”

매니저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먹다 보면 맛있어. 먹어볼래요?”

그녀가 내민 봉투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설희는 손을 저었다.


“바, 밥을 많이 먹고 와서. 배가 불러서요.”

매니저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특이하다. 설희의 경악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미진이 키득키득 웃었다.


“사람도 사료 먹어도 되어요.”

하긴 사람이 먹어서 안 될 것들을 동물에게 먹이진 않겠지. 하지만, 저렇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신기해서 자꾸 눈길이 갔다.


“가끔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이건 무슨 맛이에요?’ ‘강아지들이 좋아할까요?’”

“아.”

“그럴 때 ‘이건 심심한 맛이고 이쪽에 있는 건 좀 감칠맛이 있는 편이라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놀라면서 물어요. ‘어떻게 맛까지 다 잘 아세요? 적혀 있나?’ 그럼 여기서 카운터펀치. ‘전 제가 다 먹어보고 판매해요.’”

“와. 그렇군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저 정도까지 치밀하게 생각하다니. 그러고 보니, 직접 먹어보고 판매할 정도면 믿을 수 있겠다 싶어 백발백중 사 갈 것 같았다.


“정말 매니저님은 대단하세요.”

“대단은 뭘. 돌마래에는 좋은 분들이 많아서 처음에 잘 배웠죠.”

“맞아요. 돌마래에는 좋은 분이 참 많아요.”

설희도 매일매일, 배울 것투성이였다. 감탄하는 그때, 병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랑.

그 소리에 안에 있던 채린이 급히 달려 나왔다.


“벌써 환자분 오셨나 봐요.”

“9시 전인데?”

커다란 키, 꽤 덩치가 큰 남자가 두리번두리번하며 사람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원더풀랜드의 수의사이자 은우의 친구인, 진호였다. 진호를 보고 채린이 입을 열었다.


“아직 진료 시작 전입니다.”

아, 그분은 환자 아니에요. 설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설명하려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아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면 안 되잖아.

자신이 여기서 일하는 것을 진호가 아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만약 진호가 자신을 알아보고, 금요일에 은우와 만났던 이야기를 한다면? 채린과 미진이 “어, 두 사람이서 왜 동물원을 갔어?”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끝이다 끝.

숨어야 했다. 설희는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몸을 수그렸다. 카운터 뒤에 바싹 붙어 얼굴이 보이지 않게 꼭꼭 숨었다.


“9시부터 시작인데, 조금 뒤에 다시 와주시겠어요?”

채린의 말에 병원에 들어오던 진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놀란 듯, 잠시 자신보다 한참 작은 채린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저었다.


“저, 아, 그, 환자 아닙니다.”

“그러면?”

“제 친구 옥은우가 여기서 일을 하는데, 전해 줄 게 있어서요.”

그 말에 채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 옥 선생님 친구분이시구나. 잠시만요.”

다시 한번 진호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채린이 안으로 달려 들어가, 진료실에서 준비 중이었던 은우를 찾았다.


“옥 선생님. 손님 오셨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은우가 안에서 나왔다.


“뭐냐, 넌?”

설희는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어, 너 원더풀랜드 와서 창고에 지갑 떨어뜨리고 갔던데. 금요일 밤에.”

설희 씨랑 와서.

그렇게 말하면 어쩌지. 그가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들켜버린다. 설희는 여기서 튀어 나가 진호의 말을 말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숨어서 그냥 들을 수만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져버렸다.

그때,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은우가 카운터 뒤에 쪼그리고 숨어 있는 설희를 발견하고 웃고 있었다.


‘말하면, 안 돼요.’

필사적으로 설희가 고개를 젓자, 은우는 진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랬구나. 찾았는데 거기 있었군. 고마워.”

“어, 그날 데이트 잘했어? 설.”

희 씨랑, 잘 들어갔어?

그 말을 진호가 하려는 순간, 은우가 말을 잘랐다.


“응, 잘 들어갔어.”

“설.”

“응, 그 여자분도.”

은우의 철벽방어로 나올 듯 나올 듯 제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진호가 설희라는 이름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요리조리 은우가 잘 막았다.

은우가 빙긋, 진호에게 예의 서린 웃음을 지었다.


“고맙다. 여기까지 와줘서.”

“뭐, 쉬는 날이라 잠깐 들른 건데, 뭐. 그럼 나중에 봐. 연락할게.”

손을 한들한들 흔들고는 진호가 병원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대기실은 갑작스럽게 시끄러워졌다. 채린과 미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휙, 머리를 은우에게로 돌렸다.


“이게 무슨 이야기야? 옥 선생님, 이게 무슨 이야기예요?”

“옥 선생님. 데이트하셨어요? 여자분이랑 뭐 어쩌고 하시던데?”

두 사람의 요란한 질문에 그가 고개를 까닥했다.


“네.”

간명하게 은우의 답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턱이 떡 벌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정말요? 옥 선생님이 데이트를?”

이번에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은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무언의 긍정, 그 미소에 더욱 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저 옥 선생님이 돌마래 오시고 나서 데이트하신다는 이야기 처음 들어요. 여자친구도 그동안 없지 않으셨나?”

“없으셨죠. 부원장님이 소개시켜 준다고 하셨는데도 거절하시고.”

설마 이제 와 그가 자신이랑 갔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재앙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은우는 그런 설희의 마음을 다 이해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네, 그렇게 됐네요.”

“여자친구 생기신 거예요? 아님 좋아하는 여자분이 생기신 건가요?”

“음…….”

그가 말을 길게 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가 진호가 나갔는데도 여전히 들키는 게 무서운지 카운터 뒤에 바싹 붙어 숨어 있는 설희를 내려다보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깨지고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 생겼습니다. 좋아하는 여자가.”

대단한 말을, 그는 대단치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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