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뜨겁게 와닿는 단단한
(10/80)
10화 뜨겁게 와닿는 단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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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뜨겁게 와닿는 단단한
2022.12.03.
은우가 툭 뱉은 그 말이 너무 달게 느껴져서 설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뭐랬어, 좋다고?
내가?
아니면 뭐가?
“그…….”
설희가 목을 꽉 눌러서 비트는 소리를 내자, 그가 싱긋 웃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동물원에 나온 것도 기분전환이 되고요.”
“아, 그렇죠.”
“네. 그래요.”
그런 말이었구나. 순간, 이 장소에 나온 것이 좋은 게 아니라 자신과의 데이트가 좋다는 말로 들렸다.
이건 그냥 가짜 데이트인데, 진짜 감정이 피어오르려고 한다. 아까부터 손잡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어두컴컴한 곳에 둘이 있어서 그런가.
다시 또 손을 빼려고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다시 그의 단단한 손이 따라온다. 손에서 땀이 날까 봐 걱정인데, 그는 그런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손가락과 손가락을 겹쳤다. 여린 살을 은우의 단단한 손끝이 짓눌렀다.
따끔따끔한 전기 같은 것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저기, 그…….”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뭐가 좋을까. 뭐든 좋으니까. 생각해, 유설희. 생각하라구.
“그, 옥 선생님은 왜 원더풀랜드에 남지 않으시고 동물병원에 오신 거예요? 인턴도 하셨다면서.”
“음.”
은우가 잠시 고개를 돌려 아름답게 수영하는 바다 생물들을 바라보았다.
“난 동물을 보고 싶어서 수의사가 되었습니다.”
그건 지금까지 병원에서의 은우의 행동거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볼 때는 다소 냉정하고 가라앉아 있는 눈초리였지만 강아지나 고양이를 볼 때면 한없이 다정했다.
“원더풀에 있으면 그 외 잡다한 일이 많아서.”
“아…….”
“결국은 수의사로 남기 어렵기도 하고.”
“여기는 수의사로 입사해도 나중에 다른 일을 하게 되는 건가요?”
그 말에 그가 머리를 기울였다. 목 근육이 비쭉, 선다. 잠시 그가 미간을 모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말고 흐렸다. 괜한 이야기를 물어봤나?
어쩌면, 여기에 인턴 채용이 되었다가 연장이 안 된 걸 수도 있는데!
“곤란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저, 옥 선생님은 저에게 묻고 싶은 점 없으세요?”
서둘러 말을 돌렸다.
“나요?”
“네. 알아둬야 사람들 앞에서 입을 맞추죠.”
“유설희 씨는……. 어떤 남자를 좋아합니까?”
“네?”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설희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어떤 남자가 좋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연예인으로 따지면 정석으로 잘생긴 연예인을 좋아했다. 실제로 만나는 남자는, 어떤 남자를 좋아하던가.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찬정도 사귀다 보니 그냥, 우정같이, 친구같이 지냈던 것 같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다른 건 모르겠는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는 배신하지 않는 남자가 좋아요.”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이야말로 속이 쓰리고 아팠다.
연락 잘 되고, 다른 여자 안 쳐다보고, 그런 남자가 좋았다.
“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좋다는 설희의 말에 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불쌍해 보이는 걸까. 동정받기는 싫어서 얼른, 말을 덧붙였다.
“옥 선생님은요, 어떤 여자가 좋으세요?”
“나요? 글쎄.”
“어른스럽고 세련된 여자를 좋아하실 것 같아요, 왠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어떤 분이 좋으신데요?”
그의 눈이 물에서 유영하는 가오리를 좇았다. 팔랑팔랑, 날개가 움직인다. 마치 하늘을 유영하는 것 같은 가오리를 보면서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반듯한 미간이 좁아졌다.
“글쎄. 왜 좋은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
“네?”
제대로 들리지 않아 설희는 까치발을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데도 가보겠습니까?”
그리고 은우는 손가락을 들어 출구를 가리켰다.
***
도화재(桃花齋).
복숭아나무가 많아 지어진 이름을 갖고 있는, 정원이 많이 정리된 지금에도 50년 넘게 키운 복숭아나무가 서 있는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지금 시기에는 더더욱이나 그 광경이 찬란했다.
늦은 밤. 어두컴컴한 암흑 속에 하얀 꽃잎들이 휘날렸다. 그 속에 한복을 곱게 입은 중년의 여인이 오롯이 서 있었다. 치맛자락이 흐트러진다.
“날이 좋구나.”
곧, 양복을 입은 남자가 정원의 끝에 등장했다. 저벅저벅 걸어가 그녀에게 허리를 숙였다.
“사모님.”
“응?”
혼자 오롯이 흩날리는 복숭아꽃을 보던 여인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방해됐는지 미간에 잘은 주름이 졌다. 죄송하다는 듯,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원더풀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원더풀이라는 말에 여인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갑자기 원더풀랜드에서는 왜? 급한 일이라도 있다든가?”
“그…….”
“그?”
남자가 어려운 듯 입술을 달싹이자, 여인이 답답한 듯 재촉해 물었다.
“뭔데요. 답답하게 왜 이러시나, 이 사람이.”
“도련님이 오셨었답니다.”
“은우가?”
여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전까지 별 흥미 없이 꽃만 바라보고 있던 눈에 총기가 비췄다.
“네.”
“원더풀엔 관심도 없는 녀석이 웬일로? 진호를 만나러 간 건가?”
“아뇨, 여자분이랑 오셨다는데요.”
“여자.”
그 말에 여인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래? 정말 여자랑 왔단 말이야?”
“네.”
“업무상 온 건 아니고?”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사적으로 방문하신 것 같은데, 사모님께서 아시고 싶으실 것 같아서.”
“상대가 누군지는 아나?”
“아뇨, 아직.”
그러자 여인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래요, 그럼 좀 알아봐 줘요.”
“알겠습니다.”
“빠짐없이 꼼꼼하게.”
“네.”
남자에게 확답을 받아 내고 나서야 여인이 바라보던 복숭아나무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신기한 일일세, 은우 녀석이.”
그렇게 싫다 하던 원더풀에 그가 돌아갔다니,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
동물원 구경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기린 보러 갈래요?”
“기린이요?”
“네. 무섭지 않아요.”
“네! 보고 싶어요.”
은우는 사육장으로 설희를 데리고 왔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둑어둑하고 매캐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창고고, 여기를 지나면 사육장이에요.”
“그렇군요. 근데…….”
이곳은 일반인이 들어가면 안 될 것처럼 보였다. 출입금지 구역이랄까.
“이렇게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되니까 데려왔죠.”
“아까 친구라고 말한 진호라는 분, 되게 높은 분인가 봐요.”
아무 데나 다 들여보내 주다니.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신기하고도 즐거웠다.
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진호요? 그냥 수의사예요. 대학 동기.”
“고맙네요, 저 야생동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거 처음이거든요. 멀리서만 보고.”
창고를 지나가는데,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걸쇠로 걸려 있었다. 덜컹, 열려다가 은우가 손을 멈췄다.
“잠겨 있네.”
“어, 그럼 못 보는 건가요?”
“아뇨, 진호 불러서 열어달라고 하면 됩니다.”
“곤란하면 안 들어가도 되어요. 지금까지도 충분히 환상적이었어요.”
가짜 데이트인데도, 진짜 데이트보다, 아니 자신이 인생에서 겪었던 모든 일 중에 이렇게 특별한 데이트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나 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여기까지 왔으니 보러 가죠.”
그리고 그는 진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엑스레이 찍는 중이라 한 10분 걸릴 거야. 조금만 기다려.”라는 말이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들었죠? 조금 기다려도 될까요. 시간 여유 있어요?”
“네. 저는 괜찮아요.”
기린을 눈앞에서 본다는데, 뭐가 더 중요할까.
그렇게 진호를 기다리는 동안 창고에 두 사람이 남았다. 불을 켜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작은 창문에서 들어온 희미한 달빛 때문에 어둡지는 않았다.
괜스레 어색해져서 고개를 들어 이곳저곳을 살폈다. 동물을 관리할 때 쓰는 것인지 처음 보는 듯한 갈퀴들도 있었고, 빗자루와 청소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지 않은 도구들도 꽤 많았다. 설희가 고개를 빼 안쪽을 들여다보며 은우에게 물었다.
“저런 건 뭘까요?”
“뭘 말하는 거예요?”
뾰족뾰족, 끝이 날카로운 창 같은 것이 보여 신기했다. 설마 동물을 찌르는 용도는 아닐 거고. 그러자 은우가 설희가 뭘 가리킨 건지 잘 보이지 않았는지 그녀에게로 바싹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바싹 좁아진다. 생각하지도 못한 접근이었다.
매캐한 창고 내의 공기 속에서, 그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화이트 머스크의, 사람을 현혹하는 향. 평소에는 인식한 적도 없었는데 어두워서 그런지 심장이 쿵 떨어진다.
너무 가까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버렸다.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그 순간.
“엇!”
설희의 등이 딱딱한 선반에 부딪히고 놀라 고개를 쳐들자, 그때 무언가를 건든 것인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어어!”
와르르.
선반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설희가 있는 곳이 아닌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매캐한 먼지가 날렸다.
“어, 어떻게 해.”
“설희 씨, 괜찮아요?”
“네, 저는, 콜록, 괜찮은데.”
이렇게 다 떨어져 내려도 되는 것일까. 물건들이 괜찮은가 설희가 고개를 숙여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너무 어두운데 움직여서 문제였던 것일까. 바닥에 있는 동그란 물체를 밟고 눈 깜짝할 사이에 설희의 여린 몸이 흐트러졌다.
“엇.”
이번에는 바닥으로 엎어진다, 바보같이.
몸이 흔들리자, 떨어질 충격을 예상한 설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꽉 감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흘러도, 아무렇지도 않다. 아프거나, 충격도 없었다.
“하…….”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것은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소리도, 매캐한 먼지가 날리는 소리도 아닌.
낮은 한숨 소리.
“옥 선생님.”
그가 몸을 날려, 설희를 구해준 모양이었다.
덕분에, 아픔은 거의 없었다. 설희의 몸을 끌어안은 채, 은우가 읊조렸다.
“……설희 씨, 제발. 허둥지둥하지 말아요.”
“괜찮으세요?”
“괜찮……. 괜찮은데, 괜찮지 않기도 하고.”
그러고는 그가 설희를 내려다보았다.
쓰러진 충격으로 인해 다른 것을 신경 쓰지 못했는데, 지금 설희는 그의 몸 위에 올라가 있었다.
너른 어깨에 고개를 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밀착되어 있었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설희의 다리가 빠져 들어갔다.
그의 몸과 완벽히 하나가 되었다.
“……엄마야.”
딱딱한 근육, 뜨거운 숨결, 그리고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모든 것이 선연하게 어둠 속에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