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데이트, 데이트, 첫 데이트
(8/80)
8화 데이트, 데이트, 첫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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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데이트, 데이트, 첫 데이트
2022.11.26.
옥 선생님이랑 내가 데이트?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요?”
데이트라는 건, 둘이 만나서 놀러 가서 로맨틱한 시간을 보낸다는 말인데.
같이 모임을 나가고, 할머니께 인사를 가는 것 말고도 더 시간을 보내겠다는 말인가.
설희의 물음에 그가 몸을 돌리고 눈썹을 끌어올렸다.
“최소한 둘이 놀러 간 사진 한두 장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제야 그의 의도가 순수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 이야기도 사람들이 궁금해할 거고.”
순간, 그의 말이 그냥 순수하게 자신과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말로 들려서 당황했는데 오해였구나.
그래, 혹시 친구들이 사진이라도 보여달라 했는데 같이 찍은 사진이 병원에서 찍은 것밖에 없으면 다들 의심하겠지. 할머님도 그렇고.
“인사드리러 가기 전에 매 주말, 데이트합시다.”
왜 필요한지는 이해했지만, 매 주말을 만나야 한다니.
“꼭 해야 할까요?”
“네.”
은우의 답은 간결했다. 절대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하는 얼굴.
“그것도 매주?”
“그래야죠. 시간 여유가 많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야…….”
진짜 연애 같잖아.
그렇게 말하려 하다가, 단호한 은우의 눈과 마주쳤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표정.
그에게 아니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
긴 하루였다.
샤워를 한 은우는 머리를 털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물방울이 드러난 그의 탄탄한 어깨 위를 또르르 타고 내려와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 위에 맺혔다.
“하아.”
크게 숨을 쉬고는 냉장고를 열었다. 잘 정리된 식재료가 쌓여 있었지만, 구미가 당기는 것은 없었다. 저녁식사 전이었지만 식욕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차가운 맥주였다.
탁.
맥주캔을 따고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액체를 삼킬 때마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시원한 맥주가 안으로 들어가고 따가운 탄산이 점막을 자극하고 나서야, 오늘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하…….”
길게 숨을 쉬고 나서야 정신이 맑아진다.
“유설희.”
오늘 제 안을 휘저었던 여자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녀가 돌마래 동물병원에 취업하고 몇 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설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요즈음은 더욱 그렇다.
여자에 관심이 별로 없는, 아니 다른 인간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은우였지만 설희에게는 달랐다. 그 작은 여자가 제 머릿속을 들어와 온통 헤집고 나간다.
고개를 들어 동그란 눈으로 한 점 의심 없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녀.
피식, 웃음이 샜다. 은우가 정말 어떠한 흑심도 품지 않고, 오직 할머니만 위하는 손자인 것으로 믿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술을 들이마셨는데도 입안에는 갈증이 돌았다.
꿀꺽꿀꺽.
맥주를 다 들이켠 은우는 휴대전화를 들어, [이진호]라는 이름을 찾았다. 전화 버튼을 누르자,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 목소리가 울렸다.
-얼, 옥은우. 웬일이야?
진호는 은우의 오랜 친구였다. 최근에는 병원 일이 바빠 자주 연락하지 않아서 반가운 목소리였다. 은우가 맥주캔을 구기고 저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휙, 던지며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좀 있어서.”
-부탁? 네가? 내가 너한테가 아니고 네가 나한테?
호들갑을 떠는 진호의 목소리에 은우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와 웬일이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부탁하기도 전에 이 모양이니 부탁을 하고 나면 어떻게 대할는지.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그래, 내가 너에게 부탁을 할 게 있어.”
-뭔데? 옥은우 선생의 부탁이라니,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드려야지요. 뭔데, 뭔데.
“이번 주 금요일 영업시간 종료 후에, 나 좀 들여보내 줄 수 있어?”
-갑자기 왜?
“…….”
-평소에는 놀러 오라고 해도 안 오면서. 뭐 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내가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어?
은우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진호는 은우의 부탁이 뜻밖이었는지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색색거리며 숨만 쉬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겨우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조용히 속삭였다.
-설마…… 여자야?
시끄러워지겠네.
하지만, 어차피 금요일 날 그와 만나게 될 거라 차라리 전화로 호들갑을 떨게 만드는 게 낫다. 듣기 힘들겠지만, 설희 앞에서 진호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는 것보단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았다.
“그래.”
-여자? 진짜 여자야? 그, 업무상 오는 거 아니고 진짜 여자랑 오는 거야?
“……그렇다니까.”
-진짜 진짜로?
참아주기 힘든 진호의 설레발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은우가 한숨을 탁 뱉었다.
“그냥 가지 말까.
-어?
“가서도 이럴 거면 안 가는 게 좋겠다고.”
-아, 아냐. 난 그냥…….
말을 길게 늘어뜨린 진호가 서둘러 덧붙였다.
-아냐 와주세요. 제에발 와주세요, 옥은우 선생님. 네가 나한테 부탁하는 일이 진짜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인데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거기다가 여자라니. 워후.
진호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도 더 호들갑을 떨어서 은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하아.”
-그날은 안 그럴게.
“8시까지 갈게.”
-그래, 꼭 와. 은우야, 기다릴게. 옥은우 기다린다!
진호의 말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저 멀리 휴대전화를 집어 던졌다. 금요일 밤의 일이 기대되면서도 진호의 반응이 불안해지는 것은 왜일까.
***
은우에게서의 전화는 갑작스러웠다.
그가 설희를 데려다준 밤, 집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rrrrr
[옥은우 선생님]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설희는 바짝 긴장했다. 그와 전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납니다. 옥은우.
“앗, 네 선생님.”
-갑자기 미안한데, 혹시 이번 주 금요일 퇴근 후에 시간 있습니까?
“아…….”
-아까 말했던 그 건 때문에 그런데.
‘그 건’이라 하면.
“네, 시간은 있는데. 그……. 데, 데, 데.”
데이트라는 말이 어렵지도 않은데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네, 데이트. 데이트란 말이 뭐라고 그렇게 어려워합니까.
“아, 죄송합니다.”
은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괜찮아요, 금요일.”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그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설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서, 선생님.”
-네?
“그날 옷, 어떻게 입고 갈까요?”
문득, 처음으로 그가 레스토랑에 데려다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퇴근 후 그가 데려간 고급 레스토랑에서 자신 혼자 너무 편한 옷차림이어서 붕 뜬 게 생각났다.
-옷? 평소처럼 입으세요.
“지난번 마냥 저 혼자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어디 가는지라도 알려주세요. 옥 선생님도 못난이 데리고 다니고 싶진 않으시잖아요.”
-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쿡, 상대방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 입어도 예쁘니까.
“……네?”
잘못 들었나? 싶어 설희가 눈을 깜빡인다. 하지만 농담기가 섞였던 것을 보니 진짜인 것도 같고.
옥 선생이 나한테 예쁘다고 한 거야? 옥 선생이 나한테 농담을 한 거야?
아직도 자신의 귀에 울려 퍼진 나지막한 목소리가 믿기지 않았다.
-그럼, 잘 자요.
설희가 뭐라고 하기도 전 전화가 툭 끊겼다.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그날 쉬이 잠들지 못했다.
***
옥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다.
은우는 자신에게 어떻게 입어도 예쁘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입어야 할지 설희는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만 했다.
병원에 출근할 때 입어야 하는데 너무 화려한 옷은 또 안 되고, 지난번 경험에 비추어 봐서 또 너무 후줄근한 옷도 안 될 것이고.
아침 6시부터 일어나 한참 고민한 끝에 단정한 감색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어머, 설희 씨.”
업무가 끝나고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같은 수의 테크니션 채린이 락커를 닫다 말고 고개를 삐쭉 내밀며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너무 예쁜데. 혹시 남자친구분과 데이트 있으세요?”
“데이트요?”
익숙하고도 낯선 단어에 설희가 펄쩍 뛰었다.
“아아니요오? 무슨 데이트라니 절대 아니요? 저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아.”
너무 과격하게 아니라고 말했던 것일까. 채린의 얼굴에 미안하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친, 친구랑 놀러 가거든요.”
채린과는 사이가 좋아 가끔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였다. 혹시 그런 그녀가 더 캐물을까 봐 설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인사를 했다.
“그럼, 좋은 주말 되세요!”
후다닥, 병원을 빠져나와 근처 주차장까지 뛰어갔다.
오늘 밤은 은우와 드디어 데이트라는 것을 하는 날이었다. 데이트라는 것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그와 정말 좋아해서 하는 것도 아닌데. 속절없이 입이 마르고 긴장이 됐다. 오늘 온종일 무슨 정신으로 일을 했는지 모른다.
은우와 손끝이라도 스칠 때면 화들짝 놀라 벽 쪽으로 뛰어올랐다.
그렇지만 절대로 병원 사람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한 달, 딱 한 달. 친구들과 찬정, 그리고 그의 조모에게 두 사람의 연애를 보여주고 나서는 해제될 사이였다.
그런데 직장 사람들에게 들킨다면?
아니 될 말이었다. 이미 한 번 사내 연애를 겪어본 설희였다. 진짜 연애도 아닌데 그런 고통을 겪을 수는 없다.
설희의 외삼촌이 돌마래 동물병원 원장이 아니던가. 둘이 사귄다는 거짓 정보가 그의 귀까지 들어가면 설희의 부모님이 아시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엄마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절대 들켜서는 안 됐다. 그래서 오늘 설희와 은우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병원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와 약속된 장소로 가자, 차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장신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바람이 불자, 남자의 코트 자락이 나부끼며 살짝 꼬고 있는 긴 다리가 드러났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빛나는 눈동자가 눈부셨다.
인적이 드문 거리였지만, 지나가는 여자든, 남자든, 모든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혼자 서 있는 남자를 눈으로 훑었다.
하, 안 돼. 역시.
저 남자와 임시 연애 중이라는 것을 들키면 온 세상이 야단법석일 것이다.
***
“여깁니다.”
은우가 차를 세우고, 끽 기어를 올렸다.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서울 근교의 유명한 테마파크의 직원용 주차장이었다.
[원더풀랜드]
설희도 고등학생 때 소풍으로 와본 적이 있었다.
오늘은 8시면 영업이 끝난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는 화려한 불빛으로 꾸며져 있는 간판들이 다 불이 꺼져 있었다.
“여기요? 영업이 끝난 것 같은데.”
“아는 사람이 있어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한 은우는 차에서 내려 반대편으로 걸어왔다. 아무렇지 않게 차 문을 열어주고는 손을 내밀었다.
“자.”
응? 어떻게 하라는 거지?
영문을 몰라 설희가 가만히 그의 큰 손을 바라보자, 그가 손끝을 까닥였다.
“잡아요. 어두우니까.”
엉겁결에 그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
손을 갑자기 왜?
설희가 놀라 고개를 숙이자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손부터 시작하죠.”
“…….”
“우리 사이.”
망설임도 없이 마디마디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