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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렇게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다. (7/80)


7화. 그렇게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다.
2022.11.22.


후회해도 이미 소용없었다. 뱉어버린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찬정도, 설희도 그녀가 한 말에 놀라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그가 황당한지 입을 벙긋거리다가 말을 겨우 이었다.


“뭐? 결혼? 너……. 그 남자랑 그때는 안 사귄다고 했잖아. 바람 아니라며.”

“그때는 사귀는 사이 아니었어.”

“근데 일주일 지난 지금 결혼을 염두에 두고 사귄다고?”

“어.”

이미 터져버린 입에서는 술술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설희가 말을 서둘러 덧붙였다.


“너랑 그렇게 헤어진 거 보고 위로해 준 것도 그 사람이야. 그 사람이 나한테 결혼을 염두로 사귀어 달래. 마침 헤어지기도 했고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사귀기로 했지.”

반은 맞고 반은 거짓말.

그날 찬정 때문에 무너진 설희를 감싸 안아주고, 말없이 그녀의 곁을 은우가 지켜준 것은 맞다. 한참 우는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연애하자고 한 것도 맞지.

물론, 그게 진짜 감정으로 한 말이 아니었고 결혼을 염두로 사귀어 달라는 말도 없었지만.


‘옥 선생님 죄송해요. 그렇지만 옥 선생님도 한 번은 거짓말하셨으니까 봐주세요.’

속으로 그에게 사과하고는 설희가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니까 찬정아, 정말 너랑 다시 사귈 수가 없거든.”

“거짓말 마. 유설희.”

그러나 찬정은 급조한 그녀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너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야? 너 지금 거짓말하는 거 다 눈치챘어.”

“무슨 근거로 거짓말이라고 해?”

“설희 너 거짓말하면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되는 거 알아?”

“뭐?”

설희가 그의 지적에 문득, 고개를 돌려 가게의 쇼윈도에 제 얼굴을 비춰봤다.

유리에 비친 제 눈썹이 팔(八)자 모양을 그리고 있다. 찬정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너 그 남자랑 수준 안 맞는다고 해서 화나서 되는 대로 거짓말하는 거네.”

뜨끔.

설희는 순간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여봐라는 듯, 찬정이 웃었다.


“유설희. 내가 너 자신보다 널 더 잘 알아.”

“아니. 진짜거든. 사귀는 거 맞아.”

“그래? 그럼 증명해봐.”

“뭘……. 어떻게 증명하라는 말이야?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결혼 증명서라도 떼오라는 말이니?”

“아니. 다음 달에 동창 모임 있잖아.”

“뭐?”

찬정과 설희는 같은 대학, 같은 과 출신이었다.

설희는 한 과에 40명밖에 안 되는 소수 과로, 전공과목이 특수해서 다 같이 수업을 듣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다 같이 친하게 지내고 분기에 한 번 다 같이 모임을 하곤 했다.

찬정과 설희는 CC에 사내 연애였기 때문에 늘 같이 참여했는데.


“거기 네 남.친.이라는 사람 데리고 와봐. 결혼 정도로 심각하게 사귀는 거면 데리고 올 수 있지?”

“말도 안 돼.”

거기에 새로운 남자친구를 데려가면, 온갖 동기들이 다 알게 된다.

그냥 찬정에게 사귀는 남자가 있다고 말하는 거랑은 천지 차이였다.

가면 동기들이 찬정이랑 헤어지고 어떤 남자랑 사귀는지 상어 떼처럼 살펴보고 물어뜯을 것이고, 나중에 은우랑 헤어졌다고 말하면 또 쑥덕거릴 텐데.

물론 지금까지 애인을 데려오는 친구가 없지는 않았지만, 다 결혼 상대였다.

거기다가 옥은우가 예사 인물인가. 병원에 오는 보호자들도 처음 진료에 들어오면 말을 순간적으로 잃을 정도로 빛나는 얼굴이었다.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같이 밥을 먹을 때도 안내해주던 직원이 별것 아닌 은우의 말에 얼굴을 붉혔었지.

그 외모라면 아마 10년 후에도 친구들은 “그때 사귀었던 남자가 참 잘생겼는데.”하고 염불을 욀 것 같았다. 혼삿길 막힐 일 있어.

설희가 당황해 말을 더듬더듬 이었다.


“아직……. 사귄 지 일주일짼데 어떻게 거길 같이 가.”

“일주일짼데 결혼 운운하는 건 말이 되고?”

찬정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결혼 전제라며. 언젠간 친구들에게 소개해줘야 하는데 왜 못 와? 거짓말이니까 못 오는 거지.”

할 말이 없었다. 이찬정은 쓸데없을 때만 감이 좋다.


“넌 나 아니면 안 된다니까, 유설희.”

나 아니면 안 돼.

제가 바람까지 피우는 잘못을 해놓고 갑자기 거들먹거리는 찬정이 얄미웠다. 열이 머리로 뻗쳤다.


“이찬정. 너 따위 아무것도 아니야. 너 아니면 안 된다고? 나 너 없이도 잘살아.”

“…….”

“그날 와서 똑똑히 두 눈으로 보고 가. 우리가 얼마나 닭살 커플인지.”

분명 후회할 테지만, 자신의 말에 순간적으로 구겨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잠시나마 통쾌함을 느꼈다.


 

***

아, 내가 왜 그랬을까.

통쾌함은 잠시였고, 후회는 길었다.

백번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찬정이 아무리 심한 말을 제게 내뱉었어도 이제 다시 보지 않으면 되는 것을.

회사도 따로 다니고, 가끔 동창 모임에서 보는 게 다일 터였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면 됐는데 왜 그의 도발 한 번을 참지 못하고 유치하게 대응했을까.

설희는 지금,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오늘 제가 저지른 일을 후회하며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합니다. 옥 선생님.”

“…….”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퇴근 후.

설희는 은우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고 한 레스토랑으로 그를 초대했다.

그가 설희를 데려갔던 레스토랑만큼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제가 이 동네에서 아는 곳 중에서는 제일 괜찮은 곳이었다.

이 정도 비싼 밥은 먹여야 부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그랬듯.

설희가 사정을 이야기하는 동안, 은우는 턱을 괴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깊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랬군요.”

“네,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자존심을 세우다가.”

사정을 다 말하는 게 얼마나 창피한지, 말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은우도 같은 거짓말을 했다지만, 사안의 경중이 달랐다.

할머니가 아프셔서 오해에 그냥 장단을 맞춰드린 은우의 것과 전 남자친구의 유치한 도발에 넘어간 제 제안은 너무나도 다르지 않은가.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이라고 말해버렸어요.”

그렇게 그에게 전할 때는 정말 죽고 싶었다. 은우는 설희의 변명이 이어질 동안 말없이 이야기만 들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이해합니다. 그럴 때가 있죠. 마에 씌었던 것처럼.”

“정말로 그래요.”

마에 씌었던 것만 같았다. 지금도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지금 앉아 있는 레스토랑은 근사한 토마토 페투치네가 있었다. 그래서 오면 늘 행복했는데, 오늘은 그 좋아하는 메뉴가 나와도 이게 크림인지, 토마토인지 무슨 맛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설희가 주먹을 꼭 쥔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 정말 죽고 싶다.

인제 와서 이찬정에게 사실 못 간다고, 다 거짓말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못 할 일 같았다. 은우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못 할 일이지만.

다 떠나서 이찬정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다는 불순한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 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설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말인데, 저…….”

“같이 가죠, 그 모임에.”

은우가 눈을 느른하게 뜨며 말했다.


“나라도 괜찮다면, 같이 가요.”

“정말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의 질문에 설희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눈앞의 은우를 바라보았다.

나라도 괜찮다면, 이라.

주관적으로 설희가 그를 어려워하는 것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옥은우라는 이 남자의 비주얼은 완벽했다.

살짝 걷어 올린 머리카락이 멋스럽게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에 쭉 뻗은 콧날, 붉은 입술. 잘나도 너무 잘난 게 많은 이 남자는 속눈썹까지 길고 유려했다.


“옥 선생님이 가주시면 당연히 감사하죠.”

오죽하면 이찬정까지 내가 이 남자에게 부족하다고 할 지경이니 자신이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해야 할 지경이지.

은우가 입을 열었다.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

“안 그래도 그렇게 하자고 말할 셈이었어요. 할머니 일, 말씀이시죠?”

“네. 같이 인사드리러 가주겠습니까?”

“네. 갈게요.”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그의 조모는 지금 병환 중. 그런 분에게 충격을 드려서 혹시라도 병환이 위중해지면 나중에 후회할 테니까.

설희의 말에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그럼.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모임에 나와주는 빚을 갚는다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한 번 정도는.

근데, 한 번 맞겠지?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벌써 두 번째라 그런가, 설희는 은우의 차를 타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차 안에서 풍기는 아이리스 향도, 능숙하게 운전하는 옥은우 선생의 옆모습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다.

병원에서야 긴장 때문에 그의 얼굴 감상할 시간이 없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그것도 밀실에서 바라보니 그 외모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긴 속눈썹, 그 아래 번쩍이는 진갈색의 눈동자. 코는 얼마나 오뚝한지, 바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가끔, 보호자들이나 병원의 다른 직원들이 “병원에 있긴 아까운 인재야.”라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옥 선생이 조금 더 평범하게 생겼다면, 찬정이 그렇게 의심할 일도 없었을까.


“오늘 하루가 정말 기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찬정이 병원을 쳐들어온 일이며, 은우와 가짜 연애를 하게 된 것까지.

사람의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오랫동안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찬정이 이렇게 몰상식하게 굴 줄은 몰랐다.

은우 역시 그랬다.

늘 무섭고, 까다로운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도움을 주고, 받고, 가짜 연애까지 해야 하다니.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동창 모임은 둘째치고, 그의 할머니까지 능숙하게 속이는 것을.

흘러가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설희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음?”

“제 동창 모임은 다음 달인데, 할머님은 언제 뵈러 가는 게 좋으시겠어요?”

“글쎄요.”

그가 설희의 집 앞에 능숙하게 차를 대며 기어를 바꿨다.


“다음 달쯤 가면 어때요. 우리가 좀 익숙해져야 할 테니.”

“익숙해져요?”

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할머니는 사람을 많이 상대한 분이라 서툰 거짓말을 하면 금방 들킬 겁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합니다.”

“무슨 연습이요?”

“난 설희 씨가 남자친구가 있었던 걸 몰랐을 정도로 병원 밖의 유설희 씨에 대해 모릅니다. 유설희 씨도 나에 대해 잘 모르죠.”

사실이었다.

병원에서 설희가 업무적으로 가장 많이 합을 맞춘 것은 은우였다. 그래서 수의사로서의 그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가족을 저렇게 생각하는 다정다감한 남자인 줄도 몰랐고, 그의 차에서 아이리스 향이 나는 것도 몰랐고, 또 이렇게 어두운 데서도 빨려 들어갈 정도로 깊은 눈동자를 가진 줄도 몰랐다.

은우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 서로 알아갑시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은우의 할머니도 예리하다고 하셨지만, 설희의 친구들도 은우와 설희가 지금처럼 서먹서먹하고 서로에 대해 잘 모르면 이상하다고 느낄 터였다.

무엇보다 그 얄미운 이찬정이.

조금은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알아가면 좋을까요?”

설희를 바라보는 은우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데이트하죠, 우리.”

“……네?”

“설희 씨랑 데이트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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