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불순한 사고
(6/80)
6화 : 불순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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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 불순한 사고
2022.11.19.
다정한 말이었다.
아침부터 잔소리를 끼얹었던 옥 선생이 맞긴 한 건가. 그렇게 의심될 정도로.
은우는 어쩌면, 생각보다 배려 넘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
동물병원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
세상 사람들은 참 가지가지 다르다. 어떤 보호자는 개가 심각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귀찮아서 병원에 오지 않는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작은 변화에도 걱정이 되어서, 심심해서, 때로는 잘생긴 옥 선생을 만나러 병원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그중에 한 명, 60대의 아주머니는 유달리 병원에 자주 오곤 했다. 강아지 삐삐가 콜록, 기침 한 번만 해도 병원으로 달려올 정도로 예민하게 굴었다.
“귀찮지도 않으신 걸까?”
의아하게 여기던 설희와 달리 은우는 단 한 번도 귀찮거나 신기해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삐삐를 돌봤다.
“사람마다 반려동물의 존재는 다 다른 거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자식만큼 소중한 거죠.”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보호자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20대의 딸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갑자기 떴다는 것. 그리고 삐삐는 그 딸이 기르던 강아지여서 자식처럼 대한다는 것.
“우리 딸처럼 어린 나이에 죽지 말고 꼭 제 수명을 다 채웠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아주머니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아이고, 창피하네요. 또 눈물이 나려 그러네, 주책맞게.”
설희가 얼른 티슈를 뽑아 그녀에게로 건넸다.
“이거, 쓰세요.”
“고마워요.”
“…….”
“여하튼 삐삐를 우리 집에 처음에 데려왔을 땐 정말 밥을 뭘 줘야 하는지, 뭐가 아픈 건지 몰라서 맨날 병원에 와서 옥 선생님께 물었었지. 시도 때도 없이 전화도 자주 하고, 문자도 하고…… 밤늦게 병원에 나오신 것도 여러 번이에요. 옥 선생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지.”
***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설희는 눈썹을 추어올렸다. 자기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은우는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설희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 그 안의 눈동자는 어쩌면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찬정의 바람을 목격한 날, 그가 옆에 있어 주지 않았으면 아마 더 심하게 아팠겠지.
설희를 보며 은우가 읊조렸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어요, 당신에게는.”
조금 더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설희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만 바라보니 은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런 말 내가 해도 별로 유설희 씨에게는 의미 없겠지만. 당신은 날 싫어하니까.”
아무래도 그는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를 어려워하긴 하지만, 싫지 않은데. 아니, 예전에는 어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저, 선생님.”
“음?”
설희의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저 옥 선생님, 싫지 않아요.”
“…….”
“어려울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설희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을 삼키고는 고개를 돌렸다. 쑥스러움에 붉어진 목덜미가 드러났다.
***
“하마터면 이상한 말을 할 뻔했어. 하아.”
설희의 한숨이 얼마나 긴지 저 멀리 천장까지 닿았다. 평소 같지 않은 다정다감한 옥 선생에게 허튼소리를 할 뻔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아직 동물병원에서 실수투성이였다. 거기다가 연애 생활도 정신없다. 찬정이랑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오전에 있었던 차트 정리를 하던 설희의 손이 은우 생각에 멈췄다.
“거봐. 지금도 집중력을 잃었잖아.”
요즘은 자꾸 그에 대해 생각을 하고 고민하게 된다. 그것만 해도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괜한 이야기를 했다고 후회하는데, 문이 열리고 매니저가 쏙 그 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설희 씨.”
“네?”
“손님 오셨어요.”
손님?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올 사람이 없는데.
설희가 돌마래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절친한 친구인 인경과 부모님뿐이었다. 모두 갑자기 연락 없이 올 사람들이 아니었다.
“누구라고 하던가요?”
설희의 질문에 매니저가 생긋 웃었다.
“설희 씨 남자친구라는데? 지금 바쁘면 기다리겠대, 될 때까지.”
남자친구라니. 찬정이랑은 얼마 전 헤어지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그는 설희가 돌마래 동물병원에 다니는 것을 몰랐다. 동물병원에서 일한다고만 하고, 어디라고는 말한 적 없었는데.
“제 남자친구요? 말도 안 돼. 찾는 게 저 맞나요?”
다른 직원의 남자친구를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매니저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희 씨 맞아. 나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는데.”
“그럼 저 잠시만 자리 좀 비울게요.”
설희는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대기실로 나갔다.
안 좋은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니나 다를까.
“하아.”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설희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장을 입고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깔끔하게 맨 익숙한 얼굴의 남자.
찬정이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남자친구는 뭔 얼어 죽을 남자친구.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찬정은 진찰실에서 나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희를 발견했다.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희 네가 연락이 안 돼서. 걱정되니까 찾아왔지.”
“뭐?”
걱정이 돼서?
어쩜 저렇게 뻔뻔할까.
날 걱정하는 놈이 바람을 피워? 당장 다가가서 저 얄밉게 웃는 얼굴을 쥐어뜯고 싶었지만, 설희는 꾹 올라오는 화기를 참았다.
참아, 참자, 설희야.
괜히 다툼이라도 벌였다간 모두의 입방아에 오르락거릴 수도 있었다.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져서 동물병원에 민폐를 끼칠 수도 없었고. 안 그래도 지금 대기하느라 심심한 보호자들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설희와 찬정을 구경 중이었다.
“너,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설희는 잠시 뒤로 가서 고개를 삐죽 들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깥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매니저에게 물었다.
“매니저님, 저 잠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설희의 말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옥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해 놓을게.”
“감사합니다, 금방 들어올게요.”
그러고는 설희는 찬정을 쏘아보았다.
“우선 나가서 이야기해.”
찬정의 팔을 질질 끌고 병원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그를 데리고 나와, 팔을 놓고 그를 쏘아보았다.
“여긴 왜 왔어? 아니, 여긴 어떻게 왔어?”
“인경이한테 물어봤지.”
인경이 요것이……. 가만 안 놔두겠어. 속으로 혀를 찼다.
설희, 찬정, 그리고 설희의 친구인 인경은 대학교 동창 사이라 서로 아는 사이였다.
하지만 인경에게는 지난번 사건이 있고 나서 전화로 찬정 욕을 퍼부었기에 설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얼마나 비참하게 끝을 맞이했는지도 잘 알았다. 그런 인경이 왜 그에게 말해줬을까.
뒤집히는 설희의 속도 모르고, 찬정이 손을 뻗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인경이한테 화내지 마. 내가 졸랐거든. 나 반성했어. 인경이한테도 이런 내 마음을 다 전했어.”
“…….”
“설희야, 그러니까 이제 화 풀어. 우리 다시 시작하자.”
찬정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설희는 눈을 깜빡깜빡 뜨며 그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팀장이 날 좋아한다더라. 그래서 승진 위해서 내가 조금……. 그 마음을 이용한 건 맞아. 하지만 상대가 이도영 팀장이야! 내가 설마 그 여자랑 진심으로 그렇게 만났겠냐고. 승진하고 팀 옮기면 그만둘 생각이었어.”
“하.”
“난 너뿐이야, 설희야.”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더 황당했다. 차라리 팀장과 그냥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게 나을 뻔했다.
화를 낼 어이 조차 가출했다. 입술을 벙긋거리며 말도 못 하는 그녀의 마음을 곡해했는지, 찬정이 변명을 주절주절 시작했다.
“그땐…… 내가 그냥 일시적으로 마음이 잠깐 흔들린 거야. 내가 미친X이었어.”
“…….”
“네가 화내는 것도 이해해. 그리고 그날 다른 남자랑 있었던 것도 다 나도 이해할게. 과거를 잊고 우리 다시 시작하자.”
설희는 목소리를 다듬었다.
“난 다시 사귈 생각 없어.”
화가 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는 내가 일하는 직장이야. 아무나 막 찾아오는 곳 아니야. 이제 다시 여긴 안 와줬음 좋겠어.”
“너 왜 그래, 아직도 그렇게 화 난 거야?”
사귀면서 조금은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설희는 늘 참았다.
오래 사귀었기에 둘 사이의 우정과 믿음도 깊었으니까.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렇게 최악의 인간인 줄은 몰랐다.
“내가 너한테 왜 화를 내. 이미 끝난 사이에 화를 내 봤자 뭘 하겠다고.”
“정말 헤어지겠다는 거야? 뭐 이런 일로 헤어져.”
그 말에 다시 어이가 없어졌다. 설희가 화가 차올라 입술을 벙긋거리는데, 찬정도 계속된 거절에 화가 났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유설희. 너 잘 생각해. 막말로 너 지금 나이에 나보다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내 나이가 어때서?”
“솔직히 나니까 오래 사귀었지, 너 조건도 별로잖아. 키도 작고. 조건만 보면 내가 훨씬 낫잖아.”
찬정의 모욕적인 말에 설희는 황당해 입을 반쯤 벌렸다.
“지금 뭐라고……. 야, 이찬정. 네가 걱정할 일 아니거든. 그리고 대한민국에는 너보다 잘난 남자가 쌔고 쌨어.”
설사 평생 혼자 산다고 해도 너랑 같이 이렇게 입씨름하는 것보단 낫겠다. 그렇게 외치려 하는데 찬정이 미간을 좁혔다.
“너 혹시, 지난번에 레스토랑에서 같이 있던 남자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 남자랑 너랑은 안 어울려.”
“뭐?”
“그 남자, 얼굴이 너무 반반하던데. 그런 남자가 널 진심으로 만나는 것 같아? 잠깐 데리고 노는 거지. 너도 그랬잖아. 그때 사귀는 거 아니라고. 너한테는 나 정도가 딱 좋아. 아니, 사실 내가 아까운 면이 있지.”
설희는 잘 화를 내지 않는 타입이었다. 화내는 일이 익숙하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그의 언사는 그런 설희조차 이성을 잃게 했다.
“네가 뭔데 그 남자가 날 데리고 논다 만다야? 너야말로 바람피웠으면서.”
“그거야 널 걱정해서 그렇지.”
걱정이라는 말에 결국 설희는 터지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 그 남자랑 이미 사귀는 사이니까.”
“뭐?”
“그 남자가 나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우리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사귀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설희는 당당하게 싱긋 웃었다.
물론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면서.
일 쳤다.
사고를……. 쳐버렸다.
옥 선생이랑 나랑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사귀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