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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부드럽고 말캉한 것. (5/80)


5화. 부드럽고 말캉한 것.
2022.11.15.



“뭐지?”

놀라 눈을 뜨고 입을 벌리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부드럽고 말캉한 것이 흘러들어왔다. 혀끝에 닿는 달콤한 맛.


“초콜렛.”

입안에 들어온 것 때문에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는다.

살살 녹아드는 것은 초코파이였다.

은우가 목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반듯한 입술이 보기 좋은 호를 그렸다.


“먹어요.”

설희가 놀라 입에 초코파이만 머금은 채, 눈만 깜빡거리자, 옥 선생이 한 번 더 재촉했다.


“얼른 먹어요.”

“지금요?”

“당 떨어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긴 손가락이 톡, 다시 한번 초코파이의 끝을 쳤다. 그 파동에 초코파이가 조금 더 입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설희가 조심스레 초코파이를 받아들고, 한입 물었다. 단맛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흐릿해졌던 눈앞도 서서히 선명해졌다.

웬일이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고. 평소의 그라면 벌써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몸 관리도 중요하다고 한참 뭐라 했을 텐데.

이게 지난주 토요일 저녁식사의 효과일까?

연애를 하자고 했던 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앞에서 울어서 불쌍해진 건지.

그를 올려다보자, 예상외로 은우가 그녀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눈빛이 전.혀. 다정하지 않다.


“유설희 씨.”

“네?”

“왜 아침밥을 안 먹고 다닙니까? 일하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환견을 안고 있다가 어지러워서 바닥으로 엎어지면, 강아지가 다치지 않겠습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한숨을 쉬었다.

답을 원하지 않는 질문들. 물음표로 사람 때려죽일 사람이다. 날카로운 그의 지적에 희미하게 설희는 피식 헛웃음을 웃었다.

옥 선생은 옥 선생이야. 친절해지긴 뭐가 친절해져. 아마 오늘도 백 퍼센트 실수하면 구호를 하라고 하겠지. 지금도 내가 어지러운 것보다는 강아지 걱정이잖아.

지난주의 효과는 무슨 지난주의 효과.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혹시 수술 중에 뒤에서 보조하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죄송합니다. 신경 쓰겠습니다.”

순순히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비틀리는 설희를 보고 은우가 입을 열었다.


“설희 씨.”

약간 누그러진 그의 음성에 눈을 들자, 뒤에서 벌컥 입원실 문이 열렸다. 병원 전체의 경영을 총괄하는 매니저였다.


“어머, 설희 씨랑 옥 선생님 여기서 뭐 해요?”

어느새 초코파이 가지고 실랑이하는 사이에 은우와 설희의 거리는 바싹 붙어 있었다.

매니저의 까만 눈이 둘을 향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초코파이 먹고 있었다고 말해야 하나.

입원실에서 음식물을 먹은 게 왠지 켕겨, 설희는 입안에 아직도 가득 남아 있는 초코파이를 꿀꺽 삼키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입원견들 아침밥 주려고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찔렸다.


“그게 다예요?”

“네.”

입원실에 떠도는 미묘한 분위기.

매니저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곧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어요?”

“네.”

“오늘 오랜만에 원장 선생님 오셨어요. 조회한다고 하니 나오세요.”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먼저 입원실을 나가자, 설희가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옥 선생…….


“근데 내가 배고픈 건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티 나나.

입속으로 읊조린 말을 어떻게 귀신같이 들었는지 은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요?”

“어? 네.”

그러자 은우가 손을 들어 다가왔다.

다시 한번 훅 다가온 거리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으나, 그가 더 빨랐다. 은우의 단단한 손끝이 입술에 닿았다.


“앗.”

말캉한 입술의 끝에 초콜릿이 묻어 있었다.

입술 가를 그의 손가락이 쓱 닦아주었다. 순간 피해야 하는데 너무 의외의 행동에 놀라 숨만 들이켰다.

예민한 부분을 손가락이 쓸었다.

붉은 입술이 화끈, 달아올랐다.


“유설희 씨는 배고프면 입술을 파르르 떨거든.”

“…….”

“언제나 그래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당 떨어지기 전에 부르세요. 그러다가 쓰러지지 말고.”

너무 가깝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그런 설희의 마음과는 다르게 은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밖으로 향했다. 또각또각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을 찌푸렸다.

이건 친절한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는 서둘러 입원실을 나갔다.

입안이 온통 달았다.


 

***

수의사 3명, 스태프 4명의 중간급 크기의 돌마래 동물병원.

오늘은 모든 직원이 출근하는 날이라 다 같이 환자 대기실에 모여 있었다. 그 안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키가 작고 인상이 좋아 보이는 수의사, 박희철이었다.


“자자, 좋은 아침입니다.”

동글동글 드러난 머리에 반짝, 빛이 맺힌다.

희철은 돌마래 동물병원의 원장이자 설희의 외삼촌이었다. 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던 설희가 동물병원에 취직하게 된 것도 삼촌의 영향이 컸다.

팀장의 괴롭힘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설희는 한동안 집에 처박혀 있었다. 구직활동을 금방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도저히 그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쳐져 있던 설희를 일으켜 세운 건 엄마였다.
 


“너 내일부터, 외삼촌네 동물병원에 출근하면 돼.”


“동물병원?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동물을 제대로 만져 본 적 없는데 내가 동물간호사라니 말이 되는 소리야?”


“세 달만 다녀봐. 그사이에 다른 데 면접을 보든지. 동물병원 그래도 싫다고 하면 엄마가 평생 간섭 안 할게.”

 
아무리 항변해도 엄마의 말을 꺾을 순 없었다.

설희네 집에서는 박명자 여사의 말이 곧 신의 말씀이고 법이었으니까.

그렇게 취업한 지 이제 세 달.

생각해보면 엄마가 맞았다. 낙하산이고 경험이 없어 고생하기도 했지만,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것은 나름 재밌었다.

물론 다 좋은 것은 아니고 곤란한 일도 있었지만.

설희의 시선이 은우에게 닿았다. 그때, 원장을 바라보던 은우의 얼굴이 돌아가 설희를 향했다. 눈이 딱 맞았다.

그를 훔쳐보던 것이 걸린 것은 아니겠지.

설희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매니저, 오늘 스케줄 좀 말해주세요.”

“오늘 10시에 디스크 협착 수술이 있으니, 옥 선생이 집도, 서브를 부원장, 보조로 채린 씨와 설희 씨가 들어가게 됩니다. 오후에 양성종양 제거 수술이 하나 있습니다.”

그랬다. 이럴 때가 아니야.

아침에 설희는 큰 수술 보조에 들어가기로 했다.

물론, 뒤에서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정도의 사소한 일이었지만, 수술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그런 사소한 것도 중요했다.

이렇게 큰 수술을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을 위해 지난주 내내 공부했으니 괜찮을 거야. 설희는 몸을 쭉 세우며 다짐했다.

***



“끝났다.”

길고 긴 수술이 끝났다.

마지막 정리를 하며 설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잡았다.

죽을 것 같아.

3시간이 예정되었던 수술은 4시간을 훌쩍 넘겨, 2시를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수술을 하는 수의사들도 힘들겠지만, 큰 수술 보조는 처음이었던 설희는 뒤에 서서 계속 엄청난 긴장상태로 있었다 보니 수술이 끝난 직후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은우가 준 초코파이가 아니었다면 정말 당이 떨어져 그대로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지금도 정리하는 손이 후들거렸다.


“설희 씨.”

“네?”

나이는 비슷하지만 훨씬 경력이 긴 직원, 채린이 설희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오늘 혹시 도시락 싸 왔어요?”

“아뇨. 도시락집에서 사 먹으려고요.”

“그럼 정리는 제가 마저 할 테니 도시락 사 오세요.”

“아, 그럴 수는 없죠.”

“괜찮아요. 어차피 부원장님 것도 필요하고, 얼른 다녀오세요. 지금 그대로라면 쓰러질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웃는 채린이 설희를 수술실에서 밀어냈다.

결국 늦은 점심을 위한 다른 직원들의 주문을 받아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배 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배가 고팠다.

그렇게 힘없이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옆에 섰다.

향긋한 민트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놀라 올려다보니 날카로운 눈과 마주쳤다.

은우였다.


“옥 선생님. 어, 어디 가세요?”

왜 이렇게 바싹 붙어 있는지.

너무 가까워서 순간, 설희의 숨이 막혔다.


“도시락집에 갑니다.”

“아, 그럼 제가 대신 사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같이 가죠.”

아니, 제가 괜찮지 않은데요.

지난 주말에 있던 일 이후로 둘이 있는 시간이 어색하기도 했고,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그의 잔소리에 버틸 힘이 없었다.

거기다가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뛸 정도로.

두근, 두근.

도저히 못 살겠어.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 대충 입을 열었다.


“저,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뭘요?”

“남자친구, 아니…… 전 남자친구가 저 당겼을 때 구해주신 거요.”

“별거 아닌데.”

그러다가 문득, 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 남자친구?”

“아, 네 헤어졌어요.”

지난주 토요일날 찬정과 팀장과 마주치고 집에 간 뒤, 찬정에게서는 끝없이 문자가 왔다.


[ 설희야, 오해야. ]

[ 일 관련해서 간 거야. ]

[ 그냥, 친목 다지러 갔었어. ]

언제는 일 관련해서 갔다더니만, 또 그다음 문자에는 친목을 다지러 간 거라니. 계속 보낸 문자조차 앞뒤가 안 맞잖아.


“거짓말도 머리가 좋아야 한다니까.”

설희는 중얼거리면서 미간을 좁혔다.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 그녀는 쏟아진 찬정의 문자에 일절 답변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그 후에는 전화 공격이 이어졌다. 어찌나 전화를 많이 했는지, 탈의실에 핸드폰을 놓고 업무를 다 보고 오면 방전이 될 정도였다.

결국, 설희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연이라도 다시 만나지 말자.]

헤어짐에 대한 상처보다, 그가 팀장이랑 바람을 피웠다는 배신감이 커서 찬정을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TMI인데, 그날 집에 돌아가고 나서 바로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러자 은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잘됐네요.”

“뭐가요?”

“유설희 씨는 그런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 미소가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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