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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입술에 닿다 (4/80)


4화. 입술에 닿다
2022.11.12.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은우의 모습에 설희는 눈을 깜빡였다.

옥은우. 직장에서 보는 그는 냉철한 상사였다.

보호자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상냥하지만, 설희의 앞에서는 냉정하면서 차가운 이성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이를 악문 채, 낮은 목소리로 은우가 으르렁댔다.


“꺼져.”

찬정은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꺼지라고!”

은우가 크게 소리치자, 찬정이 일어서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눈을 부라리자 엄청난 위압감에 찬정은 몸을 돌려 서둘러 뛰어갔다. 뭐라고 제대로 들리지 않는 말을 웅얼거리기도 했지만, 그는 은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은우는 몸을 돌려 아직도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몸을 떨고 있는 설희를 바라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설희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그녀의 눈을 보았다.


“괜찮습니까?”

“네? 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의 시선이 설희의 손으로 떨어졌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괜찮지가 않았던 것일까.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 봄날의 날씨인데도.

멍하니 설희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바라보고 있자, 은우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싸늘하게 식어 있던 손끝에 그의 손이 닿아 열기가 감돈다. 점점 떨림이 심해져 몸 안에 진동이 울렸다.

천천히,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오늘 은우가 평소 같지 않았던 것처럼, 설희 역시 평소 같지 않았다.

그녀는 옥은우가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어려웠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깔끔한 남자.

그런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설희에게도 기대하니 그의 앞에서는 자연스레 긴장이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도저히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가 잡은 손을 자신도 모르게 꽉 잡았다.


“흐윽.”

“……울어도 됩니다.”

딱딱하고 서툴지만, 온기가 담긴 은우의 목소리에 설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쑥스러운 것도 모른 채 그의 손을 마치 동아줄처럼 잡은 채, 울고 또 울었다.

***



“도착했습니다.”

옥 선생 앞에서 울었다.

아까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은우가 설희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동안, 그녀는 운전석 쪽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창밖만 쳐다봤다.

남자친구인 찬정이 바람을 피운,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말았지만 어쩐지 설희는 그의 손을 잡고 엉엉 운 게 더 신경이 쓰였다.

괜스레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미쳤나 봐, 정말. 그의 손을 꽉 쥐고는.

그저 직장 동료일 뿐인데.

도착했다는 말에도 설희가 반응이 없자, 은우가 물었다.


“유설희 씨?”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집에까지 데려다주셔서.”

“정말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덕분에.”

뺨에서부터 목까지 홍조가 흘러 내려왔다. 붉어진 목덜미에 은우의 시선이 닿았다.


“그래요, 그럼.”

은우는 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아까 무슨 상황이었는지 대충 알 법한데도 무슨 일인지 캐묻지도 않고 그저 설희를 토닥여줬다.


“오늘은 들어가서 푹 쉬어요.”

“네, 그럴게요.”

설희가 문을 열고 내리려던 순간. 은우가 설희를 붙잡았다. 손목에 그의 손이 얽히고,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차게 식었던 몸에 온기가 흘러들어왔다.


“아, 그런데.”

“네?”

“내가 했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그건 재고해봐요.”

그가 했던 말.

“아무래도, 우리 연애하자.”는 제안.

그가 싱긋 웃었다. 입꼬리가 아찔하게 올라간다. 오늘 두 번째 미소였다.

망측하게도, 오늘 있던 일 따위는 다 잊고 그의 환한 미소에 설희의 심장이 툭 떨어졌다.


 

***

집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유설희!”

“다녀왔습니다…….”

“너 왜 연락도 없이 저녁 시간을 지나서 와?”

엄마가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엄마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지금 그녀를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얼른 방에 가서 눕고 싶다.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오늘 일이 너무 많았다.

1. 남자친구인 찬정이 바람을 피웠다.

2. 그런데 그 상대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는 이도영 팀장이었다.

3. 그리고 옥은우 선생이 나에게 연애하자 했다.
 


“무슨 생각인 걸까, 옥 선생은. 아무리 할머니가 아프시다고 해도. 그 정도로 절박한 걸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설희의 팔을 엄마가 잽싸게 낚아챘다.


“야, 설희야. 너 왜 대답이 없어. 너 기다리다가 너무 배고파서 우리 먼저 먹었어. 밥 먹고 왔어?”

고개만 끄덕였다.


“먹고 오면 먹고 온다 이야기를 해야지, 뭐 먹었는데?”

“스테이크…….”

잘 구워진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

안에는 핑크빛 핏물이 살짝 감돌고 위에는 망고와 15년 된 비네거로 맛을 낸 소스가 얹어져 있다. 평소였으면 엄청 맛있게 먹었겠지.

그러나 앞에 앉아 있던 남자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유설희 씨, 나랑 연애합시다.”

 
그렇게 읊조리던 붉은 입술, 살짝 비틀린 눈썹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까의 일을 회상하던 다시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해진 설희를 엄마가 흔들었다.


“아니 얘 왜 이렇게 넋이 빠졌어.”

“아냐, 아무것도. 나 피곤해. 가서 씻고 잘래.”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근데 저녁을 스테이크 먹었다고? 찬정이랑 먹은 거야?”

“아니.”

“그럼, 누구랑 먹었어. 다른 남자랑? 다른 남자랑 연애하니?”

엄마가 한 소리에 설희가 펄쩍 뛰었다.


“연, 연애라니. 엄마는 무슨 그런 말을 해.”

“아니, 그냥 좋은 음식 먹고 말도 없이 늦게 와서 그렇지 왜 그렇게 성질을 내니?”

찔리는 데가 있어서 그런가,

너무 과잉 반응을 해버렸다. 엄마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설희는 방으로 뛰어 들어와 문을 닫고, 숨을 몰아쉬었다.

혼자 있고 싶은 밤이었다.

***



“아, 옥 선생. 왜 꿈에까지 나오고 난리야.”

월요일 새벽 6시. 온 집을 울리는 핸드폰 알람에 설희는 겨우 일어났다.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았지만, 일어나야 했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마음이 심란해 눈은 감고 있어도 잠을 자지 못했다.

낮에는 찬정에게서 전화와 문자가 끊임없이 왔다. 밤에는 은우가 드래곤의 몸을 하고 불을 뿜으며 쫓아오는 꿈속에서 내내 도망 다녔다.

깨어 있는 시간은 찬정 때문에, 자는 시간은 꿈속에 찾아오는 은우 때문에 주말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자도 잔 게 아니야. 하루만 더 쉬고 싶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생각했지만, 결국 따뜻하고 보드라운 이불 속에서 나가야 했다.

늦으면 옥 선생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실연을 당해도, 아파도, 혹시 전쟁이 터져도 회사에는 나가야 하는 게 바로 대한민국의 직장인들 아니던가. 흔들리는 몸을 겨우 제대로 세워 화장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퇴직 후, 실직에 앓아누워 세 달간 누워만 있던 설희에게 갑자기 시작된 동물병원 생활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상당히 힘들었다.

이제 3개월 차.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으며 옥 선생이 만든 규칙을 외웠다. 다른 테크니션들이 정리해놓은 노트도 꼼꼼히 읽었다.

아침마다 읽어야 잊어버리지 않지.

잘못했다간 또 병원이 떠나가도록 구호를 외쳐야 할 게 틀림없었다.

아니, 지난주 보았던 그의 모습은 지독히도 다정했다. 너무 상냥해서 자신이 알던 사람 같지 않았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하아…….”

머리를 누르면서 방 밖으로 나오니, 아직 가족들은 다 자고 있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고 새벽 7시부터 이러고 있지.”

꿍얼거리며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

병원에 도착한 시간, 7시 50분. 보통 직원들이 출근하는 시간은 8시 반이었다.

지각도 아니고, 오늘은 1등이겠구먼. 내가 처음이겠지?

설희가 흐뭇한 미소를 띠고는 병원 입구로 다가가는데, 안에 사람 형태가 보였다.

너른 어깨, 곧은 등.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에 하얀 가운.

반듯한 입술이 붉게 빛났다.


“엄마야.”

옥 선생이다. 그의 존재를 깨닫자마자 가슴이 덜컹거렸다.

저 사람은 도대체 몇 시에 병원에 오는 거지?

흘낏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난 일이 어색한 것은 나만인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전날 제대로 자지 못해 띵띵 부은 설희와는 달리, 밉살스러울 만큼 완벽한 얼굴. 꽤 가까이 서 있는 데도 모공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피부 위에 살짝 보조개가 파여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설희 씨.”

그가 고개를 살짝 입술을 끌어올리고 픽 웃었다.

분명 똑같은 옥 선생인데. 오늘따라 그가 뭔가 다르게 보인다. 평소라면 잘생겼다, 하고 끝날 얼굴이 뭔가 좀 더 환하고 밝게 보인다. 그의 눈빛이 스칠 때마다 뭔가 가슴 한쪽이 불편하다.
 


“연애하죠, 우리.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그건 재고해봐요.”

 
또 그날 밤에 귓가를 울렸던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서일까.

그만, 그만. 옥 선생 생각은 그만하자.

이러다간 일이 제대로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설희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는 몸을 꾸벅 숙였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옥 선생님, 저 그럼 옷 갈아입고 입원견들 밥 주러 갈게요.”

종종걸음으로 탈의실로 들어가버렸다. 문을 닫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지금 내가 옥 선생님 생각할 때가 아닌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거울의 비친 설희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

옷을 갈아입고는 입원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달칵 열고 들어가자마자, 병원에서 키우는 개인 똘이가 다다다다 뛰쳐나오며 그녀를 반겼다.


“똘이야, 잘 잤어?”

골든래트리버인 똘이는 그녀를 보고 격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성격이 좋은 똘이는 병원에서 일한 첫날부터 그녀를 잘 따랐다.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갈색 털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스르르 빠져나갔다.

일을 하면 할수록, 동물이 좋아졌다.

똘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원견들에게 밥을 주러 몸을 일으켰다. 몸을 반쯤 일으키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앗.”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서둘러 팔을 벽에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당 떨어졌나. 배고파… 밥 먹고 나올걸.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배 속에서 천둥 번개가 치고 어지러워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였다간 바닥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흔들거리는 발걸음으로 밖을 향하던 설희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설희 씨.”

“네?”

휙, 뒤를 돌아보자, 옥 선생이 입원실 입구에 서 있었다. 삐딱하게 서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설희를 바라보았다.


“어디 아파요?”

“괜찮아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희의 대답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옥 선생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그가 얼굴을 훅 자신에게로 들이댔다. 너, 너무 가까워. 얼굴이 한 뼘도 안 되는 거리 안에 있었다. 설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식사, 안 했어요?”

“네. 못 했습니다.”

먹었다고 말을 하려다가 설희는 곧 포기하고 솔직하게 답했다. 귀신같은 옥 선생. 촉이 좋은 그는 거짓말 잡아내는 것도 고수였다.


“하.”

설희의 말에 은우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어찌나 긴지 바로 앞에 있는 설희의 뺨을 간지럽힐 정도였다.

그가 한숨을 쉴 때에는 늘 일장 연설이 나온다. 쏟아질 그의 잔소리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입술에 무언가가 와닿았다.

보드라운 무언가.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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