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갑자기 분위기 연애 (2/80)


2화. 갑자기 분위기 연애
2022.11.05.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설희가 말을 잃자 은우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게 곤란한 얼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내가 싫습니까?”

뜨끔.

설희는 말을 잃었다.

싫다기보다는 어렵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일할 때에는 은우는 한없이 무섭고도 까다로운 남자였다. 그의 앞에서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 긴장을 너무 해서 퇴근하고 나서는 어깨가 결릴 정도로.

결코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설희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의 긍정에 은우가 짧게 숨을 뱉고 말을 이었다.


“걱정 말아요. 사귀어달라고 조르거나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

“그런 걱정은 안 했어요.”

사귀자는 고백조차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남자가 그럴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저의가 궁금해질 뿐.

누군가를 막 열정적으로 좋아할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거기다가 상대가 나라고?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전에 말한 대로,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오해가 생겼거든요.”

“오해요?”

“할머니께서 막내 손자라 절 많이 아끼시는데 슬슬 결혼할 때가 됐지 않냐며 걱정이 많으셨어요. 그런 할머니가 아프십니다.”

병환 중인 할머니께서 은우의 집에 놀러 오셨고, 그의 책상에서 동물병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았다고 했다.


“우연이었지만, 책 사이에 설희 씨 독사진이 있었어요.”

그 사진들은 병원 홍보 책자를 만들며 찍었던 사진들이었다. 기념으로 모든 직원들에게 당시 사진들을 나눠줬는데, 그중 한 장이 그의 책에 끼어들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면 그 사진을 보고 여친이냐고 할머니께서는 착각을 했고, 그리고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활기를 찾고 기뻐하시길래 그냥 분위기를 맞춰 드렸습니다.”

은우는 사과했지만, 할머니가 아프시다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늘 차갑게 보이던 은우의 뒷모습에 이런 면이 숨어 있었다니 놀랍기까지 했다.

곤란한 듯, 은우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이번에는 설희 씨를 보고 싶어 하시네요.”

“저를요?”

그래서 그는 설희에게 그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까지 먹인 거다. 이제야 이해가 될 만했다.

화가 나기보단, 오히려 사정을 알게 되니 설희의 긴장이 탁 풀렸다.


“그런 거구나…….”

옥 선생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할머니가 자신을 여자친구라고 오해해서 보고 싶어 하셨던 거다.

안도감과 무언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네, 그래서 그런데 한 번 가줄 수 있겠습니까?”

“오해였다고 말하면 어떠세요?”

“오해였다고 하면 아프신 할머니가 더 충격을 받으실 것 같습니다만.”

흐려지는 설희의 말을 은우가 딱 잘랐다.

하긴, 그랬다. 건강이 안 좋으시고 기대했던 손자의 결혼이 사실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면 충격을 받으실 수도 있겠지.

상황이 얼마나 나쁘신지 모르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할머니가 아프시다니 딱 잘라 거절하기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설희는 그의 제안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남자친구가 있어요.”

그녀의 말에 은우의 눈꼬리가 바싹 위로 올라갔다.


“정말입니까?”

“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그거야, 옥 선생님이랑 저랑 그런 이야기할 사이는 아니었으니까요.

설희도 지금까지 은우의 사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둘이서 시간을 보낸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어요. 남자친구.”

요즘 제대로 본 지 한참 되기는 했지만 설희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그녀의 남자친구 찬정과는 캠퍼스에서부터 시작된 인연으로, 같은 직장까지 이어진 사내연애였다.

그때는 매일같이 만나서 밥도 먹고, 데이트도 즐겼는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설희는 동물병원에 들어오기 전, 소속되어 있던 팀장의 악의적인 괴롭힘으로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를 했다. 이제는 직장도 멀어지고 그의 회사가 바빠지면서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힐끗.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에도 문자를 했는데 남자친구인 찬정에게서는 답변이 없다.

그래서 가끔 자신조차 남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자주 못 보기는 하지만요.”

“그렇군요.”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근사한 목근육이 비쭉 섰다. 어쨌든 고백을 거절하게 되었으니, 설희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습니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람에게 연애를 제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레스토랑 직원이 디저트를 서빙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음식이 나왔다. 은우가 서빙되어 나온 음식을 가리켰다.


“용건은 그게 답니다. 설희 씨 사정은 알았으니 우선 먹어요.”

그래, 먹자. 음식은 죄가 없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을 지금 내버려두는 것은 유죄였다.

손을 움직이는 설희와 달리 은우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막 구운 듯한 쇼콜라퐁당을 자르자, 스르륵 갈색 소스가 흘러내린다. 달콤한 향기에 설희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지고 입꼬리에 웃음이 걸렸다.


“맛있다.”

순간 튀어나온 말에 은우의 눈에 반짝, 빛이 맺혔다.

순간 그의 눈길을 눈치채, 설희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이 상황에서도 음식 맛에 감탄하다니 우습게 보일까.

그러나 은우는 핀잔을 주지 않고, 오히려 제 디저트를 잘라 설희의 그릇 위로 옮겨주었다.


“많이 먹어요.”

“괜찮아요! 아니, 괜찮은데.”

“설희 씨 평소 먹는 양에 그 정도로 부족한 거 압니다.”

그의 지적에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설희는 작고 조그마한 체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먹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점심시간에도 혼자 먹기에는 다분히 큰 도시락을 싸 와 오물오물 먹는 모습을 보고 은우가 “입에 한가득 넣고 씹는 게 햄스터 같네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특수 상황에 음식 욕심을 부릴 정도로 식탐을 부리지는 않는데.


“정말 괜찮아요.”

설희의 말에 은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웃었다.


“난 아무래도 긴장해서 소화가 안 될 것 같아서.”

오늘은 너무 놀라운 일이 많았다.

옥 선생이 긴장이라니.

30대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은우는 수의사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소 복잡한 수술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늘 침착하다.

외과의로서는 이 지역에서 그를 최고로 쳐주는 사람이 많았다. 응급상황에서도 손끝 하나 떨리지 않았다.

그런 옥 선생이 긴장이라니 아무래도 세상이 망할 것 같은데?

눈이 동그래진 설희를 보고 은우가 톡톡, 플레이트를 쳤다.


“그러니까 설희 씨라도 많이 먹어요.”

결국 설희는 그가 준 음식까지 남김없이 싹 먹었다.


 

***

그의 갑작스러운 이야기 이후, 둘 사이에는 극도로 대화가 줄어들었다.


“여기 정말 맛있네요.”

“다행이네요. 마음에 들어 해서.”

설희의 말에 은우가 간단히 대답하는 정도였다. 설희가 남자친구가 있다고, 그의 제안을 거절한 이후로 은우의 표정은 시종일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레스토랑을 나오면서 설희는 고개를 숙였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별말씀을. 내가 먹자고 했으니까.”

더없이 어색한 자리였지만,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매스컴에서 다룰 정도로 유명한 이유가 있었다.


“저, 옥 선생님. 도와드릴 수 없어서 죄송하지만, 잘 해결되셨으면 좋겠네요.”

“그 일 말인데.”

은우가 입을 열어 말을 이으려 한 순간, 레스토랑을 향하는 길목에 여자 손님 하나가 걸어들어왔다.

또각또각.

높은 하이힐, 온몸을 휘감은 까만 정장. 붉은 립스틱에 흠잡을 곳 없는 화장. 날카로운 눈매까지.

머리를 틀어 올린 모습이 눈에 익었다.


“헉.”

자신도 모르게 설희는 비명이 새어 나오는 입술을 막았다.

저 여자는…….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다. 설희는 동물병원에 오기 전 일하던 회사에서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아니, 걸어 나오게끔 회사가 유도했다.

모든 시작은, 그녀를 지도하던 팀장의 악의적인 괴롭힘이었다.
 


“유설희 씨, 이 보고서 졸면서 썼어요? 내용이 이게 뭐야. 엉망진창이네. ”


“설희 씨, 회사 장난으로 다녀? 왜 디자인을 이렇게밖에 못 뽑아?”


“하, 한심하네. 설희 씨 부모님은 설희 씨 이러고 다니는 거 아셔?”

 
팀장의 날카로운 목소리만 떠올려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그녀는 설희를 악의적으로 괴롭혔다.

그녀는 멀쩡히 잘해 온 보고서를 설희의 앞에 집어 던지기도 하고, 회의 시간 중에 의견을 말하면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기도 했다.
 


“팀장이 설희 씨에게 돈이라도 뜯겼어? 왜 저런대?”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달달 설희를 볶아대는 탓에 팀장이 왜 저러는지 회사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팀장을 이상하게 보던 팀원들도, 30대 초반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팀장이 된 능력 있는 그녀가 설희를 탐탁지 않아 하니 뭔가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수군거렸고.

결국은 스트레스와 주변의 시선 때문에 설희는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자신을 괴롭혔던 바로 그, 이도영 팀장이 지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 여자가 왜 여기에?”

반쯤 벌어진 설희의 입을 보고 은우가 고개를 숙여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저도 모르게 발끝이 휘청거렸다. 퇴사 후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몇 달 동안 당했던 괴롭힘이 순식간에 떠올라 설희를 잠식했다.


“표정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은우가 바싹 다가와 휘청거리는 설희의 팔을 잡았다. 단단한 손가락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연약하게 흔들리는 그녀를 움켜쥐었다.


“유설희 씨.”

“괜찮아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겨우 전 직장 상사였다. 어차피 퇴사했고, 같은 업계에서 일할 생각도 없다.

회사 밖에서 마주친다고 무슨 대수람?

하지만 극렬한 스트레스에서 오는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을 봐서.”

“아는 사람?”

“아는 사람이라기보단, 전 직장 상사요.”

“난 신경 쓰지 말고 인사해요.”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인사할 필요도 없어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던 때.

까만 차가 하나 레스토랑 앞에 서고, 차에서 남자가 내렸다.

그 남자는 도영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댔다.

남자친구인가.

어둠에 그의 얼굴이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저런 마녀 같은 여자도 남자친구가 있구나.

불쾌한 기분에 잠시 잠식되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알 게 뭐야. 남자친구가 있든지 없든지.


“가요, 선생님.”

은우를 보고 몸을 돌리는 그때,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평범하디 평범한 남자.

그러나 설희가 익숙히 잘 아는 얼굴.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사귀어왔던 설희의 남자친구.

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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