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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3] 태몽 (84/84)


[외전3] 태몽
2023.07.21.


침대에 도착했을 때야 나영은 두 사람이 온종일 밖에 있다 들어와서 씻지도 않은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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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우선 씻어야 하지 않아요?”

태혁은 그녀의 몸을 침대 위로 눕히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밤하늘의 은빛 달을 한입에 삼켜버린 듯이 번뜩였다.

나영이 손을 뻗어서 그의 얼굴을 만지자 그가 길이 잘 든 야생동물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자기 뺨을 비볐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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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절 사랑해요?”

나영은 그의 입에서 그 말을 꼭 듣고 싶어서 일부러 물었다.

태혁이 얼굴에 닿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서 손바닥에 입술을 꾹 누르며 욕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녀를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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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증명해줄게.”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에 불을 지피며 온 우주를 덮었다.

하루 24시간을 병원의 스케줄과 환자의 상태에 따라서 움직이며 살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저 사랑이 전부였다.

쏴아아아아아.

그가 밀려올 때마다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제주에서 보낸 첫날밤은 이 파도 소리와 함께 아주 오래 기억하게 될 듯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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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밤톨처럼 생긴 어린 남자아이가 큰 목소리로 아빠를 부르며 달려와 다리에 매달리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최태혁 교수의 아내가 누구인지 뻔히 아는데, 문나영이 아이를 낳은 적이 없었으니까.

태혁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다리에 매달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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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네 아빠라고?”

아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3살 겨우 되었을 것처럼 보였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이고, 젖살로 빵빵한 두 뺨은 호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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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 보호자 아시는 분?”

태혁은 당연히 자기 아이도 못 알아볼 바보 아빠가 아니었기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이를 안다고 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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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병동에서 온 거 같은데요.”

태혁은 보호자도 없이 혼자 있는 아이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기에 다리에 매달린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이 퍽 잘 어울려서 사람들은 더더욱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독사가 오랜만에 사람처럼 보였다.

태혁은 아이를 데리고 우선 소아과로 가보기로 했다.

그가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동안 병원에는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 최태혁 교수한테 결혼 전 낳은 자식이 있다는 말로 와전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다들 나영의 앞에서는 말을 쉬쉬했기에 정작 그녀는 가장 늦게 그 소문을 듣게 된 사람이 되었다.

나영은 그 소문을 듣고도 화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쓰였다.

최태혁 교수와 낯선 아이가 부자지간으로 보였을 정도면 그가 아이한테 무척 잘해주었다는 것일 테니까.

태혁이 입으로 꺼낸 적은 없어도 나영은 느끼고 있었다. 그가 아이를 원하고 있다는걸.

그녀는 부모님 밑에서 성장하면서 남동생까지 있었지만, 태혁은 태어난 순간부터 혼자 남겨졌다.

그한테 가족은 분명 더 각별한 의미일 거다.

그래서 나영은 꼭 그한테 완벽한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 시기가 어쩌면 그녀의 예상보다 더 빠를 수도 있을 거 같아서 평소보다 마음이 소란스러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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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에서는 레드카펫에 등장한 배우들의 포토타임이 한창이었다.

새빨간 레드 드레스를 입은 은별이 영화감독 차현과 함께 등장하자 가장 많은 플래시가 터졌다.

이미 영화<소녀>가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기에 오늘 영화제에서 시상하기도 전에 취재 열기는 뜨거웠다.

이번에 처음으로 차현 감독과 영화를 찍은 은별은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만약 이번에 수상하게 되면 최연소 수상이었다.

2년 전에 담배 사건으로 이미지가 추락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랄 만한 반전 인생이었다.

은별이 스포트라이트를 또다시 받게 되면서 영화감독 차현의 능력도 재평가받고 있었다.

인기만 있었던 청춘스타 은별을 진짜 배우로 만들어냈으니까.

나영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차현이 상을 받는 영화제를 시청하던 태혁은 은별이 카메라에 잡히자 갑자기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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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차현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 나한테 말해준다고 해놓고 씹었어.”

나영은 태혁이 흥분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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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예요? 은별이랑 나 모르는 일이 있었어요?”

태혁은 TV 속 은별을 손가락질하며 세상 억울한 톤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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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할 때 나 찾아와서는 네가 나랑 무슨 사이인지 말한 거 끝까지 안 알려 줬다고. 내 덕에 저렇게 영화제도 갔으면서 너무한 거 아냐!”

은별한테 화난 이유가 너무 하찮아서 나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끔 놀라울 정도로 유치했다. 그래서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느껴지는 거 같았다.

태혁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잡아당기며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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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네가 말해줘. 그때 은별한테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한 거야?”

이미 결혼까지 했는데 그때 두 사람이 무슨 사이였는지 이렇게 궁금할 일인가 싶었다.

신기한 건 그때 그녀가 한 말이 맞았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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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알고 싶으세요?”

그녀가 물으니 태혁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태혁은 바로 다가갔다.

꼭 주인의 손짓에 달려오는 개 같다고 생각하며 나영은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나영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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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알려줘요.”

그때 은별한테 말했었다.

최태혁 교수와 그녀는 미래를 함께할 사이라고.

그 당시 두 사람은 그저 교수와 레지던트 사이였고, 그녀는 그한테 냉정히 선을 그으며 거리를 유지했지만, 막연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이 남자와는 헤어지지 않고 계속 만나게 될 거라는.

나영까지 말을 안 해주자 태혁은 불만스러웠지만, 이 일로 부부싸움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나중에 은별한테 꼭 대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지만 나영한테 티를 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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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차현 감독님이 상 탔으니까 우리가 축하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명색이 최태혁의 베스트프랜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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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우리가 수술실에서 사람 살릴 때마다 저놈이 축하 파티해 준 것도 아니잖아.”

일리가 있는 말이라서 나영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태혁은 손으로 나영의 긴 머리를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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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 어제 되게 이상한 꿈 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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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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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내가 호랑이 새끼 아빠가 됐어.”

나영은 몸을 똑바로 세우며 황당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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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엄마는 누구였는데요?”

그녀는 호랑이를 낳을 수 없었으니까 당연히 그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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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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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호랑이를 낳았다고요?”

나영은 태혁이 병실에 쓰고 들어왔던 호랑이 탈만 생각나며 아주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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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태몽 아냐?”

그리 말하며 그가 눈을 빛내자 나영은 절로 몸이 뒤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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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분명 그 호랑이가 나중에 개로 변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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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였다니까.”

태혁은 호랑이라고 주장했고, 나영은 개라고 우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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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니까 아들이겠지?”

그런데 꿈 이야기하며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혁을 보니 병원에서 그가 안고서 직접 보호자를 찾아주었다는 그 아이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태혁이 그저 하룻밤 꿈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레지던트 생활에 더 집중하느라 계속 임신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태혁은 한 번도 그녀에게 서운한 티를 낸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해져서 나영은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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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은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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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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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들이면 어떡할 건데요?”

태혁은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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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잘해주긴 할게.”

최선을 다해 대답하는 그를 보고 나영은 웃고 말았다.

사실 계속 피임을 하고 있었기에 임신 가능성은 작았다.

하지만 피임한다고 해도 임신이 되는 경우가 있었기에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두 번은 분명 지나치게 서로를 탐하느라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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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정말 교수님이 태몽을 꾼 거고, 내가 임신한 거라면…….”

그녀의 말에 그의 눈동자가 기대감에 빛났다. 이토록 무언가를 갈망하는 눈빛을 그녀가 어찌 감히 무시할 수 있겠는가.

나영은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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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낳을게요.”

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그들이 이제 새로운 식구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 어떤 기대감으로 가득 찬 주말 밤이었다.

결국 태혁의 태몽 이야기 때문에 차현 감독이 상 탄 이야기는 이미 잊힌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

승희는 나영의 입에서 ‘임신’이란 말이 나오자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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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임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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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그냥 교수님이 태몽을 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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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임신 테스트를 해봐.”

나영도 집에 갈 때 임신 테스트기를 사 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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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임신했는데 이렇게 아무 증상이 없을 수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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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초기니까 그럴 수도 있지.”

둘 다 임신에는 문외한이라 서로 말해봤자 정답이 안 나왔다.

임신이 확실한 것도 아니었기에 산부인과부터 찾아가는 건 더 오바였다.

나영은 퇴근길에 잊지 않고 임신 테스트기를 사는 걸로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비밀번호를 열고 집으로 들어갔는데 집 안이 어두워서 불부터 켰다.

그런데 거실이 환해지자마자 소파에 푹 파묻혀 있는 태혁을 발견하고 나영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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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도 안 켜고 있어요!”

소파 귀신인 줄 알았다.

태혁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며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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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식이가 키우는 개가 임신했대.”

나영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태혁을 쳐다보았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홍식을 향한 분노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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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내 귀한 태몽을 그딴 식으로 낭비하다니!”

그러니까 태혁이 꾼 태몽은 그녀의 임신이 아니라 홍식의 반려견 임신이라는 말이었다.

오는 길에 임신 테스트기를 산 나영도 같이 허탈해졌다.

태몽만 믿고 임신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 너무 어수룩했다.

둘 다 의사였는데, 이렇게 멍청하게 굴다니.

나영은 가방을 내려놓고 태혁에게 다가가 그의 다리 위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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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몽이 없어도, 임신은 오늘 밤에도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 태혁의 눈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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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 말이 맞네.”

그는 그걸 당장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그녀를 두 팔로 안아 벌떡 일어났다.

나영은 두 손으로 그의 재킷을 벌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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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같이 씻을까요?”

두 사람은 앞으로 부부의 본분에 더욱 충실하기도 했다.

운명처럼 아이가 찾아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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