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결혼식
(81/84)
81화.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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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결혼식
2023.07.10.
아침에 눈을 뜬 태혁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창가로 걸어가 섰다.
“그냥 넘어가지를 않는군.”
결혼식 날까지 아무 일 안 생겨서 안심하고 있었더니 당일 비다.
역시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언제든 심술부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태혁은 핸드폰을 들어 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신부 화장 때문에 지금쯤 미용실에 있을 거다.
그는 그곳에서 나영과 만나기로 했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자 태혁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비 오는데 괜찮아?”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비가 와서 그녀가 속상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저는 이미 미용실이라 비 안 맞았어요.]
“비와서 결혼식 취소한 부부는 없겠지?”
그가 불안을 담고 묻는 말에 전화기 안에서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결혼식이 소풍도 아닌데, 누가 취소해요?]
그 말을 들으니 그도 좀 안심이 되었다.
그래, 비 정도는 양호한 편이다.
“나도 곧 갈게.”
[신랑은 준비 빨리 끝나니까 천천히 와도 돼요.]
빗길이었기에 그녀는 차 타고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래도 빨리 갈 거야.”
[청개구리세요?]
1초라도 빨리 신부의 얼굴을 보고 싶은 거뿐이다.
비록 쏟아지는 비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하는 하객들은 조금씩의 불만을 품고 오겠지만, 그는 오늘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오늘은 그들이 결혼하는 날이었으니까.
태혁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식장에 오지 못할 부모님께 이 순간 말씀드렸다.
“아버지, 어머니. 저 오늘 장가가요.”
그리고 감사해요. 저를 낳아주셔서.
***
신부대기실로 들어오는 장수호를 보고 나영은 싱긋 미소 지었다.
“비 때문에 오기 힘드셨죠?”
이미 오래전에 잡아놓은 결혼식이었기에 날짜를 바꿀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장수호는 오늘도 여전히 반듯했다. 아마 그는 평생을 저런 모습으로 살 거 같았다.
그래서 여전히 아버지는 태혁보다 장수호를 더 좋아했다.
장수호가 태혁의 편을 들어서 신뢰가 깨졌었는데, 그게 태혁이 나영을 구한 사람이라는 걸 밝히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된 뒤 장수호에 대한 신뢰는 더욱 단단해졌다.
셋이 함께 골프를 치러 갔다가 돌아온 뒤 태혁이 일주일 동안이나 장수호 욕을 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얼마나 장수호를 편애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은혜는 은혜고, 취향은 취향이니까.
“나영 씨한테 할 말이 있습니다.”
그냥 축하 인사만 하러 온 게 아니라는 말에 나영은 살짝 고개를 틀었다.
무슨 말이기에 굳이 그녀가 결혼하는 날 하는 건가 싶었다.
“사실 처음 병원에 찾아가기 전에 나영 씨를 한 번 본 적 있습니다.”
“네? 정말요?”
나영한테는 뜻밖의 말이었다. 그녀는 기억이 전혀 없었으니까.
장수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지금껏 못 했던 말을 꺼냈다.
오늘이 지나면 평생 못 할 말이었으니까.
“나영 씨 대학교 졸업식이었습니다. 그때 전무님을 모시러 제가 직접 학교까지 갔었습니다. 그날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해의 마지막 눈이었다.
꽃비처럼 내리는 눈 속에 그녀는 학사모를 쓰고 서 있었다.
얼굴에 아무 표정이 없었는데, 그래서 더 시선이 갔다.
다른 졸업생들은 기뻐하거나, 서운해하거나,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녀는 그저 그곳에 서 있었다. 마치 그 자리를 지키는 나무처럼.
그 조용한 아름다움에 장수호는 찰나의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누군가 자박자박 걸어서 마음속으로 들어온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결국 그의 인연은 아니었다.
그걸 그녀와 처음 이야기를 나눈 날 깨달아 버렸다.
그 뒤에 그녀를 도와 최태혁이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라는 증거를 찾은 건 그한테도 꼭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가 단념해야 할 이유를 그의 마음에게 주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장수호의 축하에 나영은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었다.
그녀를 이리 예쁘게 웃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장수호는 그의 마음에 마침표를 찍었다.
***
“차 감독님!”
승희가 그를 크게 부르며 뛰어오자 차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저 오늘 달라 보이지 않아요?”
“지금 나한테 미모 어필을 하는 겁니까?”
매일 연예인을 보고 사는 그한테.
오늘도 여기 오기 전에 그는 청춘스타 은별과 있었다.
지금 찍는 영화의 여주인공이 은별이었다. 태혁의 병원에서 담배로 소동을 피웠던 바로 그 여배우.
“제가 태어나서 오늘이 최고로 예쁜 날이거든요.”
그녀의 자랑에 차현은 결국 웃고 말았다.
그가 항상 질 수밖에 없는 게 승희는 모든 말이 진심이었다. 가식이 없었다.
사람은 감정이 많아지면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단순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젠 그녀가 그렇게 평생 살았으면 좋겠다.
슬픔 따위 느껴봤자 눈물만 흘릴 테니까.
적어도 그가 그녀의 첫 번째 슬픔이 되는 건 사절이다.
그가 어머니한테 버림받은 상처를 평생 지니고 살 듯이, 그도 그녀한테 그런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저한테 막 전화번호 알려주고 싶지 않으세요?”
꾸준한 전화번호 타령에 차현은 눈을 좁혔다.
“내 말을 잘 들어봐요. 오승희 씨.”
차현이 진지하게 나오자 승희도 긴장해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전화를 받는 건 나의 권리예요. 걸려 온 전화를 받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그런데 내가 무전기를 받아야 하는 건 내 의무예요. 그 무전기가 연결되면 난 무조건 대답해야 해요.”
차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전화번호예요? 무전기예요?”
“…….”
그 순간 승희의 눈에 차현이 악마로 보였다.
그걸 어떻게 선택하라고.
“그럼 둘 다 가지면 안 되나요?”
그녀가 소심하게 묻는 말에 차현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나만.”
그리 말하며 펼치는 손가락 하나를 승희는 앙 물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들어가요. 결혼식 시작할 시간이에요.”
차현이 앞서 걸어가다가 그녀가 안 따라오자 멈추어 서서 돌아보았다.
승희는 자신을 기다려 주는 남자를 쓸쓸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꼭 오아시스 같았다.
바로 눈앞에 보이지만 닿기 위해 다가가면 어느새 다가간 거리만큼 또 멀어져 있다.
오아시스 같은 남자와 그녀의 결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하며 승희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
어수선하던 식장은 신부가 버진로드 앞에 서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오늘 신부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고왔다.
“꼭 우리 손자며느리 닮은 아이가 나와야 할 텐데, 너 같은 놈 말고.”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고 태혁도 동의했다.
아이는 무조건 나영을 닮아야 했다. 그를 닮으면 큰일 났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문성철은 나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영은 아버지의 손을 잡기 전에 그에게 사과했다.
“아버지 때문에 유괴당했다고 한 말은 정말 죄송해요.”
내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아버지의 손을 떠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기 직전에야 겨우 사과를 할 수 있었다.
문성철은 고개를 저었다.
“내 탓이 맞아. 내가 태영건설 임원만 아니었어도 넌 그런 일을 안 당했을 테니까.”
“그래도 전 아버지 원망 안 해요.”
미워한 적은 있어도 원망은 아니었다.
“그래, 고맙구나.”
그리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그한테도 오늘은 뜻깊은 날이었다.
나영이 납치되었던 그날 이후 문성철은 어깨에 항상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왔었기에.
오늘에야 겨우 그 죄책감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제부터는 나영을 든든하게 지켜 줄 사람이 항상 그녀의 옆에 있을 테니까.
“행복하게 살아.”
나영은 그러겠다고 약속하며 미소를 지었다.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승준의 목소리가 식장 안에 울려 퍼지고 곧 결혼행진곡이 연주되었다.
나영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천히 버진로드 위를 걸어갔다.
멋있게 연미복을 차려입은 태혁이 길의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랑이 탈을 쓰고 어슬렁어슬렁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오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며 나영은 빙그레 웃게 되었다.
그렇게 길고 긴 여정을 끝내고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 과정이 아름답기만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젠 그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뜻깊었다.
그 모든 일이 두 사람의 역사였으니까.
태혁이 앞으로 걸어 나와 손을 내밀었다.
문성철이 딸의 손을 넘겨주기 전에 태혁을 보며 경고했다.
“울리지 마.”
오늘 신부 하객석에는 나영의 핸드폰에만 존재했던 서울중앙지검장이 진짜 와 있었기에 문성철의 말에는 더 힘이 있었다.
태혁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서야 나영의 손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네 아버지 보면 나도 가끔 아빠 없는 게 서럽다.”
그가 속삭이는 말을 듣고 나영은 최남기 쪽을 잠깐 보았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엄연히 다를 것이라 나영은 다른 말로 위로했다.
“그럼 교수님이 아빠 되면 되잖아요.”
그녀의 말에 태혁이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 임신했어?”
그의 목소리가 꽤 컸기에 앞줄에 앉아 있던 가족들과 사회자석에 서 있던 승준이 깜짝 놀라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식장 분위기가 술렁이는 걸 느낀 나영은 태혁을 흘겨보며 쐐기를 박았다.
“아뇨.”
태혁이 바로 실망이라는 표정을 짓자 나영은 명령했다.
“교수님, 웃어야죠.”
그들은 아직 결혼식 중이었다.
승준이 서둘러 혼인 서약을 하겠다고 말했다.
오늘은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었기에 두 사람의 혼인 서약과 성혼선언문으로 진행되었다.
“신랑 최태혁 군은 신부 문나영 양을 아내로 맞이하여 죽는 날까지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절대 사고 안 치고 남편의 도리를 다하며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까?”
혼인 서약에서조차 사고 치지 말라는 말이 나오자 태혁은 잠시 승준을 쳐다보다가 겸허히 받아들였다.
“네, 맹세합니다.”
그때 결혼식장 밖에서는 쏟아붓던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에 씻긴 세상은 한층 더 깨끗해져 있었다.
태혁은 그의 신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비록 삶의 시작은 비극이었지만, 살면서 그만의 해피엔딩을 찾았으니 만족했다.
그한테 행복은 신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면서 키워낸 열매였다.
이제 그가 키워낼 다음 행복은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서, 그 아이를 아주 오래도록 지켜 주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가 된 나영과 함께.
그런 삶이 아주 많이 기대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