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남편의 내조
(80/84)
80화. 남편의 내조
(80/84)
80화. 남편의 내조
2023.07.07.
어머니는 반갑게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태혁도 어머니에게 잘하겠다는 의지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버지는?”
“서재에 계셔.”
어머니가 아버지를 모셔 올 동안 두 사람은 거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태혁은 고개를 들어 3층까지 뻥 뚫린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어릴 때 폐소공포증이 심해서 이 집으로 이사 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그녀의 설명을 듣고 태혁은 고개를 내려 나영의 얼굴을 보았다.
“나도 고소공포증 있어.”
“네? 거짓말.”
“정말이야. 그래서 번지점프를 못해.”
“설마 거기까지 가서 포기하신 거예요?”
그녀가 웃기에 같이 웃던 태혁은 거실로 나오는 문성철 전무를 보고 바로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태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문성철 전무에게 인사했다.
“오늘은 두 분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태혁이 아버지를 보자마자 그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나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연희도 훅 들어온 결혼 허락에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문성철은 미간이 굳어졌다가 펴며 말했다.
“우선 식사부터 하지.”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니 반은 허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연희는 기분 좋게 태혁에게 말했다.
“갈비탕 좋아한다고 해서 준비했어요.”
갈비탕이라는 말에 태혁은 고개를 돌려 나영을 보았다.
나영이 일부러 선택한 메뉴였다. 그녀의 탄 갈비탕을 만회하기 위해서.
“우리 엄마 갈비탕은 정말 맛있어요.”
그녀의 말대로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훌륭했지만, 태혁에게 더 인상적이었던 요리는 나영이 해준 탄 갈비탕이었다.
그 맛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식사를 무사히 끝내고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결혼은 나영이 레지던트 끝나고 하는 게 좋지 않겠나?”
문성철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빨리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태혁은 당장 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문성철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렇게 말했다가 미래의 장인어른에게 밉보일까 봐 입술만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최태혁 교수의 모습을 처음 본 나영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말했다.
“전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아버지가 진심이냐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태혁은 감격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시부모님 앞에서는 남편이 아내 편을 들어야 한다고 하더니, 그녀는 시부모가 없는 대신 친정 부모님 앞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완벽한 아내였다.
“레지던트 1년 차 끝나고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원래는 레지던트 1년 차 끝나면 슬슬 연애나 해볼까 했는데, 이젠 결혼을 하게 생겼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가 교수님 내조받으며 레지던트 하면 좋잖아요.”
그녀의 당돌한 말에 어머니가 당황해서 나무랐다.
“내조는 네가 남편한테 해야 하는 거지, 그걸 어떻게 최 교수한테 시켜.”
“아뇨! 저도 잘할 수 있습니다.”
태혁이 내조도 문제없다고 하자 문성철은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태혁이 나영을 구해준 은혜를 고맙게 여겨서 이 결혼을 허락하는 것이지 그가 장수호보다 나은 점을 하나도 찾지 못했는데, 지금 하나 찾았다.
장수호는 못할 내조를 최태혁은 할 수 있었다.
“그 말 거짓말이면, 내가 이 결혼 무를 수도 있어.”
문성철의 경고에 태혁은 맹세했다.
나영이 레지던트를 끝낼 때까지는 모든 걸 나영에게 맞추며 살겠다고.
그렇게 최태혁 교수가 엄청난 희생을 약속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은 내년으로 결정되었다.
***
결혼식 날짜는 제일 먼저 결정했지만, 병원 일이 바빠서 정작 결혼 준비는 제대로 못 했다.
웬만한 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지만, 웨딩드레스만은 그녀가 직접 입어봐야만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 왔을 때 웨딩드레스를 맞추러 가게 되었다.
레지던트 2년 차가 되면서 수술실에서 거의 사느라 서른 시간이나 잠을 못 잤기에 웨딩샵에 가는 동안에는 태혁의 어깨에 기대 잠이 깊게 들었다.
“도착했어. 일어나.”
그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더니 태혁이 손으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며 혀를 찼다.
“웨딩드레스 입으러 와서 침이나 흘리고. 참 너무하십니다. 신부님.”
생리적인 현상을 구박하자 그녀는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더러워요?”
태혁은 바로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입맞춤했다.
오늘은 무조건 웨딩드레스를 입어봐야 했다. 안 그럼 결혼식 당일 아무거나 입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어머머! 신부님이 너무 미인이시라 제 눈이 다 황홀하네요.”
“우유처럼 뽀얀 피부라 웨딩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시겠어요. 웨딩드레스가 신부님의 미모를 다 살리지 못할 게 오히려 걱정이에요.”
웨딩샵 직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칭찬을 폭격기처럼 늘어놓았다. 나영은 부담되어서 태혁의 등 뒤로 숨으며 그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 왜 저래요?”
“너처럼 예쁜 신부 처음 보나 보지.”
나영은 아무래도 태혁이 미리 시킨 거 같아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같이 온 홍식이 미리 시킨 거였기에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던 홍식이 직원들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칭찬했다.
나영은 바로 웨딩샵 직원들의 손에 끌려가서 웨딩드레스가 입혀졌다. 옷만 입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 자리에서 신부 화장에 머리 손질까지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살짝 졸았다.
나영이 웨딩드레스를 입는 동안 태혁은 홍식과 함께 밖에서 기다렸다.
남자는 턱시도가 몸에 맞기만 하면 되기에 여자보다 준비가 수월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도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 나영이었다.
“형님. 오늘을 위해 제가 특별히 연예인 덕질하는 애한테 빌려온 카메라입니다.”
홍식이 대포카메라를 들어 올리며 자랑했다. 이 카메라라면 신부의 모든 모습을 놓치지 않고 고퀄리티로 다 담아낼 수 있었다.
“그래. 네가 있어 든든하다.”
태혁은 대충 칭찬하며 커튼이 처진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서성였다.
오늘은 그저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 것뿐인데도 그는 긴장이 되었다.
나영의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가던 그날부터 이 설레는 긴장감은 시도 때도 없이 그의 몸을 덮쳐왔다.
가끔은 그 긴장감이 두려움이 되기도 했다.
혹시라도 그가 그의 부모처럼 나영과의 결혼생활을 불행하게 끝낼까 봐.
그의 불운이 끝까지 그의 발목을 잡을까 봐.
“신부님 나가십니다.”
직원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때리며 커튼이 양옆으로 열렸다.
핀 조명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향해 떨어지며 여인을 더욱 천사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주었다.
찰칵 찰칵 찰칵.
오늘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따라온 홍식이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짝짝짝짝.
웨딩샵 직원들도 박수치며 그녀의 미모를 칭찬했다. 이번엔 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나영은 다른 사람보다 태혁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아까부터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이건 별로예요?”
뚜벅.
그제야 태혁은 그녀한테 한발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꼭 첫눈처럼 보였다. 봄날의 흰 꽃 같기도 했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빛이기도 했다.
축복이고, 기쁨이었다.
이런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그는 행운아가 분명했다.
그의 운명은 어쩌면 그녀를 만난 순간 이미 바뀐 것인지도 몰랐다.
뚜벅뚜벅.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태혁은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나영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여기서 당장 널 안고 싶어.”
그가 안고 싶다는 말이 두 팔로 하는 포옹을 뜻하는 건 아닌 거 같았기에 나영은 귀가 빨개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있었기에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그에게 말했다.
“신랑답게 품위를 지켜 주세요.”
태혁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내가 품위 있다고 생각한 적이 1초라도 있었어?”
나영은 부드러운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교수님도 노력하면 할 수 있어요.”
태혁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에게 약속했다.
“결혼식에서는 내가 품위 있는 신랑이 되도록 노력할게.”
그만 약속하는 건 불공평했기에 그녀도 약속했다.
“그럼 저는 아름다운 신부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살면서 이보다 더 완벽한 순간은 분명 몇 번 없을 것이었다.
***
늦봄.
장마철도 아닌데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출근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이날 결혼하는 부부가 있었다.
우산을 쓰고도 젖어서 식장에 들어선 병원 사람들은 툴툴거렸다.
“결혼해도 하필 이런 날 결혼하냐.”
“그러게. 이러다 금방 이혼하는 거 아냐?”
“남의 결혼식에 와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요!”
버럭 성을 내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한껏 꾸민 오승희가 씩씩대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 오 선생. 오늘 예쁜데.”
하지만 그녀를 칭찬하는 말에 바로 표정이 바뀌었다.
“진짜요?”
“그래, 오 선생이 시집가야겠어.”
승희는 오늘 들러리였기에 특별히 나영과 함께 메이크업까지 받았다.
역시 전문가의 손길이 닿으니 미모가 살아나나 보다.
승희는 차현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간이 되어도 안 보이기에 일부러 찾으러 온 것이었다.
그녀가 예쁘게 꾸민 모습을 빨리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최태혁의 결혼식에 차현이 빠질 리는 없었다.
“와! 근데 식장 하객들이 뭐 이리 대단하냐?”
평소에는 얼굴도 보기 힘든 기업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문나영 아버지가 대기업 임원이잖아.”
사실은 태혁의 할아버지 때문이지만, 병원 사람들이 그걸 알 리 없었다.
오늘 사회를 맡은 승준은 장수호가 보이자 서둘러 그한테 다가가 붙잡았다.
“내 여동생 봤나?”
승준이 묻는 말에 장수호는 못 봤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랑 같이 좀 찾아줘. 들러리 할 인간이 어딜 빨빨거리며 다니는지 모르겠어.”
장수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승준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전 신부 먼저 만나고 오겠습니다.”
“남의 여자 될 사람 굳이 만나서 뭐 하려고. 우리 여동생은 아직 싱글이라고.”
승준은 아직도 장수호를 포기할 수 없어서 매달렸다.
장수호만이 차현이란 마수에 빠진 여동생을 구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장수호는 기어코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서 신부대기실로 향했다.
똑똑.
그가 문을 노크하자 눈꽃처럼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영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