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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나랑 결혼해 줄래? (79/84)


79화. 나랑 결혼해 줄래?
2023.07.03.



 
탁 탁 탁.

홍식은 헐레벌떡 응급실로 뛰어 들어와서 의사를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오늘 트럭 교통사고로 실려 온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아직 수술 중입니다.”

수술하고 있다는 말에 홍식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홍식은 의사에게 수술실 위치를 묻고 정신없이 그곳으로 뛰어갔다.

‘수술 중’이라는 빨간 글자가 쓰여 있는 수술실 앞에 나영 혼자 피 묻은 태혁의 재킷을 끌어안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원피스도 붉은 피로 물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온통 비극적이라서 홍식은 그 앞에 주저앉으며 통곡했다.


“아이고! 형님! 오늘 프러포즈하러 온다고 했으면서 여기 이러고 있으면 어째요!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이건 아니잖아!”

홍식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나영이 고개를 들었다.

홍식은 병원 바닥에 주저앉아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홍식에게 다가갔다.


“홍식 씨. 울지 마요.”

그녀가 달래자 홍식이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


“우리 형님 괜찮겠죠? 여기서 죽는 거 아니죠? 형님이 딴 건 몰라도 명줄은 길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안 죽을 거예요. 그렇죠? 맞죠?”

나영은 지친 눈으로 홍식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다가 그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말했다.


“최태혁 교수님은 수술받는 게 아니라, 수술하고 있어요.”

홍식은 순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영을 쳐다보았다.


“네?”

나영은 오늘 같은 날도 이러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수술실에서 트럭 기사 수술하고 있다고요.”

트럭 운전사가 안간힘을 쓰며 다른 차들을 피한 덕에 크게 다친 건 트럭 운전사 한 명뿐이었다.

두 사람 앞에서 벌어진 교통사고였기에, 최태혁 교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프러포즈도 미루고 메스를 잡았다.

허공을 휘젓던 홍식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나영은 다시 의자로 걸어가서 앉았다. 지금은 태혁이 수술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그녀도 수술실에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그것마저 이 병원 레지던트들한테 수술의 기회를 먼저 줘야 한다면서 뒤로 밀렸다.

홍식이 두툼한 손으로 눈물을 닦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럼 식사라도 하고 오실래요?”

“제가 지금 뭘 먹고 싶은 사람처럼 보이나요?”

홍식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수술실 쪽을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프러포즈 결과가 썩 좋을 거 같지 않아서 홍식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럼 호텔에 가서 옷부터 갈아입으시겠어요? 피가 묻어서.”

피 묻은 옷으로 프러포즈는 영 아니지 않느냐는 말은 생략했다. 그도 눈치라는 게 있으니까.

나영은 그제야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야겠네요.”

홍식이 서둘러 나영을 에스코트하며 이 근처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향했다.

***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라서 크게 다친 트럭 운전사는 목숨을 건졌다.

태혁은 홍식이 잡은 호텔로 와서 옷을 갈아입으며 물었다.


“나영이 기분 어때?”

홍식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프러포즈 받으러 와서 피를 봤는데 좋으면 이상한 거죠.”

태혁도 처음부터 이럴 의도가 아니었기에 쯧 혀를 찼다.

설마 강원도 찾아온 두 번 다 병원에서 수술하게 될 줄 그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의 운이 그렇게 나쁜 줄 알았다면 강원도 근처에는 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오늘 프러포즈 안 할 수는 없잖아.”

“그렇죠. 프러포즈는 무조건 해야죠.”

옷을 다 갈아입고 태혁은 홍식에게 물었다.


“나 어때 보여?”

급하게 마련한 슈트이기는 했지만, 태혁이 워낙 몸이 훌륭했기에 맞춤복처럼 멋스러웠다.

홍식은 쌍따봉을 날렸다.


“안 넘어오는 여자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소파에 앉아 있던 나영은 그를 보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태혁이 홍식을 쳐다보자 홍식은 자기 탓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태혁은 나영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가자.”

나영은 이미 흥이 다 깨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태혁은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멋있는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나가서 내가 기분 좋게 해줄게.”

“그렇게 못 하면 우리 오늘 헤어져요.”

나영이 살벌하게 말하자 태혁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제발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말라고.

홍식은 처음 보게 된 형님의 비굴한 모습에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

쏴아아아아아.

밤에 오게 된 강원도 바다는 더 고적해져 있었다.

과정은 썩 아름답지 않았지만, 결국 이 바다를 두 사람은 또 함께 보게 되었다.

바다에 와서도 나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진짜 화가 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사람을 살리느라고 그리된 거였으니까.


“앞으로는 절대 여기 오지 말아야겠다.”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기 올 때마다 재수 없게 사고랑 자꾸 얽히잖아.”

그녀도 아무 말 안 했는데 그가 먼저 그리 말하자 나영은 조용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사고 난 사람들은 운이 좋은 거잖아요. 교수님한테 수술받았으니까.”

태혁은 그리 말해주는 나영이 정말 좋았다. 아마 다른 여자였다면 사고 때문에 망친 하루만 생각하며 그의 탓을 했을 거다.

태혁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하얀 손을 잡았다. 나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어느새 좀 더 가까워져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여기서 어머니한테 청혼했대.”

그의 말을 듣고 나영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정말요?”

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재수 형사한테 들었다.

아름다운 은행 창구 아가씨를 그 동네의 모든 남정네가 흠모했는데, 아버지가 그녀를 이 바다에 데리고 온 뒤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할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사람은 이제 없는데 바다는 그때와 그대로겠지.”

그리 말하며 밤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공허함을 읽은 나영은 그에게 좀 더 다가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서로의 체온이 전해지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교수님, 오늘 저한테 줄 거 있지 않아요?”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기에 태혁은 눈가가 움찔했다.

사실 반지를 꺼내기 전에 해야 할 낭만적인 말들을 몇 개 준비했기에. 차현과 리허설까지 했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 하는 거야?”

설마 안 좋은 뜻인가 싶어서 태혁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나영은 정말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더 이상 못 기다리겠어요.”

또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그가 빨리 프러포즈해주기를 바랐다.

그는 재킷 주머니에서 벨벳 상자를 꺼냈다.

달칵.

상자를 열자 다이아몬드 반지가 영롱하게 빛나며 밤을 아름답게 밝혔다.

나영은 반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태혁은 진중한 눈동자에 그녀를 품고 정중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지나온 시간의 엔딩이면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의 프롤로그였다.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미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거절은 무의미했다.

그렇다고 바로 좋다고 하는 건 손해 보는 거 같다.

아직도 손해를 따지는 걸 보니 앞으로도 두 사람은 꽤 많이 싸우게 될 거 같았다.

그러나 그게 사람 사는 맛일 테니, 이젠 겁이 나지는 않았다.

나영은 반지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새침하게 말했다.


“교수님이 무릎 꿇으면요.”

태혁은 바로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홍식은 준비한 폭죽을 터트렸다.

팡! 팡! 팡!

폭죽이 검은 하늘에 빛이 되어 피어오르자 바다는 한순간 화려해졌다.
 

 
나영이 깜짝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팡팡 터지는 불꽃이 마치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주는 것만 같았다.

불꽃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며 행복한 표정을 지으니 태혁도 미소 지었다.

그는 반지를 높이 들어 올리며 다시 그녀에게 청했다.


“부디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나영은 눈가가 뜨거워졌다.

어차피 처음부터 다 알고 온 자리였건만, 저 말을 직접 들으니 가슴이 벅찼다.

나영은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은반지를 빼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태혁은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팡!

그 순간 불꽃이 가장 높이 솟아오르며 터졌다.

멀리서 홍식이 두 손을 높이 올려 열렬히 박수쳤다.

태혁은 일어나서 그녀를 두 팔로 끌어안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 나영아.”

담백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사랑은 시들지 않을 꽃처럼 느껴졌다.

나영은 고동치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대답했다.


“저도요.”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에 청혼을 받아주었을 곳에서 그녀도 그의 프러포즈를 허락했다. 그래서 꼭 이곳 어딘가에서 두 사람이 프러포즈의 증인처럼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던 사이이지만 그럼에도 따스함은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

3주 뒤.

태혁은 태어나 처음으로 약국에서 청심환을 샀다.

한 알 먹고 효과가 없는 거 같아서 약사한테 하나를 더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한 번에 두 알을 먹고 또 청심환을 달라고 하자 약사가 그를 응원해 주었다.


“잘 되실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응원까지 받았는데 그게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오늘은 나영의 부모님께 정식으로 결혼 허락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두 사람이 이제는 그와 나영의 결혼을 무조건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유 없이 불안했다.

우선 나영의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고 나온 나영은 그를 보자마자 말했다.


“교수님한테 한약 냄새나요.”

청심환을 너무 과식했나 보다.

태혁은 나영에게 집에 가글 있냐고 물은 뒤 그 집 욕실에서 가글을 했다.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자 두 명이 속닥였다.


“최 교수님 긴장한 거 같은데?”

나영이 보기에도 그래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긴장해서 우리 아버지 앞에서 실수하지는 않겠지?”

“아빠라고만 안 부르면 돼. 설마 그렇겠어.”

승희는 자기 말이 웃겨서 킬킬대다가 태혁의 서늘한 눈과 마주치자 바로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신부 아버지 만나러 가는 남자는 생리 중인 여자보다 더 예민했다.

태혁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은 나영은 조심스럽게 태혁을 살폈다.


“제가 운전할까요?”

“나 어디 아픈 거 아니거든.”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그리 말하니 전혀 믿음이 안 갔다.


“아버지가 뭐라고 해도 저 꼭 교수님이랑 결혼할 거예요.”

“너의 아버지가 여전히 나 반대한대?”

그가 순식간에 낯빛이 창백해지자 나영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아뇨. 그리고 제가 옆에 있잖아요. 우리 집에선 내가 교수님 지켜줄게요.”

태혁은 그제야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 든든하네.”

이제 결혼식까지 단 한 걸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심장이 저릿저릿 마음이 찌릿찌릿.

이건 두려운 긴장감이 아니라 설레는 긴장감이었다.

이 결혼은 분명 그의 인생에 클라이맥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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